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천지신명이시여 흠향하시고 굽어 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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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이시여 흠향하시고 굽어 살피소서

한정수(중세사 1분과)

983년 정월 하늘과 땅, 농사의 신에게 빌다



조선시대 제향 때 쓰인 원구축판과 제기의 하나. 그 생김새에 엄숙함이 묻어난다.

『고려사』의 성종 세가 2년 정월에는 짧막한 기록이 전한다. 내용은 짧으나 그 의미는 매우 남다른 것이었다. 정월 신미일과 을해일, 정축일에 거쳐 행해진 원구에서의 기곡과 적전에서의 친경과 신농제사, 그리고 천덕전에서의 잔치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원구 의례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전에서의 친경 의례는 왕실에서 동교에 적전을 설치한 뒤 여기서 임금이 친히 밭을 갈아 왕이 농업을 권장하는 의례였고 이때 토지와 농사의 신이라 할 신농과 후직을 제사하는 것이었다. 천덕전에서의 잔치는 신미일과 을해일에 있은 의례가 성대히 끝난 후 군신이 그 노고를 서로 위로하는 자리로서 의례 과정에서는 노주(勞酒)라 불렀다. 이 의례는 고려 역사에서 최초의 일이었고, 또 한국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명칭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 기록은 이렇게 짧기만 하였다. 여기에는 태조 이후 목종대에 이르는 7대의 역사 기록이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고 현종 초에 이르러 황주량 등에 의해 이른바 7대 실록으로 재정리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 혜종 즉위 이후 목종대까지의 세가 기록 분량이 8대 군주인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의 기록 정도에 불과한 점이다. 그렇더라도 짧게 재정리된 기록 속에서도 이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었기에 7대 실록 속에 남아 있게 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편찬되는 『고려사』 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 의례는 고려시대에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 군주와 신하들, 농부들이 의례의 격식에 맞게 예복을 차려 입고 각기의 역할에 맞추어 일정한 행위를 하여야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군주는 엄숙하게 하늘에, 땅에, 농사의 신에게 풍년과 안정을 기원하였다. 이들 의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나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혹은 거리에서 그 성대한 행렬을 보았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고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또 왜 성종은 굳이 어찌보면 번거롭다고까지 할 수 있는 이러한 의례를 도입하고 실행하였을까? 이러한 의문은 간단하지만 고려왕조가 이 의례가 갖는 본질과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풀고자 한 나름의 방안이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무엇일까?
 성종(960~997, 재위 981~997), 그는 누구인가?

  경종의 유명에 따라 왕위에 오른 22세의 젊은 왕자, 그는 이미 그 부모를 모두 여의고 태조의 후비 중 한 분이었던 할머니 신정왕태후 황보씨의 품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태조와 신정왕태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종(戴宗)이었고, 어머니는 선의왕후 김씨였다. 말하자면 성종은 태조의 손자였다.

  나이로 본다면 그는 광종 11년(960)에 태어났고, 소년기를 거치면서 광종 및 경종의 정치를 모두 경험하였다. 이후 그는 16년간 재위하였으며 많은 업적을 남긴 채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후비는 광종의 딸로 문덕왕후 유씨가 있고 이외 문화왕후 김씨, 연창궁부인 최씨가 있다. 자녀로는 문화왕후 소생 정원왕후와 연창궁부인 소생 원화왕후를 남겼다. 이들 두 공주는 현종의 제1비와 제2비가 된다.

  이러한 핏줄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으로 이어지는 직계 핏줄에서는 한발자국 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성종은 일차적으로 왕위계승의 정통성 부분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쪽 세력이라 할 황주 황보씨의 배경과 경종의 후원 덕분이었다. 또한 신정왕태후의 두 손녀딸이자 성종의 누이 둘이 경종의 후비였다. 헌덕왕태후는 목종을 낳았으며, 헌정왕후는 현종을 낳았다. 어찌 보면 이 당시 고려 왕실은 황주 황보씨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경종의 죽음 무렵 그의 아들 목종이 매우 어렸기 때문에 경종으로서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고 후원할 수 있는 인물을 찾게 되었을지 모른다. 중계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대종의 아들이자 경종 자신의 처남이 되는 개령군은 이런 면에서 적합하였던 것이다. 후일 성종이 죽으면서 왕위를 조카인 목종에게 넘긴 것이 이를 보여준다. 물론 그가 가진 학덕과 치세능력도 당연히 그 요인이 되었다. 
 성종의 생각Ⅰ- 왕은 왕다워야 한다

성종은 즉위한 뒤 원년 6월 곧바로 경관 5품이상의 관원들에게 정치의 잘잘못과 좋은 정치를 펴기 위한 방책을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저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책 28조가 성종의 앞에 놓여지게 된다. 불교 및 음사의 행사를 줄이고 선정을 펴기 위한 군주의 수신과 수덕의 강조, 유교의 문물제도 정비를 위한 노력 등이 담겨져 있었다. 실제 성종이 이 때 구언교를 내린 데에는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임과 동시에 성종 자신의 존재를 신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 결과는 최승로의 시무책을 통해 보듯 매우 성공적이었다. 성종의 로드맵 대부분이 최승로를 통해 마련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최승로 등의 시무책에 힘입은 성종은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고 또 왕권을 유지하기 어떠한 생각을 가졌을까?

  먼저 성종은 자신의 혈통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위년 11월 선부인 아버지에게 시호를 올리고 그 능을 배알하였다. 11년 12월 태묘가 완성된 뒤에는 13년 4월에 아버지 대종의 신주를 태묘의 제5실에 모셨다. 불교의 신전(神殿)이 아닌 유교식 신전이라 할 태묘 즉 종묘를 세우고 선왕과 배향공신들을 모심으로써 왕실의 계보를 정리하였고, 성종 자신 역시 그 안에 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음으로는 성종 자신의 신성함을 보여야 했다. 그 일환이 자신의 생일을 절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원년 6월 성종은 생일을 천춘절(千春節)이라 정하게 된다. 2년 12월에 천춘절을 천추절로 고쳤다. 왕의 생일을 절일로 정하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절일로 정하면서 관리들에게 휴가가 주어지고 축하의례가 행해진다면 왕실에 대한 생각은 달라질 수 있었다. 성종의 천춘절을 시작으로 목종(長寧節), 덕종(仁壽, 應天節), 靖宗(長齡節), 문종(成平節), 선종(天元節), 인종(永貞節), 의종(河淸節), 명종(乾興節), 신종(咸成節), 희종(壽祺節, 壽成節), 강종(光天節), 고종(慶雲節), 충렬왕(壽元節) 등 역시 절일을 가졌다. 특히 문종의 경우 이때 재추와 급사중 이상의 축하를 받고 향연을 베풀었으며 외제석원에 기상영복도량을 7일간 설치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는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혈통 및 신성성의 확인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알리려는 의례가 시도되었다. 성종은 즉위년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팔관회를 떳떳하지 못하고 번거로우며 요란스럽다 하여 폐지하였다. 팔관회의 의례는 그 전통이 오래된 것이었다. 대개 중동 즉 11월 동지를 전후하여 열렸으며 이때 많은 잔치와 행사가 베풀어져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 화합을 다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러한 자리임을 잘 알고 있는 성종이 팔관회를 폐지한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6년 10월에도 역시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를 정지시켰던 것이다. 그가 팔관회를 폐지한 것은 왜였을까? 말 그대로 떳떳하지 못하고 번요한 것이어서였을까? 하지만 팔관회는 성종대에 잠시 폐지된 바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열렸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성종은 재래적이자 불교적 성격을 갖는 축제 의식은 합리적이고 위엄있는 왕실의 존재를 더 이상 수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팔관회의 경우 그 전통이 오래된 것으로 본다면 이는 고려 왕실보다는 토착세력 즉 호족 및 귀족층 주도의 행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제로서 행사만 많고 시끄럽다고 여긴 팔관회를 지속하기보다는 왕실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즉 최고 상층에 자리잡은 약탈자,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태조가 고려의 건국을 천하에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통해 과시했듯이 천명을 받은 주체이자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을 하는 존재로 탈바꿈해야 했다.
 성종의 생각Ⅱ- 제왕의 권위를 세우자

제왕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종교적 권능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카리스마이다. 이미 제정분리가 된 왕조사회에서 이미 제왕에게는 종교적 권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보면 종교의 경우 제사장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성령(聖靈)’ 곧 성스러운 힘이 자리하는 장소인 성소(聖所)와 여기서 올려지는 기도의 과정이라 할 세레머니가 그것이다.

  성종이 생각하는 제왕의 권위의 바탕 역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대상을 바꾸어 생각하면 성령은 천명으로 바뀌게 된다. 종교적 색채를 탈피하여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것이 된다. 그리고 천명을 받고 천명을 확인하기 위해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성소에 제단을 쌓았다. 바로 제장(祭場)이 된다. 그리고 기도의 의례 절차를 예복과 의례절차, 희생, 행사 후 연회로 이어지도록 엄숙하게 짜여졌다.

  다음은 기도와 제사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다. 왜 희생을 마련하고 의례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는 것인가? 국가적 제사의 가장 큰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천명이 왕실 즉 군주에게 내려져 있음을 확인하면서 왕조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의식주가 넉넉하여 평화롭게 사는 것을 비는 것이다. 천명의 소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제사용으로 쓰여져 읽히고 태워지는 축문을 통해서인데, 제주는 곧 군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의 대문장가였던 이규보가 남긴 글을 보자.

하늘의 일은 소리가 없어도 만물이 힘입어 자라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식(食)에 있어 바야흐로 상춘(上春)이 되매 풍년이 되기를 기도하니, 상제가 내리는 바가 아니라면 이 백성들이 어찌 힘입을 수 있겠습니까.(『東國李相國集』前集 卷40, 釋道疏祭祝 上辛祈穀圜丘祭祝 上帝祝)

  풍년을 기원하는 축문을 올림으로써 군주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국가제사의 가장 큰 목적은 풍년의 기원 즉 ‘기곡(祈穀)’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국가에 재난이 생기면 이를 구원하기 위해 재난을 물리치고자 ‘기양(祈禳)’의 성격을 갖는 제사도 올려졌다.

  성종 2년 정월에 올려진 원구와 적전의 의례가 연이어 치러지면서 지켜졌던 의례의 엄숙함과 엄격함, 그러면서도 왕실과 천하 만민을 위한다는 커다란 천명(闡明)은 천명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의 권위를 장엄하게 비추었던 것이다. 성종은 여기에 더하여 성종 8년2월 태묘를 세우기 시작하여 1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왕실의 조상신과 국가의 주춧돌이 된 배향공신을 모시고 제향을 올릴 수 있게 됨으로써 왕실의 신성한 사당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 10년 윤2월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 성종의 교서에 나타나듯 그것은 춘기추보(春祈秋報)를 위한 것이었다. 풍년을 기도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의례와 제장의 마련이었다.

  이처럼 성종 2년 정월에 올려진 원구에서의 기곡과 이어진 적전에서의 친경, 그리고 신료들과의 절도있는 연회를 마련한 것은 새로운 왕조운영의 틀 제시였다. 성종 자신이 갖고 있는 혈통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민본에 기초한 위민의 정치, 천명에 바탕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수식하는 의례의 마련과 행사를 통해 지금까지의 군사력에 기반한 왕권이 아닌 의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 왕실과 군주의 권위를 세운 것이다.


종묘 제향 때 종친 백관 및 문무를 추는 자들의 위치. 지위와 역할에 따라 복식을 달리하여 의례속 질서와 차별을 통한 엄숙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