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진실] 이상주의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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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의 빛과 그림자
 – 봉수제의 허실 –

오수창(중세사 2분과)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을 전달하여 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烽燧)는 이미 가락국 시조 수로왕 시기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을 만큼 그 유래가 오래된 제도이다. 고려시대의 정비를 거쳐 조선초기에는 그 제도를 더욱 치밀하게 발전시켜, 웬만한 한국사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 대강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형편이다.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등 모두 5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어있는 봉수로는 서울 남산에 모이게 되어 있었다.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불빛과 연기를 한번 올리고, 적이 국경 가까이 접근하면 2번, 변경에 가까이 오면 3번, 국경을 침범하면 4번, 우리 군사가 전투가 벌어지면 5번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화성봉돈 ⓒ하일식>

 하지만 이러한 내용이 봉수제를 통해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일 수 있을까? 제도, 특히 봉수제와 같은 실용적 제도는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었는가에 중요성이 있다.

 국가에서 수많은 인력과 물자를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봉수제가 실효를 발휘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바다로 침입해온 1510년의 삼포왜란 때도, 1544년의 사량진왜변과 을묘왜변 때도, 여진족이 내륙으로 침입해온 1583년 니탕개의 난에도 봉수제는 작동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도 정묘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병자호란 때는 사정이 조금 달랐지만 봉수제가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즉, 당시 도원수 김자점은 의주로부터 오는 봉화가 자신이 있는 황주 정방성에만 도달하게 하였다고 한다. 만일 위급한 봉화가 도성에 이르면 소동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2월 6일 이후에 청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연이어 두 번이나 들어왔는데 김자점은 그것을 무시하였다. 그는 봉화를 해석하기를 “조선의 사신 박로가 들어갔으니 오랑캐가 나와 환영하는 것이다. 어찌 적이 올 이치가 있겠는가” 하고는 국왕과 조정에 급히 아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출처 : 서울신문사>

 봉수의 일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구름이나 안개가 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리기도 하고 나무가 자라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부담이 과중한 봉수군은 도망가기 일쑤였으며, 자리를 지킨다 하더라도 잠깐의 게으름만으로도 봉수는 끊어지게 마련이었다.

 짧은 거리라면 모를까, 함경도 변경인 경흥에서 출발한 봉수가 서울에 도달하려면 직접 거쳐야 하는 봉화대가 120개였고, 가장 짧은 동래에서 오는 것도 44번의 봉수대가 정확하게 작동해야만 서울 궁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봉수가 정확히 도달했다고 해서 바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정을 자세히 전할 수 없으니, 위에서 본 병자호란 때와 같이 군사 지휘관이 그것을 해석하기에 따라 간단히 무시될 수도 있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새로 시작된다. 조선 정부는 이 봉수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던가? 임진왜란 이후 직접 문서를 전달하는 파발제를 운영하기 시작하였지만, 봉수제의 정비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양란 후에 봉수제의 재건을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서, 봉수의 설치 또는 혁파에 대한 논의는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봉수제가 정식으로 혁파된 것은 19세기 말 1894년의 일이었다.


<출처 : 한겨례 신문사>

 현실적으로 보아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없었던 봉수제에 그토록 집착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시대 집권층의 이상주의였다고 판단된다. 제도가 완벽히 정비되고 봉수군들이 성실히 근무할 때 봉수제는 변경의 위급을 알릴 수 있는 이상적인 제도였다. 불빛과 연기를 보아 연락하는 속도는 어떤 수단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인들은 현실의 실패에 굴복하여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이상에 사로잡혀 너무나 뻔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이 이상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해석해내는 것이 우리의 또 하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