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30주년 기념, 나의 서른을 기억하다] ‘새추위’의 추억 :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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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추위’의 추억 :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논쟁

(한국역사연구회 30주년 기념, 나의 서른을 기억하다)

 

임경석(근대사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한국역사연구회 30주년 기념, 나의 서른을 기억하다’를 연재합니다. ‘나의 서른을 기억하다’는 릴레이 방식으로, 앞서 연재에 참여한 선생님이 다음 사람을 추천하여 글을 이어갑니다.

이하는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논쟁에 대한 임경석 선생님의 글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추위’를 아십니까? 약자입니다. ‘새 연구단체 추진위원회’의 줄임말입니다. 지금은 생소하지만 30년 전에 한국역사연구회가 창립될 당시에는 제법 귀에 익은 말이었습니다. 젊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는 말이죠.

 

30년 전이라면 1987년이군요. 한국 사회가 급변하던 때였습니다.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표출된 민중의 혁명적 열기가 지글지글 끓었고, 군사독재 정권은 6.29 선언을 통하여 지배체제 안정의 연착륙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연구자들도 이 소용돌이 안에 있었습니다. 대학원에 재학하는 젊은 연구자들은 학계의 기존 질서에 합류하기를 거절하고 독립적인 학문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망원한국사연구실(망원)과 한국근대사연구회(한근연)가 그 대표적인 보기였습니다.

 

이 두 단체를 통합하여 영향력있는 연구자단체를 만들자는 제안이 1987년 11월부터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6월항쟁 이후의 열린 공간에서는 소그룹 형태를 넘어선 본격적인 연구자단체가 필요하다는 공감 말입니다.

 

한근연이 한발 빨랐습니다. 11월 4일부터 네 차례에 걸친 토론을 가졌고, 이듬해 1월 수련회 석상에서 양자 통합을 통해 새 연구단체를 건설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하여 한근연 임원회의에서 5인 위원으로 구성된 ‘새 연구단체 추진위원회’를 선출했습니다. 바로 새추위입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한상권, 방기중, 박찬승, 주진오, 임경석이 그 멤버였습니다. 저는 그때 서른 살이었습니다. 다른 위원들은 2-5년 선배급이었고 제가 연령상으로 막내였습니다.

 

사진01한근연새추위회의기록_임경석

[사진 1] 새추위 회의 결과를 기록한 임경석의 메모 첫 페이지

새추위에 맡겨진 임무는 컸습니다. 한근연 내부의 의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임시총회 소집을 준비하고, 망원과의 교섭을 진행하는 것이 그 골자였습니다. 저는 망원과의 교섭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교섭 5원칙을 세웠습니다. 양측 문건을 상대방 회원들에게 교차 전달한다, 의견 그룹 별로 두 단체 회원들의 합동 논의를 조직할 수 있다, 상대측 토론회 참석을 허용하며 발언권을 부여한다, 양측 새추위 연석회의를 갖는다 등이었습니다.

 

망원측 논의는 한 템포 늦은데다가 복잡하게 전개됐습니다. 1987년 11월 28일부터 세 차례 운영위원회 내부 논의가 이뤄졌고, 이듬해 1월 18일부터 2월 5일까지 각급 부서별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한근연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회원들 내부에 많은 이견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의견을 수렴할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마침내 망원연구실의 거의 모든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은, 운명의 날이 왔습니다. 1988년 2월 6일 겨울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대충 헤아려 봤더니 50여명의 회원이 한 방에 둘러앉았더군요. 저는 망원 회원은 아니었지만, 한근연 새추위 위원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넓은 방에 모여앉은 참석자들이 임대식 사회 하에 심각하게 토론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말입니다. 그때는 담배를 많이들 피우던 시절입니다. 겨울이라 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온 방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중요 문제를 다루는 심야 회의석상에서는 흡연자라면 으레 새 담배 한 갑 정도는 몸에 지니고 임했습니다. 그때 H씨는 이채로왔습니다. 한 갑이 아니라 열 갑들이 한 보루를 가방 속에 챙겼기 때문이죠. 아무튼 밤샘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막강 전투력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갑론을박이 오갔습니다. 발언자 개인마다 초점의 차이가 있었지만 세 가지 경향이 뚜렷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하나는 통합론이었습니다. 지체없이 양 단체를 전면적으로 통합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새로운 연구자 대중단체의 건설 방향」이라는 기조 발표를 맡은 이윤상을 비롯하여 이애숙, 도진순, 한홍구, 임대식 등이 이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점진적 통합론이었습니다. 통합에 찬성하지만 과도기를 설정하여 ‘핵심대오’를 결속한 이후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새로운 연구자대중운동단체 건설의 올바른 방법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두 번째 발제를 맡았던 정용욱을 비롯하여 김한수 등이 이 주장을 대변했습니다.

사진02정용욱_연구자대중운동단체건설_망원수련회

[사진 2] 점진적 통합론을 제시한 정용욱의 발제문 첫 페이지 (1988.2.6 망원 수련회)

또 하나는 망원 존속론이었습니다. 새 연구단체 설립에 관계없이 망원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망원은 근로대중에 대한 문화선전 사업을 중시하는 반합법, 반공개 영역의 연구자 활동가 조직이므로 한근연이나 새 연구단체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입론이었습니다. 참석자 가운데 홍순권, 김동춘, 염인호, 김선경, 김광운 등이 이 견해를 견지했습니다.

 

거론되는 이름만 들어도 참 화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인물들이 모두 망원의 멤버들이었습니다. 명민한 젊은 대학원생들이 역사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하는 현장이었습니다. ‘한국역사연구회 창립 논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역사적인 논쟁이었습니다. 그해 추운 겨울날 망원연구실의 수련회 자리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뒷얘기가 궁금하지요? 한근연에서는 통합론이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최고 심급의 의결을 위해서 1988년 2월 22일 임시총회가 열렸습니다. 「망원과의 전면적 통합에 기초한 새 연구회 창립 추진안」을 상정하여 표결에 부쳤습니다. 그 결과 재석 46명 가운데 찬성 40표, 반대 3표, 기권 3표이 나왔습니다. 87%의 찬성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망원은 달랐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견이 끝내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해 28일에 제7차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에 관한 표결에 들어갔습니다. 「망원 해소안」이 상정됐습니다. 그 결과 출석회원 57명 가운데 찬성 19표, 반대 33표, 기권 5표가 나왔습니다. 찬성율은 3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양 단체 통합론은 부결됐습니다. 그리하여 두 단체 통합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새추위는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생명을 다했습니다. 저도 새추위 위원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여 몹시 유감이었습니다.

 

여기서 사안이 종결됐다면 한국역사연구회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달 뒤에 새 연구단체 설립운동의 제2막이 올랐습니다. 망원 총회에서 선출된 새 집행부가 통합 필요성이 여전히 상존해 있음을 확인하고 새 연구단체 건설을 다시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 제안이 기폭제가 되어 결국 1988년 9월 3일 한국역사연구회가 창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틱한 전환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