나의 논문 – 「5.16군사정부기 미 대한원조정책의 성격과 AID-유솜의 역할: 초기 울산공업단지 건설과정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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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5.16군사정부기 미 대한원조정책의 성격과

AID-유솜의 역할

: 초기 울산공업단지 건설과정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05, 2017. 9)

 

권혁은(현대사분과)

 

작년 12월 ‘역사와 현실’ 105호(2017년 9월)에 게재한 ‘5.16군사정부기 미 대한원조정책의 성격과 AID-유솜의 역할: 초기 울산공업단지 건설과정을 중심으로’에 대해 연구회에서 신진연구자 우수논문상을 수여해주셨다. 앞으로도 계속 해당 시기를 계속 연구할 예정이지만, 아직 전체 상을 스스로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고, 그 과정에서 나온 논문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잘 알기에 대외적으로 논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문제들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논문을 쓰게 된 계기와 아쉬운 점을 위주로 이번 글을 적어나가고자 한다.

 

이번 논문을 쓰게 된 이유는 순전히 1960년대 미국의 대한원조정책 전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특히나 우연히 발견한 ‘Proposed Mutual Defense and Development Programs-FY 1966’이라는 자료가 글을 구상할 수 있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다. 해당 자료는 미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국제개발처)와 국방부가 합동으로 국회에 제출한 1966년 대외원조 예산안으로, 미 원조계획의 계통과 목표, 지역별․국가별로 할당되는 원조별 통계치가 수록되어 있었다(현재 USAID는 1961년부터 2018년까지 전체 대외원조 예산안을 그린북(green book) 형태로 홈페이지에서 제공하고 있다).

 

자료에서 가장 눈에 띈 부분은 첫 머리의 요약설명에서 ‘원조의 집중’이라고 서술된 부분이었다. 자료는 전체 원조의 내용을 그래프와 함께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었다.

 

166700만 달러의 개발원조 중 3분의 2가 브라질, 칠레, 나이지리아, 튀니지, 인도, 파키스탄, 터키에 배정되었으며 총 38천만 달러의 방위지원원조 중 90% 이상이 베트남, 라오스, 한국, 요르단에 배정되었고, 125800만 달러의 군사원조 중 4분의 3이 총 350만의 반공군대를 유지하는 11개국에 배정되어 있다.”

 

[그림 1] 1966회계년도 예산안의 개발차관(Development Loan)과 방위지원(Supporting Assistance) 대상국 비교(USAID, 1965 Proposed Mutual Defense and Development Programs-FY 1966, p.4)

 

한국은 주요 방위지원 대상국 4개국 중 하나이자 군사원조 대상국 11개국 중 하나였다. 미 대외정책에서 한국의 위상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한국전쟁기부터 대량으로 공여된 대한경제원조가 ‘군사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은 한미관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상식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과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형성과정을 다룬 기존의 연구에서는 케네디정부가 등장한 이후 대외원조의 기조와 내용이 군사 중심에서 경제 중심, 무상원조에서 개발차관으로 전환하였으며, 이것이 미국의 5.16군사정부 승인과 제1차경제개발계획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곤 했다.

 

분명히 1961년부터 전 세계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관철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개발원조의 배분 비중에서 드러나듯이, 자료는 전환의 초점이 이른바 ‘근대화론’의 주요 대상 지역이었던 라틴아메리카였으며, 1964년까지 대한원조액에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 간의 비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전환된 정책의 핵심 요소였던 개발차관은 극히 미미한 정도로만 공여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달라진 점은, 자국의 경제규모에 비해 막대한 군사력 부담을 지고 있는 국가들에게 제공되는 경제안정원조인 방위지원이 50% 이하로 삭감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즉, 1960년대 들어서 대한원조정책은 분명히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이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긴 했으나, 엄연히 지역별 간극과 시간적 낙차가 존재했던 것이다. 5.16군정기 약 3년간 공여된 대한원조는 여전히 군사적 성격이 강했으며, 대한원조구조를 개편하고자 했던 미 관료들은 그러한 ‘경직성’ 때문에 원조 개편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토로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이 시행되기 시작한 1962부터 1964년까지 대한원조는 총액의 급격한 감축 외에는 실질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원조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따라서 5.16군정기 3년간은 이른바 대한원조정책 전환의 ‘과도기’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외정책의 지역별 간극과 시간적 낙차가 한국의 경제개발 추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케네디정부는 5.16군사정부에게 쿠데타 승인 조건으로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요구했다. 따라서 군사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자금 대부분을 미 정부로부터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기존의 원조구조가 계속 유지되는 한, 또한 제3세계 경제개발을 위한 개발차관이 한국에 상당정도로 공여되지 않는 한, 군사정부가 그러한 자금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한미간의 불협화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략적으로만 그리고 있었던 구상이 구체화된 계기는 2016년 12월에 열린 경제사반 공동발표회였다. 함께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의 조언을 받아 위와 같은 양상이 표출된 구체적 사례로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중추였던 울산공업단지 계획에 주목하게 되었고,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흥미로운 지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5.16군사정부가 처음 울산공업단지계획을 발표했을 때 주한미대사와 유솜처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지원을 권고했다. 그러나 대한원조구조 개편을 논의하고 있던 워싱턴에서 이를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에 울산공업단지에 대한 미 정부 차원의 지원은 제공되지 않았다. 대신 미 본국은 미국 민간자본을 동원하려고 했다. 이는 처음에 이승만 정권기부터 한국군 고위 간부와 긴밀한 인연을 맺었던 밴 플리트와 같은 ‘중개업자’를 동원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나, 밴 플리트와 5.16 군사정부 간의 경제적 유착관계, AID와 밴 플리트가 이끈 민간기업들의 동상이몽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엔 원조기관인 AID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직접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참여할 미국 민간자본을 물색하는 ‘중개업자’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AID는 군사정부의 정유공장 국유․국영 방침과 일본 상업차관을 통한 요소단일비료공장 건설계획을 좌절시키고, 정유공장과 비료공장에 대한 미 민간자본의 직접투자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5.16군사정부기 대한원조정책의 ‘과도기’적 성격으로 인해 대한원조의 차원에서 울산공업단지에 대한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이 제1차경제개발계획의 중추였던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방관자적 입장만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AID는 적극적인 ‘중개업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미국 민간자본의 울산공업단지 투자를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정부가 애초에 구상한 공장의 소유․운영형태와 생산계획을 변화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미 간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으나 기존 연구들이 지적한 바과 같이, 5.16군사정부는 점차 미국의 의도에 순치되었다.

 

이상이 논문에서 다룬 내용이다. 이미 눈치를 챈 독자도 계실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대한원조정책의 성격이라는,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한 논의를 울산공업단지라는 구체적 사례와 접합시킴으로써 이도저도 아닌 논문이 되었다는 자책감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나름대로 치밀하게 쓰려고 했으나 이 시기 대한원조정책의 성격을 이후의 전개과정과 연결시키지 못했고, 울산공업단지에 대한 AID의 개입과 그 내용이 당시 제3세계 국가 일반에서 관찰되는 현상인지, 혹은 한국에서도 이 시기에만 나타난 현상인지 검토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1961-1964년 간 대한원조정책의 ‘과도기’성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과도기 이후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대한원조정책의 특수성과 보편성, 역사성이 무엇인지 염두에 두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발표와 심사 과정에서 토론자와 심사자 선생님들께서 지적한 문제들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논문을 어떻게 소개할지 오랫동안 망설였다는 사실도 고백하고자 한다. 부끄럽지만 지면을 빌어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그동안 받은 지적들에 나름의 답을 마련하고, 1960년대 전반에 대한 뚜렷한 상을 그려보겠다는 다짐을 하겠다. 부족한 논문에 상을 주신 편집위원장님과 편집위원 선생님과 연구회 성원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