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과 진실] 고려 후기의 한어 교육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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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한어 교육열

이종서(중세1분과)

지금 외국어 교육열이 매우 높다. 조기 유학이 성행하고 학원마다 외국인 강사를 구하느라 야단이다. 영어는 기본이고 제2외국어까지 익혀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렇듯 외국어 열기가 높은 것은 외국어 구사력이 미래의 성취와 긴밀히 관계되기 때문이다. 개방된 국제 환경 속에서 유창한 외국어 실력은 좋은 직장과 높은 보수, 상류층 진입이나 유지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현재의 개방된 국제질서와 높은 외국어 열기는 한국의 역사과정에서 처음 겪어 보는 경험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전의 지배층은 비록 한문을 능숙하게 썼지만 할 줄 아는 말은 오직 한국어였고, 외국어는 중인 신분의 역관이 담당했다고 여기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개방된 국제질서를 경험한 시기가 있었다. 외국어 교육열도 그만큼 뜨거웠다. 몽고족의 원제국이 강성했던 14세기가 그 때이다. 고려후기에 해당한다.

14세기에 고려는 좋든 싫든 원제국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원제국은 너무도 강성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원제국에 밀착함으로써 왕실과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원제국 황제의 딸이 으레 고려 국왕과 결혼하게 된 것도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려와 원을 오갔다. 왕족, 대신, 상인, 지식인들이 원에 가서 장기간 체류하였다. 몽고족이나 회족, 한족 인사들도 다수 고려에 들어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원제국의 공통어인 북방 한어(漢語)가 지배층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한어를 잘 말하는 것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만큼 한어 교육열이 높아졌고 조기 외국어 교육과 외국 유학 등 지금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쳤고 그렇게 해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연 이색을 꼽을 수 있다.


△ 목은 이색 선생 영정 – 시도유형문화재 232호(출처 : 문화재청)

이색은 원제국 전체의 과거시험인 제과에서 사실상 수석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이 이색은 어려서 한인(중국인)에게 한어를 배웠고 청년기에 원제국의 도읍인 대도에 유학했다. 그는 최고의 교육과정을 거쳐 최상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색(1328~1396)의 성공 이력은 역시 제과 합격자인 아버지 이곡(1298~1351)부터 시작한다. 이곡은 20대 초반에 고려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고 30세인 1327년 제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곡은 포기하지 않고 36세인 1333년 드디어 합격하였다. 그는 제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순탄한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40세인 1337년 정동행성의 관리로 임명되어 귀국하였다. 정동행성은 원이 고려에 설치한 관청이다. 1341년 돌아가 이후 6년간 대도에서 활동하였다. 54세로 고려에서 사망할 때 그의 관직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이었다.

이곡은 제과에 합격하고 장기간 원나라 관리로 활동했으므로 한어에 매우 능통했을 텐데 한어를 언제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제과에 응시하기 전에 국내에서 기본적인 구사력을 갖추었고, 이후 관직생활을 하면서 더욱 유창해 졌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아들 이색에게서는 한어를 배운 경위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색은 아버지 이곡이 정동행성 관리로 귀국한 10세 무렵부터 한인에게 한어를 배웠다. 당시 정동행성 관리 중에는 홍빈이라는 한인이 있었다. 홍빈은 중국 강남 출신 호중연을 고용하여 자식들을 가르쳤다. 이곡이 홍빈과 절친했기 때문에 이색도 수년간 홍빈의 집에서 호중연에게 한어와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이색은 14세 때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성균시는 낮은 수준의 시험이기는 하나 역사와 경전을 읽고 시와 부를 지을 줄 알아야 답을 쓸 수 있었다. 나중에 이색은 성균시에 응시하려하자 어머니가 ‘네가 미쳤구나’라고 했다고 회고하였다. 그만큼 성균시는 14세의 어린 소년이 응시하기에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성균시 합격은 호중연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이색영정 – 보물 제1215호(출처: 문화재청)

성균시에 합격한 뒤 이색은 여러 절로 옮겨 다니며 학문을 심화하였다. 이 때 대도에 있던 이곡은 ‘사나이는 모름지가 황제의 도읍에서 벼슬해야 한다’는 내용의 시를 보내 아들을 격려하였다.

결국 20세 되던 1327년 대도에 유학하여 국자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곡이 5품관이 됨으로써 얻은 특혜였다. 이색은 아버지와 친한 학관에게 특별히 《주역》을 배우기도 하였다. 훗날 늙은 이색은 천하의 인재들과 밤늦도록 학문을 토론하고 교수들에게 칭찬받은 이 시기의 경험을 그립게 회상하였다. 이색이 대도에 있을 때 이색 말고도 적지 않은 고려인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색은 결국 벼슬을 얻은 박씨와 공명에 뜻을 두었으나 대도에서 헛되이 죽은 백씨의 전기를 남겼다.

마침내 27세인 1354년 제과에 합격하였다.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그의 성적은 2등이었다. 규정상 1등은 몽고인 차지였으므로 사실상 장원을 한 것이다. 그는 한림원의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원이 급속히 쇠퇴하자 모친 봉양을 이유로 귀국하여 고려 관인으로 활동하였다. 원이 계속 강성했다면 그는 아버지 이곡보다도 높은 원제국 관리가 되어 황제에게 봉사했을 것이다.

제과 합격자를 아버지로 둔 이색의 교육과정과 제과 수석 합격은 원제국 질서 속 고려 지배층의 지향과 성취를 대변한다. 많은 고려인들이 이색과 유사한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이색이 성취한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닮은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