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정치적 희생양이 된 외척의 노래, 정과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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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희생양이 된 외척의 노래, 정과정곡
채웅석 (중세사 1분과)
내 님믈 그리사(ㅿㆍ)와 우니다니
山 졉동새 난 이슷하(ㅎㆍ)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달(ㄷㆍㄹ)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ㅎㆍㄴ)(ㄷㆎ)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이다
말(ㅁㆍㄹ)힛마리신뎌
살읏븐뎌 아으
니미 나랄(ㄹㆍㄹ) 하(ㅎㆍ)마 니자(ㅈㆍ)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악학궤범』 제5권)

이 작품은 고등학교 고전문학시간에 향가계 고려가요의 예로서 익혔던 정과정곡이다. 의종 때 정서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은 것으로서 자신의 결백과 억울한 심정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이른바 후대에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면서 짓는 노래의 원류가 된다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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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부산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유적지(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

『고려사』 악지의 기록에 따르면, 의종이 정서를 본관인 동래로 귀향형을 보내면서 “오늘 가게 된 것은 조정의 의론에 몰렸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오래되어도 소환하지 않자 거문고를 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정서의 집안은 본관인 동래에서 향리를 맡아오다가 조부 때부터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정서는 당시 최고 문벌가문의 하나이던 정안 임씨 임원후의 사위가 되었는데, 인종비 공예태후가 임원후의 딸이었다. 정서는  인종대에 내시에 속하여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의종대에 와서 왕의 이모부로서 외척이라 할 수 있는 그를 유배하게 만든 조정의 의론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의종은 마지못해 그를 처벌했던 것일까? 고려중기에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들이 득세했다고 하는데, 그의 경우는 왜 불우하게 지냈을까?

의종대에는 모후 공예태후의 친인척들을 외척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고려중기에 외척은 왕의 후사를 보위하면서 위상을 강화하였지만, 의종대에는 오히려 왕으로부터 의심과 견제를 받았다. 원래 인종과 공예태후는 의종이 왕이 되기 전에 그의 능력을 의심하여 차자인 대녕후를 태자로 삼으려 했었다. 그 과정에서 외척세력은 애매한 입장에 있었으며, 의종은 모후에 대하여 원망을 품었다.

왕위 계승이 순조롭지 못했던 의종은 즉위 후에 친위세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잠저시에 보좌했던 김존중과 유모의 남편인 환관 정함을 우대하면서 내시와 환관들을 육성하여 측근세력으로 키웠다. 그리고 금위군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격구 등의 무예를 즐기는 취향에 따라 하급무인들이 측근세력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왕의 측근세력이 구축되어가자, 인종대 후반 이후 김부식의 주도 아래 유교적 관료정치를 추구해던 관료들과의 사이에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의종은 측근세력을 키우려는 의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의종대 전반기에 대간의 간쟁이 매우 격렬하게 벌어졌다.

의종 5년 궁중에서 열린 연회에서 정함이 서대를 착용한 것을 본 어사대 관리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뺏으면서 왕의 측근세력과 대간이 충돌하였다. 정함이 왕의 하사품이라고 불복하고 의종에게 호소하자 왕이 노하여 내시를 보내 어사대 관리를 체포하고 처벌하려 하였다.

대간들이 관련 내시들을 탄핵하였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대간들이 업무거부를 하는 사태를 빚었다. 그리고 이어 정함을 환관에게는 금지된 고위관직에 임명하려 하다가 거센 비판에 봉착하여 정함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그렇게 되자 정함은 탈출구로 의종과 왕위계승 경쟁을 했던 대녕후를 역모로 고소하여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고 자신의 입지를 회복 강화하려고 하였다. 정함은 먼저 자신을 공격하는 대간들을 원망하여, 그들이 대녕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그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다시 공예태후의 오빠인 임극정과 정서 등의 외척이 대녕후와 사적으로 교제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이 고발에 왕이 몰래 돕고 대간들도 처벌에 동조하여 큰 옥사가 벌어졌다. 이 때 정서는 동래로 유배당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고발과 처리과정에서 김존중, 정함 등 왕 측근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다시 말하여 임극정ㆍ정서 등의 외척이 대녕후와 교제하였다는 빌미로의종 측근세력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6년 뒤에 비슷한 상황이 또 연출되었는데, 무고라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의종이 대녕후를 비롯한 아우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간관들을 부추켜 탄핵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녕후와 임극정ㆍ정서 등을 재차 처벌하여, 정서의 유배지를 고향 동래에서 거제도로 옮겼다.

대녕후와 연결되었다고 의심 받은 외척들은 의종대 내내 억압받았다. 의종 15년에는 정서의 부인이 왕과 대신들을 저주한다는 무고사건이 일어나고, 21년에는 호위군사의 화살이 실수로 어가 옆에 떨어진 것을 왕이 대녕후와 연관된 자들의 소행인 아닌가 의심하여 옥사가 크게 벌어졌다.

정서가 정과정곡을 창작한 것은 동래에 귀향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소쩍새에 비유하여 억울한 한을 호소하는 내용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의종에게 그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충신과 거리가 멀었다.

조정의 의론 때문에 부득이하게 귀향시키는 것이니 머지않아 소환하겠다는 의종의 말은 그의 속내와는 전혀 달랐다. 정서 등은 무신정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난 이후에야 사면 받아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의종대 중기이후 측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대간활동을 무력화시키는 등 정치운영이 경색되었다. 개혁정치가 필요한 시기였지만 측근세력은 종교적 관념적 차원의 대응에 머무르고 왕을 신성화하여 왕을 보좌하는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그런 가운데 측근세력 내부에서 내료ㆍ문신과 무신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서 급기야 정변으로 이어졌다.

의종은 정서가 유배가 있던 거제도로 쫓겨 갔다가,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측근으로 키웠던 이의민에 의해 경주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고, 그가 견제했던 또다른 아우 익양후가 추대받아 명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