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진실] 몽골을 치료한 의사, 이태준(1883-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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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을 치료한 의사, 이태준(1883-1921)

박윤재(근대사분과)

지난 5월 몽골이 언론의 갑작스런 조명을 받았다. 소설가 황석영 덕분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방문에 동행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동행 이유로 이대통령의 ‘신아시아 외교 구상’과 자신의 ‘알타이 연합론’이 유사하다는 점을 거론하였다.

  몽골은 그의 구상인 정치적 컨소시엄 ‘알타이 연합’의 중심에 있었다. 황석영이 몽골에 주목한 이유는 몽골이 언어적, 문화적으로 한국과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외모로 볼 때 몽골인은 한국인과 구별하기 힘들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인, 일본인보다 더 흡사하다. 황석영 주장이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전제가 되어야 될 것은 몽골과 친선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이태준은 그 친선을 이미 1세기 전에 실천한 바 있다. 이태준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가 여러 차례에 걸쳐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 논문들을 통해 이태준의 생애와 활동은 거의 밝혀졌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필자가 금년 5월 14일 경상남도 함안문화원에서 개최한 ‘대암 이태준 기념 국제학술회의’(이하 ‘학술회의’)에 참석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들을 첨가하면서 이태준의 생애와 활동을 복기하고자 한다.

  이태준은 1883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4번지)는 지금 수몰되어 있다.


(사진 1) 현재 수몰되어 있는 이태준의 출생지 

그는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한학을 배웠다. 그곳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도천재(道川齋)이다. 도천재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봉해진 이휴복(李休復)의 공신교서(功臣敎書)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 문서를 통해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신, 그들이 받은 품계, 상급 등을 알 수 있어 당시 사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진 2) 도천재(道川齋)

이태준은 고향을 떠나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하였고, 1911년 제2회로 졸업한다. 이 학술회의가 개최되는데 역할을 하신 분은 함안이 고향인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선생이다. 그의 긴 저서 목록에는 `한국기독교의료사`도 있는데, 그런 관심이 자신의 고향 선배이자 기독교 의사인 이태준에게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태준의 상경 배경에 대해 궁금해 하였다. 지금도 고속도로로 가면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서울과 함안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어떤 강력한 배경이 없이 상경은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정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가 의료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라는 점, 함안에 설립된 지 백년이 넘는 교회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태준이 다니던 교회의 추천으로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추정일 뿐이다.

  현재 이태준의 독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몇 년 전에 주요 언론사 중 한 곳에서 이태준의 얼굴을 찾았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지만, 실제 나이에 비해 너무 어려 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다만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사진이 남아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사진 3)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사진

학술회의에 참석한 연세의대 박형우 교수는 자신의 발표 마무리에서 6명 졸업생의 얼굴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이태준을 추정하였다. 아직까지는 결정적인 단서가 없어 힘들지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직계 가족의 사진을 구해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의학교에 재학하던 중 이태준은 한국근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별 중 한 큰 별을 만난다. 안창호이다. 안창호는 1909년 안중근의 거사로 통감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건강 회복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이태준에 따르면, 그때 안창호는 이태준을 “착한 말씀으로 인도”해주었고, “청년학우에 입회하라고 열심으로 권면”하였다. 이 만남을 통해 이태준은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였고,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1회 졸업생 김필순이 105인 사건으로 망명하자 곧 그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중국 난징(南京)을 거쳐 1914년 몽골로 떠난 이태준은 그곳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설립하고 진료에 나선다. 이태준이 세브란스의학교에서 학습한 서양의학은 그가 몽골에서 활동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태준이 서양의학을 학습하고 시술한 20세기 초는 의학사에서 볼 때 도약의 시기였다.

  1880년대 이후 파스퇴르, 코흐 등이 주도한 세균학 성과에 힘입어 서양의학은 새로운 단계로 성장하고 있었다. 세균학의 성장 자체가 치료술의 발전으로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세균학은 질병의 원인, 경과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나아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특히 매독의 경우 1910년 에를리히(Paul Erlich)에 의해 발명된 화학제인 살바르산(salvarsan)이 치료제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살바르산의 효과는 분명하여, 성대에 침범한 매독균 때문에 거의 목소리를 잃었던 환자들이 명료하게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태준이 몽골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바로 이 살바르산이 상용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태준은 새롭게 성장하던 서양의학의 힘에 기대어 당시 몽골인들의 70-80%를 괴롭히던 성병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태준의 치료로 완쾌된 몽골인들은 이태준을 ‘신인(神人)’이요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이라 불렀다. 그의 치료 공적을 인정한 몽골 국왕은 1919년 이태준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지닌 국가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태준이 몽골의 근대사뿐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점에 있다. 중국 망명 후 중국 난징의 기독교의원(基督敎醫院)에서 근무하던 이태준은 당시 중국의 혁명정당 인물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고, 혁명군에 가담한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몽골에 있던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숙박지요, 연락거점이었다. 특히 그는 1920년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받은 소위 코민테른 자금의 운송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몽골의 고륜(현재 울란바타르)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험난한 길이었다.

  자금의 운송뿐 아니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이태준은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을 만난다. 당시 의열단은 테러활동에 사용하던 폭탄이 불발하는 경우가 많아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태준은 자신이 알고 있던 헝가리인 마쟈르를 소개해주었다. “폭탄제조에는 실로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그는 또한 젊은 애국자이기도 하였다.” 이태준은 마쟈르가 “저의 기술이 같은 약소국인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유용한 것이라 안다면” 기꺼이 도와줄 것이라 장담하였다. 그는 먀자르를 데려오겠다며 다시 몽골로 돌아갔다. 그의 마지막 길이었다.

  몽골로 돌아온 이태준은 1921년 러시아 백위파인 운게른 남작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살해된다. ‘미친 남작’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운게른은 부대를 이끌고 중국 군벌이 지배하던 고륜을 공격하였다. 고륜을 점령한 운게른부대는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고, 그 대상 중 하나가 한국인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이었다.

  이태준의 살해 배경에 대해 반병률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운게른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요시다(吉田)라는 일본인 장교를 지목하였다. 이태준이 ‘불령선인(不逞鮮人)’인 점을 알고 있던 요시다가 이태준의 처형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현재로서는 추정에 불과하다.

  함안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국제성을 가지게 한 학자는 몽골 과학아카데미의 키시그트(Khishigt) 선생이었다.


(사진 4) 왼쪽이 키시그트 선생

그녀는 ‘운게른 남작 지배하의 몽골’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이태준의 살해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이태준의 살해 배경에는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그가 사회주의자와 교류한 점이 백위파에게 간취되었다는 것이다. 한인사회당 당수였던 이동휘가 코민테른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이태준은 고륜에 상주하는 한인사회당의 연락원이었다.

  둘째는 백위파 군인들이 정규군이기보다는 규율이 없는 용병의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부유한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일상화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사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고, 당연히 자산가에 속할 이태준이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더구나 당시 이태준은 코민테른 자금으로 베이징에 운송할 4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중국 의사들의 모함이었다. 운게른부대 점령 이전 고륜을 지배하고 있던 중국 군벌들도 서양의사인 이태준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전통의학을 고수하던 중국 의사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마침 운게른부대가 고륜을 점령하자 그 의사들이 운게른에게 이태준을 친중파라고 모함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몽골 울란바타르시에는 이태준을 기념하는 공원이 세워져 있다.


(사진 5) 이태준 선생 기념 공원

몽골정부가 ‘신인(神人)’이자 ‘여래불’로 몽골인을 치료해준 이태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부지를 제공하였고, 이태준의 모교인 연세의대 동창회가 조성비용을 제공하여 세워진 공원이다. 지금은 사라진 이태준의 무덤은 몽골인들이 성산(聖山)으로 부르는 남산(南山) 건너편 구릉 한복판에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하는 이는 여운형이다. 그는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원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련으로 가다가 고륜에 들렀다. 한국인의 무덤이 있다는 말에 이태준의 무덤을 찾은 여운형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기특한 헌신과 희생”을 되짚어 보았다.

  몽골과 한국의 관계가 연합으로 발전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연합이란 상호간의 이익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그 절충이 힘든데다가 그 이익조차 자칫 일부의 것에 머무를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몽골은 아직은 먼 나라이다.

하지만 이미 백 년 전 자신의 젊은 생애를 바쳐 몽골인들을 치료한 한국인 청년을 되새겨 보는 일은 그 연합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