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원이 고려를 항상 악의적으로 괴롭히기만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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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고려를 항상 악의적으로
괴롭히기만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 정동행성 성관 활리길사의 고려제도 개변 시도에 대한 검토

                                                                                                      이강한 (중세사 1분과) 

 ‘원간섭기’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13세기후반~14세기전반은 고려가 원제국으로부터 강한 간섭을 받았던 기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 있다.

실제로 원은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고려를 군사적으로 위협하였고, 고려를 부마국으로 만들어 그 국체의 위상을 조정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고려의 관제를 격하할 것을 지시하거나, 고려국왕들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형태로 내정을 간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 시기의 특성상,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의 평가에 ‘자주’와 ‘간섭’의 잣대를 들이밀었다. ‘원의 간섭’은 국가적 치욕이자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간주되었고, 당시인들이 언제쯤 ‘자주’와 ‘독립’을 쟁취했는지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런데 ‘원의 간섭’이라는 것을 군사, 외교, 정치적 강압 또는 통제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하면, 당시 양국 사이에 존재했던 수많은 긴장관계에 대한 적절한 검토가 이뤄지기 어렵다. 더 나아가 그러한 원 간섭에 대한 고려인들의 대응이 ‘독립 추구’나 ‘풍속 보전’ 외에도 다양하게 존재했던 것에 대한 검토 또한 어려워진다고 하겠다.

  연구가 거듭되면서, 원의 간섭이 의외로 복잡다단한 측면들을 내포하고 있었음이 드러나 흥미롭다. 즉 원 간섭에도 여러 형태가 있었고, 그러한 경우들 중 의도는 폭력적이지 않았으되 결과가 폭력적으로 나타난 간섭의 형태도 있었던 것이다. 원에서 고려의 ‘내정개혁’을 종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내정간섭을 한 경우 등이 바로 그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바로 1299년 정동행성의 평장정사로 부임해 온 활리길사(闊里吉思)라는 인물의 고려제도 개변시도이다.

  일반적으로 정동행성은, 일본정벌이 시작되던 1270년대 중반을 전후해 고려에 설치되었고, 나얀(乃顔)의 난(亂)이 발발한 1287년을 기점으로, 고려를 ‘정치적으로 감독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던 존재로 인식돼 왔다.

  그런데 정동행성이 공식적으로 ‘복립’되었다고 원측 사료에서 전하고 있는 시점인 1299년의 의미는 그간 제대로 해명되지 못해 왔다. 연구자들은 1299년을 행성관들이 단순히 ‘증치’된 시점으로 주목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1299년은 고려왕이 겸하던 승상 외에, 제2인자로서의 평장정사가 정동행성에 새로이 설치됨으로써 정동행성이 ‘실질기관화’한 시점이었다. 또 종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고려(對高麗) 시책이 정동행성에 의해 제기된 시점이었다. ‘활리길사의 고려제도 개변 시도’라는 형태로 말이다.

  활리길사의 개변 시도는 여러 분야에서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고려정부의 반발이 가장 심했던 사안이 바로 노비제 개변시도, 더 구체적으로는 양천(良賤) 판정(判定)의 문제였다.

  고려국왕 및 일부관료들은 활리길사가 양천교혼 부부 소생의 신분을 결정할 때, 고려의 전통적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 대신 ‘일량위량(一良爲良)’을 강제 적용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후대의 연구자들도 활리길사가 원(元)의 교혼소생 처리관련 방침들을 강제로 적용함으로써, 천인노동력을 근간으로 삼고 있던 고려의 권귀들을 무력화하려 한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당시 양천교혼 소생과 관련한 원제국내의 방침은 결코 ‘일량위량’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 정상적 양천교혼 사례 및 (나) 절혼 등의 강제적 교혼 사례에 각기 다른 기준을 적용해, 그 소생의 신분과 귀속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활리길사의 방침은, 고려내 양천교혼 소생의 신분 및 귀속을 결정함에 있어, 그 두 가지 기준을 모두 활용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보기에 정상혼으로 간주되면, 원(元)에서처럼 남자의 신분을 결정요소로 삼아, 천남양녀혼(賤男良女婚)[노취양녀혼(奴娶良女婚)]의 경우 소생을 천인화하고 천인 남성의 주인이 그를 소유케 했으며, 양남천녀혼(良男賤女婚)[비가양부혼(婢嫁良父婚)]의 경우 양인남성의 신분을 따라 그 소생을 양인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자신이 보기에 절혼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었으면, 원에서처럼 철저한 ‘수모(隨母)’ 원칙을 적용, 천남양녀혼(賤男良女婚)[노취양녀혼(奴娶良女婚)]의 경우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그 소생을 양인화하고, 양남천녀혼良男賤女婚[비가양부혼(婢嫁良父婚)]의 경우 그 소생을 천인화시켜 여측의 주인에게 귀속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런데 정작 고려의 위정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활리길사가 일량위량 방침을 고수하는’ 상황으로 인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실제로 일량위량의 결과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활리길사가 당시 변정작업 또는 송사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일을 어떻게 처결하였길래 일량위량의 결과가 발생한 것이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활리길사가 (1) 노취양녀혼(奴娶良女婚)의 경우, 고려에서 그것을 법적으로는 금지하고 있었던 점을 명분으로 하여 원(元)의 절혼(竊婚) 규정을 적용하고, (2) 비가양부혼(婢嫁良父婚)의 경우 당시 비첩을 범하는 권귀들의 행태가 적지 않았음을 고려해 준(準) 통상혼이라 인식, 원의 정상혼(正常婚) 규정을 적용하였다면, 그런 결과가 발생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취양녀혼의 경우 원(元)의 절혼규정을 적용해 그 소생을 위량(爲良)시키고, 비가양부혼의 경우 원(元) 정상혼 규정을 적용해 그 소생을 위량(爲良)시켰던 탓에, 고려로서는 결국 노취양녀혼이든 비가양부혼이든 양쪽 경우 모두 소생의 신분이 사실상 대부분 ‘위량(爲良)’으로 판정되곤 했던 결과에 직면하였던 것이고, 그래서 활리길사의 방침을 ‘일량위량’으로 인식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활리길사의 개변시도는 결과적으로는 양인의 증대를 야기하고, 천인인구의 증대 경향에 제동을 걸만한 것이었다. 넓은 관점에서 볼 때 고려에 결코 해(害)가 될 시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고려정부에서 시행해야 할 것을 대신 수행해 준 측면이 없지 않다.

  활리길사가 고려지역을 대상으로, 그 지역의 사회, 경제질서에 이익이 될만한 조치를 단행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가 고려에 부임한 이래 다른 여러 분야에서 단행했던 개변시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활리길사가 어떠한 인물이었고, 그의 관력(官歷)이 어떠하였으며, 그가 지지하고 있던 국정의 지향 등은 무엇이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자료 1]  원 세조 쿠빌라이


활리길사는 위에서 언급한 양천문제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먼저  두 차례 국왕의 대회에서 천자의 의식과 제도를 사용한 참월함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또 형벌의 불공평성과 관련하여, 증거에의 의존 없이 원고의 언급에만 의지하는 불합리성, 피고의 자백이 없으면 무조건 유배하고 석방시키지 않는 가혹성 등이 고려의 형정에 내재해 있음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관원-백성 수의 불균형 문제와 관련하여, 왕경(王京) 안팎의 여러 사(司), 아문(衙門)이 모두 358개소나 되고 대소의 관원이 4,355명이나 되므로 백성을 정치(整治)하는 데 과한 데다, 그 위에 부역(賦役)이 잦고 겹쳐 민폐가 심각하다는 점도 언급하였다. 성곽 주현이 이름만 남아 백성은 적고 관리는 많은데 관민관‧안렴관 등이 송영(送迎) 의무를 백성들에게 지워 민폐가 심해지고 있고, 부역의 부담으로 역참에 배치된 호들이 분산돼 있으며, ‘권귀들의 불법’으로 인해 백성들이 곤폐(困弊)에 빠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들은, 활리길사가 고려내부의 사정을 관찰한 후,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거론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활리길사는 고려-원의 정치, 외교적 관계와는 무관하게, 고려의 민생을 위해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폐단들을 거론한 셈이다. 위의 양천제 개변시도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주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활리길사가 이런 식으로 고려 내에서 일련의 개선, 개변,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당시 원정부 내에서의 그의 위상 및 활동과도 무관치 않다. 당시 원제국정부에서는 ‘지원신격(至元新格)’이라는 신법령을 반포하며, 그간 회회인재상들의 국정 아래 손상된 전통적 한법 차원의 가치들, 공정한 전선(銓選), 적정 관부규모의 유지, 관료 감찰을 통한 정부기강의 강화 및 적절한 부세를 통한 위민(爲民) 등을 복원하는 맥락의 정치개혁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활리길사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정에 새롭고 등장하고 있던 일군의 관료 중 한 명이었다. 그러한 그의 면모를 알게 되면 그가 고려에서 보인 일련의 행적도 쉽게 해석이 된다. 그는 원 내에서 활성화되고 있던 정치개혁론을 지지하던 인물로서, 정동행성 평장정사 자격으로 고려에 부임하였고, 원내의 사정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정치경제적 폐단들이 고려 내에서도 횡행하고 있음을 확인한 후, 자신이 목도한 바 있던 원 조정의 해법들을, 고려의 상황에도 ‘교과서적으로’ 적용하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무리하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원정부가 오래 전부터 보장해 오던 고려의 국속까지도 무리하게 변경하게 된 결과, 잡음 및 외교적 충돌이 발생하였음이 주목된다.

  애초 원정부가 그를 정동행성의 평장정사에 임용한 것은, 과열되고 있던 충렬왕-충선왕 간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평장정사에 부임한 직후 활리길사가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며 ‘녹연사목’이라는 것을 원정부에 제출하자, 원 정부는 그 또한 수용, 일련의 개변을 실시하도록 장려하기도 하였다. 활리길사가 주장한 관부수, 관원수의 감축 등은 원의 지지 아래 고려정부에 의해 수용되어, 실질적 정부규모 감축으로 귀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활리길사는 그 정도의 개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려의 국속을 존중해서는 개혁이 되지 않습니다’는 그의 강변에서 그러한 정황이 묻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양천개변 사안을 처결하며, 양인증대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행정은 당연히 고려정부 및 여러 고려인들의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사에 나타난 수많은 논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논란은 아울러 원정부에게도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원정부의 경우, ‘세조구제(世祖舊制)’를 준수하여, 고려의 관행과 풍습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활리길사는 전자를 우회‧무시하면서라도 ‘지원신격의 가치’를 고려 내에 관철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내비쳤던 셈이다. 그 결과 논란이 거세게 일었고, 고려의 항의가 ‘원(元)이 <세조구제(世祖舊制)>를 안 지킨다’는 논란으로 이어지면서, 원정부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원정부는 ‘정동행생 평장 활리길사가 고려를 능히 화집(和輯)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를 급히 소환하기에 이른다.

  정동성관 활리길사의 고려제도 개변시도가 당시 고려-원 관계사에서 점하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종래 원이 고려의 풍속과 구래 전통을 인정하기만 하다가, 이 시기 들어 국속 인정의 방침은 유지하되, 동시에 일정한 정치개혁 또한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개입’을 보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당시 원의 간섭이 대단히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그 결과 고려-원의 관계가 복합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원에서 고려에 내정개혁을 요구한 사례로는 이밖에도 정치도감의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근거로 당시 원의 고려 간섭이 보였던 다양한 층위와 맥락을 발굴해 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층위와 맥락들은, 결국 그에 대응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노력이 또한 어떤 층위와 맥락을 지녔는지를 엿보게 하는 단서들이 될 것이다.

  그러한 단서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고려인들이 13, 14세기 유례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식으로 내부 및 외부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한국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세 후기의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