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변화와 2004년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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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변화와 2004년 총선

 

안 병 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뒷날 역사에서 17대 총선을 민중 승리의 한 장으로 기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선거에서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지난날 우리사회는 수많은 선거를 치러 왔지만 그 결과는 늘 압제자의 치장품 구실로 끝나고 말았다. 그 동안 처절한 투쟁을 통해 어렵게 얻어낸 성과들도 선거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1960년 4월항쟁의 결과가 그랬고,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예전과 달리 이번 선거에서는 사회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는 2002년의 반미 촛불시위와 대통령 선거, 그리고 대통령 탄핵소추 무효화를 요구한 촛불시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17대 총선 결과로 1)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였고 수구기득권 세력이 원내 다수당에서 밀려났다. 민주화운동에 관계한 자유주의적 성향의 개혁적 인사들이 상당수 원내에 진출하였다. 2) 민주노동당은 10명의 의원을 당선시킴으로써 4·19 이후 처음으로 진보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는 우리역사에서 민중조직에 기반을 둔 진보세력으로는 최초의 원내 진출이다. 3) 지난 16대의 5.6%에 비해 크게 신장한 13%의 39명 여성의원과 노동자 장애인 등 소외 계층을 대변할 의원들이 상당수 당선되었다. 4) 새로운 선거제도가 도입되어 선거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1인 2표제를 도입함으로써 전국구 의원의 대표성이 확보되었다. 금전을 통한 매표행위와 청중동원의 부조리 같은 것이 거의 사라졌다. 5) 많은 지역에서 후보 경선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신진 후보들이 출마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상당수가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17대 국회의 초선의원 비율이 63%에 이르게 되었다. 기성정치인들과 다른 차세대 정치인들의 부상이다. 6) 냉전 이념의 공세가 통용되지 않았으며 지역간 차별과 대립의 구도가 상당히 위축되었지만 박정희시대의 영남 패권주의는 아직 여전했다. 7) 이른바 3김씨로 대표되는 보스 중심의 과두체제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지막 한사람마저 이번에 낙선함으로써 지난 40여년간 한국의 정당과 정치인들을 조종해 왔던 ‘3김 시대’가 끝났다.

‘차떼기’ 정치

과거와는 다른 17대 국회의 구성은 앞으로 퇴행적인 정치문화를 크게 변화시킬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의 정치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아 왔으며, 부패와 부정의 원천으로 규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평화와 안녕보다는 소수 기득권 세력의 군림을 위해 한반도 전쟁을 부추기까지 해 온 것이다. 과연 우리사회에 의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회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6월 시작된 16대 국회만을 살펴보더라도 의원들은 남북간의 화해를 방해하고 한반도에 끝없는 불화와 긴장을 조성하고 민족간의 적대와 반목을 부추기기에 열심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6·15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훼손시키기에 혈안이었다. 그래서 어느 의원은 “확전을 각오해야 한다. 전쟁 한번 해요”라는 침략광적인 요구를 거리낌없이 뱉어 냈다. 또 다른 의원은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하는 대통령의 발언에 제동을 걸었다. 그런 발언은 미국의 북한폭격 정책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 국회의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정치자금을 약탈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욱이 어느 범죄집단도 흉내 낼 수 없는 파렴치한 수법들을 동원했다. 부패 비리의 동료의원들을 사법처벌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이른바 ‘방탄국회’를 반복해서 열었다. 이는 회기중 불체포 특권을 이용해서 국회를 범인 은닉 장소로 전락시킨 것이다. 또 구속된 동료의원을 석방요구안으로 감옥에서 빼내 오기도 했다. 그들은 부패자금을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무기명 채권으로 거두어 암시장에서 교환해 사용했다. 또 아예 수백억원 현찰을 차에 실어 트럭 채로 갈취했다. 이러한 소위 ‘차떼기 정당’이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정치판에서 국회의원은 기업을 갈취할 수 있는 면허 소지자인 셈이다.

유권자들은 저질의 정치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투표에 임하는 입장이 최선의 후보를 선택하기 위한 것도, 차선의 후보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 최악을 모면하기 위해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지난 역사를 돌아본다면 허용되지 않았다.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기조차 불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1960년 4월항쟁, 1987년 6월항쟁같은 경우 여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최악의 선택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 풍토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반세기 넘는 시행착오를 겪고 난 후였다. 지난 200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은 어렵사리 기득권층의 함정을 피할 수 있었다. 전가의 보도와 같은 이념공세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또 음모와 공작의 시도들은 실패했다. 무엇보다 지역차별과 지역갈등의 감정을 상당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노무현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수구 반동의 주장에 오염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통해 단련된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뛰어난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대부분 기성세대가 한계에 부딪쳐 체념해 버리는 순간 우리 역사의 젊은 세대들은 그 한계를 극복하고 진보의 지평을 새롭게 개척했다. 지난날에도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를 구하기 위해 역사의 전위에 나섰던 층은 다름 아닌 당시 20대 전후의 청년층이었다.

역동적인 변화

오늘의 젊은 세대는 인터넷을 여의봉 같은 무기로 활용하여 수구언론이 정교하게 구축한 억압구조를 무력화시켰다.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왜곡과 거짓을 걸러내고 진실과 정당한 주장들을 눈덩이처럼 굴려 올바른 여론으로 키워 냈다. 지난날에는 유인물을 뿌리고, 대자보를 붙여가면서, 목소리 높여 동지들을 모아야 했다. 그도 어려울 땐 끝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 공간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한순간에 수만명 동지들을 확인할 수 있고 수구언론의 선동적인 궤변을 일거에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수구언론은 과거처럼 왜곡된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파하고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월드컵을 통해 폭발한 한국사회의 역동성이었다. 붉은 악마로 표상된 새로운 응원 문화는 사이버 공간에 머물러 있던 군중들을 거리로 불러모았다. 지금까지 금단 지역으로만 여겨지고 접근이 금지되었던 거리였다. 그 거리에 모여든 수십만 군중들은 폭풍처럼 권위주의 찌꺼기를 휩쓸어 냈다. 금기가 무너진 거리는 다른 어디보다도 매력적인 환상의 열린 마당이 되었다. 군중들은 거리를 마음껏 내달리면서 상쾌하고 통쾌하고 짜릿한 흥분을 맛 볼 수 있었다.

그 공간은 피흘리는 전투를 치르지 않고는 밟아 볼 수 없었던 곳이었다. 분노에 찬 젊은 투사들이 중무장한 전투경찰을 상대로 돌멩이와 화염병으로 맞서는 육탄전의 싸움터였던 것이다. 최루탄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울분을 토하고, 절규하던 장소였다.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주한 미군의 살인 폭력으로 희생된 두 여중생을 위해 촛불을 켜 들었고 이는 마침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문화를 창출했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각기 가녀린 촛불 하나씩을 앞세우고 찾아든 것이다. 그들 손에 들린 촛불은 빛으로 소통하는 연결망이었다. 통신망이었다. 응원단의 붉은 유니폼이 집단적이고 공격적이라면 촛불은 한사람 한사람의 소명의식이 아니라면 곧 사그라지고 말 연약한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의 메시지였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외면한 것은 수구세력이었다. 세상의 변화는 곧 그들에게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수구세력들은 지난 김대중정부 5년간의 대북 화해정책으로 인해 특히 젊은 세대의 느슨해진 반공 안보의식이 나라의 기틀을 흔들어 국가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더욱 염려스러운 현상은 반미의식의 확산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대하는 그들의 반응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했고 그같은 행태는 더욱 자신들을 민심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오도된 군중심리가 야기한 잘못된 결과로 치부했다. 그들은 그 선거 결과를 수긍하지 못했고 할 수만 있다면 되물리고 싶어했다. 여기에 대선 자금의 부정비리가 하나하나 폭로되는 상황에서 수구세력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수백억원의 부정한 정치자금이 뒷거래되는 실상이 까발려지는 가운데 대중들로부터는 엄청난 비난과 질타를 받아야 했다.

탄핵정국

수구세력들은 기득권을 잃게 되고 존립마저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마침 노무현정권의 미숙하고 돌출적인 행보가 이어지자 그 틈을 이용하여 한가닥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던 세력들은 기대와는 달리 노정권이 대미외교에서 내보인 굴욕적인 모습, 미온적인 대북정책, 친자본의 경제정책, 약속과는 다른 지지부진한 개혁정책, 그리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언행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상 노무현 정부는 계층적인 특정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정치적 요구를 실현시켜줄 대리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 한국정치의 파행적인 역정에서 발휘한 그의 승부사적 선택이 가지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서는 그의 처신에 따라 한순간에 역전될 수 있다. 따라서 안정된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노대통령은 당분간 고립적인 상황을 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틈을 노려 수구세력들은 강압적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는 3분의 2이상을 점하고 있던 수구세력이 숫자의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감행한 쿠데타였다. 1998년 김대중정부 이래 빼앗긴 냉전지향 정권의 복고를 노린 정변이었다.

정해진 임기가 불과 두어 달밖에 남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한달 뒤로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임기가 4년이나 남은 대통령을 탄핵한 것이다. 탄핵안을 가결하는 순간까지 국회는 검은 정치자금과 방탄국회로 국민들의 질타를 받아오던 중이었다. 더욱이 지난 일년동안 국정은 다수당의 횡포로 사사건건 파행을 면치 못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탄핵소추를 자행한 수구 부패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폭발적인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그들이 상식을 무시한 폭거를 자행하게 된 것은 새로운 정치 환경에서는 살아 남을 수 없는 수구세력의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미 ‘차떼기’ 부패와 방탄국회로 인해 정상적인 선거과정에서는 생환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사정을 일거에 뒤집어 과거와 같은 지역분할구도를 되살리고 안보를 빙자한 색깔공세로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을 혼돈 시켜 기득권을 수호해 가려는 방책이었다. 이런 정쟁과정에서 민주적인 질서가 파괴되던, 나라가 결단나던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탄핵을 규탄하는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분노한 수십만명의 시민들은 거리에 운집하여 예의 촛불을 켜들고 항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들은 이미 사이버 공간의 인터넷과 붉은 악마의 열기 그리고 반미 촛불시위를 통해 다져진 확고한 참여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선거는 전혀 뜻밖의 구도로 전개되어 수구세력에 대한 국민의 심판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17대 총선의 성격이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유지해 왔던 지역분할 구도, 보수일변도의 이념 지형, 보스 중심의 과두체제, 금권을 통한 표 매수 등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대신 선거의 지형이 보수와 개혁, 보수와 진보, 개혁과 진보라는 대립축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지난 반세기 냉전구도 아래 기형적으로 조성된 정치풍토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2년전 대선에서 표출되었던 변화와 개혁의 바람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수구집단은 시민들의 높은 역사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변화의 역동성을 간과했다. 뒤늦게 총선의 탄핵찬반 구도를 친노(무현)대 반노(무현)의 구도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겨우 영남을 근거로 개발독재정권의 민중수탈에 편승한 특권층과 지역차별주의 수혜층을 결집시키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보수적인 헌법재판소라 하더라도 수구정객들의 편에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러기에는 역사의 흐름이 너무나 거대하고 도도했다.

원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반군사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통해 형성된 자유주의적 정치세력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과거에도 같은 성향의 인사들이 의회에 진출했지만 그때는 개별 분산적이어서 대부분 독재권력이나 정당내 보스의 들러리로 전락했으며 민주화운동의 정당성마저 훼손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거나 시민운동 민중운동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상당수 집단적으로 원내에 진출했으며 소속 정당이 원내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했다는 점이 지난날과는 크게 차이나는 점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1987년 이래의 절차적 민주화를 완성해야 하는 사회개혁 과제이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냉전과 민족 대결의 잔재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개헌 저지선인 3분의 1을 목표로 했던 열린우리당이 제1당의 위상에 오른 것은 정체성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그 같은 목표였다면 선거에 임하는 전략이나 내거는 공약이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또 당선을 목표로 했던 후보들의 선정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소수당의 전략과 수준을 가지고 다수당을 감당해야 하는 부조화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그런 사정에서 ‘실용주의’나 ‘상생’과 같은 어설픈 언술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기존의 보수정당들과는 달리 진성 당원을 중심으로 당내 상향식 논의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대표성은 엘리트지배의 정치구조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민노당은 민중운동의 원내 접목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동안 민중의 요구는 의회에서 기득권층에 의해 걸러지고 왜곡되면서 사회개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하기 어려웠다. 민노당의 의회진출로 민중적 이해관계가 제도로 투영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의회에 기층 민중의 정치적 대표성이 부가됨으로써 그 동안 왜곡되고 파행으로 치달았던 의회기능이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 것이다. 보수 정치판에서 민노당은 균형추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선거법위반으로 열린우리당이 의석을 잃게 될 경우 민노당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로 국민들의 정치의식은 크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정치권력은 군림과 압제를 행하는 것으로 투쟁 대상이었다. 민중의 권리를 탄압하는 세력이었다. 이제 거리에 조성되었던 투쟁의 무대가 일부 원내로 이동함으로써 민중의 요구는 부분적으로 투쟁의 구호에서 정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민주개혁

여느 선거판이었으면 표로 연결되는 의제들만이 제기되고 그 이면에 깃들어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표면으로 부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탄핵이 선거의 중심 의제로 떠오르면서 이와 관련된 한국사회의 핵심 과제들이 사회개혁과 관련해 전면적으로 부상하였고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

시민사회는 2004년 탄핵의 소용돌이와 총선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 민주개혁의 과제들을 집약해 17대 국회에서 해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 과제들을 크게 네가지로 체계화하고 있는데 첫째, 구시대의 낡은 정치를 마감하는 정치 개혁과 민주주의 완성을 이룩하는 일이다. 반부패 제도를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보장과 참여민주주의 확립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 개혁, 사법 개혁, 언론 개혁 등도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런 과제들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완수함으로써 1987년이래 지속되어 온 불안정한 민주화를 17대 국회에서 완성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기약하기 위한 냉전잔재의 청산이다.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냉전체제하의 대립과 갈등의 구도를 종식시켜야 한다. 우선적으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의 철회와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포함한 국방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한 국방비의 감축과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해야 한다. 아울러 전쟁기 민간인학살, 친일문제, 정부폭력의 진상규명 등 과거청산 문제에 대한 매듭을 요구했다.

셋째,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철폐를 위한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재벌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하고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보장제도의 강화와 신용불량자 문제, 주거안정 등의 민생 현안을 조속하게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서 대안적 세계화의 길을 만드는 일은 시민사회의 몫으로 남아 있다.

넷째, 지속 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성장담론에 맞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이 필요하다. 새만금문제 등 환경정책과 핵정책 핵폐기장문제 에너지정책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호주제 폐지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사회적 지원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의 과제들을 완성할 때 우리 역사는 참으로 2004년의 투쟁을 통해 값진 승리를 이룩하게 된다. 과거에는 민중이 역사적 격변기에 개혁 추진의 담당 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치권에 위임함으로써 승리의 문턱에서 좌절하곤 했다. 승리는 물거품이 되고 역사는 다시 옛날로 환원되고 말았다. 1960년이 그랬고, 1980년이 그랬다. 1987년에는 비록 재야 명망가와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지도부가 형성되었지만 그들은 항쟁을 조직해내는 것으로 임무를 끝냈다. 민주화를 완성할 동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투쟁의 열기가 식은 후 항쟁의 성과는 다시 정치인들의 수중에 맡겨지고 말았다.

현재는 지난날과 사뭇 다르다. 2004년의 투쟁은 처음부터 시민사회와 민중운동 진영이 주도하고 조직한 운동이다. 시민·민중 단체는 촛불집회를 기획하고 지도해 냈다. 촛불집회를 참여민주주의적인 정치집회로 조직하고 대중토론의 공론장으로 만들어 냈다. 그들은 이번 탄핵정국을 돌파하면서 체제 유지의 방편에 불과했던 선거를 사회발전과 역사진보를 위한 의미 있는 제도로 만들었다. 이는 1987년이래 시민사회와 민중진영이 축적해온 역량으로 가능한 일이다. 이제 그 역량이 민주 개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탄핵정국을 통해 시민사회와 민중운동은 한국정치의 중심에 깊숙이 관여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