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史호선] 식민지 공간의 상징, 종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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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史호선 답사기,

식민지 공간의 상징, 종로의 변화

 

이승아

 


 

오늘날 서울의 심장은 어디일까? 누군가는 서울의 중구나 광화문광장, 강남 등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혹 누군가는 도심 어디든 붐비는 인파와 고층건물에 고개를 흔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 서울의 심장은 명실상부하게 종로거리였다.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를 위시하여 종각을 중심으로 밀집된 상가와 즐비했던 건물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 다하여 ‘운종가(雲從街)’라 이름 부쳐진 곳, 이 일대가 한양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과거 화려했던 조선의 중심지는 근현대의 격동 속에서 어떻게 변화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종로로 이어지는가?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번 답사의 기획이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거리에서 근현대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는데 있는 만큼 오늘날 범상한 종로 거리를 걸으며 종로거리의 변화와 사건들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은 답사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답사는 종각에서 출발하여 옛 운종가와 종로경찰서 터를 지나 탑골공원, 천도교 중앙대교당, 종묘와 창경궁 사이를 지나는 것으로 종료되었다.

 

 

조선인의 중심 조선의 중심에서 밀려나다

 

답사의 시작은 종각역이었다. 그러나 처음 답사의 출발지는 ‘도로원표’가 서있는 광화문 광장으로 정했었다. 그 표석이 일제의 근대적 기획이었건 혹은 중간에 이동되었건 관계없이 이 원표가 마치 서울의 중심임을 대변하는 듯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광화문 일대는 경조아문과 한성부가 자리한 곳이자 과거에도 사람들이 모여 민의를 대변하던 공간이었고 표석 옆의 칭경기념비는 답사의 이야기를 대한제국으로 시작하기 좋았다. 그러나 답사 당일 집회와 행사의 번잡함, 동선의 문제로 최종 출발지는 종각이 되었다.

 

종각은 현재 개방되지 않아 누각에 오르거나 종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다. 처음 종루를 세워 도성의 개폐를 알렸을 때는 그 위치가 인사동 입교의 청운교 서쪽이었다. 1413년 도성의 중심가로서 운종가를 정비하면서 종루를 현재의 종로 네거리로 옮겼고 현재의 건물과 종은 한국전쟁 이후 오늘날 재건한 것이다. 보신각 앞에서 종로사거리를 바라보면 우선 마주한 종로타워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자리가 과거 육의전 중에서도 으뜸인 수전으로 선전(縇廛)의 위치이다. 이 자리가 곧 그 시대의 상계와 부를 대표했다고 하는데 과연 현재 삼성이 세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재밌게 느껴졌다. 학생들과 잠시 과거의 운종가를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상상은 쉽지 않았다.

 

 

종로타워를 지나 장안 빌딩과 YMCA 건물 앞에는 ‘김상옥 의거 터’라는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였던 한성전기회사가 있었던 곳이고 또 달리 말하면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가 있던 곳이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과 함께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고 곧 전차가 운영되었다. 이 네거리는 남대문방향 노선과 청량리방향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전등과 전화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가장 번화했던 거리에 최신 문물과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결국 자금과 기술의 한계로 한성전기회사는 차례로 미국과 일본에 매각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그 건물은 종로경찰서로 이용되어 탄압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의 번화한 종로 거리와 상가는 대한제국과 함께 쇠퇴해 갔으며 충무로의 일본 거리를 위시한 명동일대가 새롭게 ‘경성’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자리해 갔다. 문득 뒤바뀐 운명의 교차점들은 끝없이 연속되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개혁의 중심에서 저항의 중심지로

 

피맛골에서 간단히 식사 후 바로 건너편에 있는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이때부터 날씨의 징조는 좋지 않았다. 팔각정 공원은 겉에서 보는 것 보다 넓고 볼거리가 많다.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한손에 두루마리를 꼭 쥔 손병희선생의 동상과 3.1운동 기념탑이 보인다. 이 공원이 보여주듯 일제 강점기 종로는 조선인에게 여전히 중요하였다. 비록 종로가 더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조선인의 다수가 거주하던 조선인의 거리였고 자연스레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것이다. 과거 을미사변 때도 종로 곳곳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으며 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이곳은 반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일제에 저항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이런 역사가 없었더라면 독립이 쉽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다시금 이 중요성을 학생들과 짚어보고 또 기념탑 앞에서 자원<?>한 학생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들으며 한차례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팔각정에서 잠시간 쉬다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이동하였다. 천도교 교당에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고 독립선언문 배부터, 방정환 기념비 등을 둘러보며 당시 긴박했던 3.1운동의 순간들을 생각해보았다.

 

 

 

국운의 상징, 종묘의 단절 그리고 현재와 과거, 미래

 

처음은 늘 어려운 것이란 변명과 함께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보낸 버린 듯하였다. 그럼에도 답사의 원안과 서대문형무소란 대안 사이 고민 끝에 원안대로 답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고 종착지는 비를 피할 목적으로 종묘 밖 창경궁 사이 건설된 터널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종착지에 도착했지만 중간에 더욱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일행들의 원성도 쏟아지는 듯했고 그들은 연신 이곳은 어딘가란 의문의 눈길을 보내는 듯 했다. 만약 시간이나 상황이 허락하여 종묘를 직접 둘러보았다면 더 좋은 답사가 되었을 거란 아쉬움이 스쳤다. 사실 종묘는 일제강점의 문제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누구나 ‘종묘와 사직을 이어’란 말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매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일은 왕의 중요한 의무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오랜 원칙은 옛 도성의 주요한 구성 원리였다. 따라서 종묘는 유교를 이념으로 한 국가와 왕실의 존속을 상징할 수 있다. 종묘가 훼손되는 일은 조선왕조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종묘와 창경궁은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훼손, 분리되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찬반의 여론 속에서 혹은 무관심 속에서 창경궁과 종묘의 연결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비로 인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채 서둘러 답사를 마무리 지었지만 우리가 비를 피하던 공사 현장이 바로 창경궁과 종묘의 연결을 위해 건설한 터널이었다. 이로써 과거 북한산 자락과 창경궁의 녹지와 종묘를 잇고 동시에 터널을 개통하여 교통의 이점을 살리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지형을 회복하는 것에 비교하면 큰 시간과 비용이 들고, 그곳에 자리해왔던 거목을 베어내야 하며, 그 공원을 이용하던 시민들의 편의를 해친다는 비판도 있다. 비록 한국사가 전공은 아니지만 역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학생들이 이번 종로 답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떤 결정과 합의의 순간들을 생각해보길 바랐다. 물론 종로가 종묘의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란 질문에는 현재에도 과거와 미래에도 고정된 정답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