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진실] 조선후기 과거제 문란에서 밝혀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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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과거제 문란에서 밝혀야 할 것

오수창(중세사 2분과)

일반적으로 19세기를 설명하는 데에 빠지지 않는 것이 ‘그 시기의 정치와 사회가 문란해졌다’는 지적이며, 그것은 곧바로 조선왕조 붕괴의 원인으로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문란’의 시대적 의미이지, 그 상황 자체를 탓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제의 문란이 지니는 성격을 살펴보자.

거의 모든 개설서에서 이 시기의 정치가 초래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사람을 뽑은 과거제가 더욱 문란해졌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한 설명은 “과거제는 마땅히 조선왕조 체제의 관념과 규정에 맞추어 실시되어야 했다”는 식의 논리를 전제로, 문란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뿐 그 문란의 기반이 되는 상황이 무엇인가를 도외시하고 있다.


(그림 1) 서울 문묘, 비천당 전경(출처 : 문화재청 http// www.cha.go.kr)

사실 이 시기 과거제의 혼란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돈을 주고 답안을 사거나 이름을 바꾸어 대리로 제출하게 하는 부정을 비롯하여, 과거시험장에서 선비들이 돌을 던지며 소동을 부리고 경비군이 답안을 훔쳐가는 등의 사태가 흔히 일어났다. 심지어는 글을 모르는 자가 과거에 응시하는 데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거를 한 번 실시할 때마다 온 나라 선비들의 인심을 잃고 있으며 과거가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지적이 일상적으로 되풀이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집권세력은 과거제의 문란이 과거시험장의 질서를 잡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며,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정을 좀더 명확히 하고 처벌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지켰다. 그리하여 1818년 과거 시험장을 정비할 규정을 마련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대책이었다. 지배계층의 태도를 비난하는 기존의 인식이 당연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 2)  과거시험 재현 (출처 : 수원화성문화재 http//shfes.suwon.ne.kr)

그러나 좀더 적극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치열하게 정치권력과 그 이권에 접근하려고 노력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전제로 해야만, 당시 과거제의 운영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09년(순조 9)에 증광문과의 일차 시험의 경우를 보자. 이 때 두 시험장 중 한 곳에만 2만 6천여 명의 응시자가 입장하였다. 그리하여 큰 혼란이 일어난 와중에서도 7천 명이 답안을 제출하였다. 그토록 많은 응시자가 몰리는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과거제를 정상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였으며, 집권자들이 설령 열성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우선 따져야 할 일은 관료선발시험에 그토록 많은 인원이 몰리게 된 당시의 사회변화와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이지, 과거제 문란이라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문란했다고 비판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 과거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낡은 유교적 이념과 전통적인 지주로서의 부를 갖춘 극소수 지배계층의 유생들이 질서정연하게 과거에 응시하고 낡은 기준에 따라 선발되어 국가의 관료로 활동하게 될 때, 기존 지배체제의 유지와 강화 외에 어떠한 결과를 빚어낼 수 있었을 것인가?

사회변화에 입각한 관료선발제도의 개혁을 이루지 못한 당시 지배층의 자세를 문제로 삼을 수 있겠지만, 철저히 기존체제 속에서 배태되고 성장한 당시의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것이 결론이 될 수는 없다. 해명해야 할 문제는, 왜 그리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당시 사회는 과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