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역사학의 시각으로 본 한국 중세 성황(신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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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시각으로 본 한국 중세 성황(신앙) (1)
-조선초기 성황사 입지에 대한 역사적 분석-

최종석(중세사 1분과)

근래 언론 매체를 통해서 지자체가 중심이 되어 전통 계승, 지역 축제의 차원에서 성황제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성황제를 막연히 민속의 영역으로 간주하곤 하는데, 그것은 공적(公的) 제의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등, 상당히 다면적 양상을 띠고 있었다.

  성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성황(당)은 서낭(당)과 혼칭되곤 하나, 양자는 다른 것이다.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 산록 등의 길가에 위치한 돌무더기이나, 성황당은 성황(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대개 세칸 건물인 경우가 많았다.

  성황은 본래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적 구축물인 성(城)과 그것을 보호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 파 놓은 도랑인 황(隍)의 합성어였는데, 방어 시설인 성황이 신격화되면서 신에 대한 칭호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사진 1> 대관령 성황사 및 산신각(출처: 문화재청 http://cha.go.kr/)

성황신앙은 위진남북조 시기 강남 지역에서 태동하여 이후 전(全)중국으로 확산되어 갔고,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성종대 성황당의 존재가 기록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일반적으로 나말여초 시기 무렵에 수용되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황 신앙의 수용 당시 성황사는[성황당보다 성황사가 공식 용어로 판단되어, 이후에는 이를 사용하고자 한다] 국가에 의해 일률적으로 설치되지 않고 대개 향리층에 의해 자발적으로 건립되어 그 수가 많지 않았을 것이나, 시기가 경과하면서 확산되어『동국여지승람』 편찬 단계 곧 조선 성종대 거의 대부분 군현에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서책은 『동국여지승람』이 아니라 중종대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추가한 부분을 ‘신증(新增)’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성황사를 신증한 사례가 구례현 성황사 하나에 불과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황사 관련한 내용은 사실상 성종대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해당 시기 성황사의 분포 양상과 입지 정보를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 것과 달리, 그 이전 시기의 관련 상황을 전해줄 수 있는 기록은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황사 입지 정보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분석하면, 그 이전 시기, 보다 구체적으로 고려시기의 성황사 입지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말선초 시기를 경과하면서 성황사 입지의 변화상을 읽을 수 있다.


<사진 2> 신증동국여지승람

앞서 중국에서 방어시설인 성황이 신격화되었다고 하였는데, 성황사 입지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성황 일반이 신격화된 것이 아니라 치소(治所)가 위치한 성(황)이 신앙의 대상이 된 점이다.

  이 때문에 중국의 성황사는 일반적으로 ‘치소가 위치한 성’[흔히 주현성(州縣城)이라 지칭된다] 내에 위치하였고, 성 내에서도 치소인 관아 인근에 자리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때문에 성황사는 한 군현 내에 하나씩 존재하였고, 중국의 주현성이 그 안에 많은 인구들이 거주하는 등 도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성황(신)은‘City-God’로 번역되었다. 정리하자면, 중국의 성황사는 주현성 내에 위치하면서 치소와 공간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알 수 있는 해당 시기 성황사는 다수가 읍치(邑治)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과 마찬가지로 치소와 공간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는 듯하면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성황사 입지와 관련하여 상이한 양상을 노정하였다.

  즉 성황사가 당시 치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거나, (치소 인근) 산성 안팎에 자리하고 심지어는 당시의 ‘치소가 위치한 성’[조선시기 그러한 성은 일반적으로 읍성이라 지칭된다]이 있음에도 산성 내에 입지하거나, 한 군현 내에 복수로 존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이한 양상은, 성황사가 건립될 당시의 치소가 조선초기의 것뿐만 아니라 이전 시기의 치소를 포함한 여타의 것이 있던 데서 비롯되고 있었다. 가령 한 군현 내에 성황사가 복수로 존재한 경우, 그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조선초기 당시의 치소가 아니라 ‘고치소(古治所)’, 속현(屬縣) 내지 폐현(廢縣)의 치소와 관련하여 건립된 것이었다.

  특히 산성 안팎에 위치한 성황사가 적지 않은 점과 관련하여 그 연유가 무엇인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말선초 시기를 경과하면서 치소는 산성 형태의 ‘치소가 위치한 성’[이를 조선시기 읍성과 구분하여 치소성(治所城)으로 칭할 것임]에서 (인근) 평지로 이동하였지만, 고려말 이전 시기에 치소성과 관련하여 그 안팎에 건립된 성황사들 가운데 다수가 치소 이동 이후에도 이설(移設)되지 않는 데서 그러한 현상은 발생하고 있었다.

  이 점을 풍덕군(豊德郡) 성황사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다. 이곳의 성황사는 조선초기 당시의 치소로부터 약 15리 떨어진 산성인 승천포성(昇天浦城)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읍치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던 당시의 성황사와 달리, 풍덕군 성황사는 비교적 먼 곳에 위치한 셈인데, 그 이유를 찾아보면 승천포성이 이전 시기에 치소성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와 조선시기 읍지류를 함께 참고하면, 승천포성은 고종 39년에 축조된 치소성인 승천부성(昇天府城)이었다. 결국 조선초기 풍덕군의 성황사는 승천포성이 승천부성으로 기능할 당시 부성 안에 건립되었고, 치소가 15리 정도 이동한 이후에도 성 내에 존속하면서 조선초기 치소로부터 비교적 먼 곳에 위치한 산성에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3> 고려사

그런데 풍덕군의 성황사와 같이 치소로부터 이격(離隔)된 산성에 위치한 경우는 예외적이었다. 여말선초 시기의 치소 이동은 치소성에서 그 인근 평지로 옮겨가는 것이 일반적인 까닭에, 조선초기 당시의 치소 인근의 산성 안팎에 성황사가 위치한 경우들이 많았다.

  이처럼 조선초기 성황사 입지를 독해하는데 고려시기 치소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까닭에, 이를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치소는 사전적으로 “지방관의 관서(官署)”를 의미한다. 이는 중국과 조선시기의 치소 모두 해당된다. 하지만 고려시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에도 치소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치소가 사전적 정의와 달리 향리 관청인 읍사(邑司)를 지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타 시기와 구별되는 고려의 지방지배질서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즉 당시에는 주현과 속현의 구분 없이 지방의 세습 지배층인 향리층이 국가의 공인 하에 해당 지역을 공적으로 지배하였고,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은 주현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주현 및 그 예하 속현을 망라한 지역 범위를 대상으로 하여 향리를 상위에서 감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지배질서 속에서 향리 관청인 읍사는 해당 지역의 치소가 될 수 있었다.

한편 고려와 조선의 치소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를 뿐만 아니라, 공간적 특징 또한 상이하였다. 고려시기 치소 공간의 특징은 주현과 속현의 구분 없이 치소성이 일반적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그러한 성은 중심촌이 위치한 평지와 연접한 산성이었다. 이러한 점은 조선시기 읍성이 주현들 중에서도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어 있었고, 읍성 설치 여부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치소가 평지에 위치하고 있던 것과 구별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의 사실들을 감안할 때, 고려시기 성황사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치소가 위치한 성에 건립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주현성과 비교할 때 성내 공간이 매우 협소한 고려 치소성의 특징으로 인해, 성 밖에 성황사를 건립하는 경우 또한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성 밖이라 해도 치소성이 자리한 산 안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시기 치소의 성격과 입지가 중국과 상이한 까닭에, 당시 성황사는 주현뿐만 아니라 속현에도 건립되었으며, 평지가 아니라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 여말선초 시기를 경과하면서 성황사 입지와 관련하여 변화가 있었다. 먼저 치소의 이동이 일반적으로 있게 되었을 때, 일부 지역에서는 옮겨진 치소와 관련하여 성황사가 이설되기도 하였고, 치소성 안팎에 위치하였던 성황사가 적지 않게 존속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성황사 입지와 관련하여 새로운 경향이 있었으니, 그것은 (중화) 보편질서 추구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남교(南郊), 경우에 따라서는 북교(北郊)에 해당하는 지점으로의 이설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후기에 가서야 본격화되고 있어 조선초기에는 극히 일부 지역에 한해 관철되었을 뿐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다음 번 글에서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이와 아울러 군현제 변동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군현이 병합될 때, 하나의 행정구획에 하나의 성황사가 존재하는 원리에 따라 복수의 성황사 가운데 하나만이 공인되었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예외적으로 양자 모두 인정받는 경우들이 발생하곤 하였다. 또한 속현의 경우 고려와 달리 정식 행정구획으로 인정받지 못해 속현의 성황사는 공인받지 못하였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예외적으로 주현의 성황사로 공인받았다.

  이 경우 해당 주현의 성황사는 복수가 된다. 한편 성황사가 예외적으로 복수로 존재하는 이들 현상이, 폐기되어야 하는 성황사를 존치하는데 있어 이해 관계를 함께 하는 세력들의 노력이 반영되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황사 입지 정보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고려시기 성황사 입지 및 여말선초 시기를 경과하면서 발생한 그것의 변화상을 추출하면, 이상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조선초기 이후의 입지 변화 및 고려·조선시기 성황제의에 관해서는 각각 별도의 글에서 다루어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