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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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박종진(중세1분과)

1. 마도 앞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기 배

  2009년에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앞바다에서 고려시기의 배를 발굴한 데 이어 올해도 근처 바다에서 고려시기 배를 발굴하고 있다. 먼저 마도선의 발굴에 대해서 현재까지 발표된 내용을 정리해보자. (참고자료: 2009년 11월 4일과 2010년 8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임경희 최연식, 2010 「태안 마도 수중 출토 목간 판독과 내용」 『목간과 문자』 5)

길이 10.8m, 중앙 폭 3.7m규모의 ‘마도1호선’에서는 여러 종류의 곡물, 도자기를 비롯하여, 날짜(간지), 발신지(자), 수신자, 화물의 종류와 수량 등을 기록한 목간 69점을 발굴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인양유물과 목간 내용을 종합하여 1207년 겨울에서 1208년 초에 걸쳐 해남·나주·장흥 일대에서 곡물류와 젓갈류, 도자기 등을 모은 후, 개경에 있는 관직자에게 올려 보내고자 항해하던 중 마도에서 좌초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사진1. 마도선 발굴 해역 지도(2009년 11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사진2. 마도2호선 발굴 현장(2010년 8월 3일. 박종진) 오른쪽 배가 ‘마도2호선’ 발굴현장이고 왼쪽 배는 발굴 준비 중인 배다.

한편 ‘마도1호선’이 발굴된 곳에서 동쪽으로 약 900m지점에서 현재 발굴 중인‘마도2호선’에서도 각종 도자기, 곡물, 목·죽제품을 비롯하여 화물의 종류와 수신자 등을 기록한 목간 등 중요유물을 발굴했는데, 선체 중앙부 부엌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는 청동숟가락, 도기 항아리, 대바구니, 쇠솥, 맷돌 등 배에 탄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유물도 인양하였다.


사진3. ‘마도2호선’에서 나온 쇠솥(2010년 8월 3일. 박종진). 뒤쪽에 보이는 것은 솥다리이다.


사진4. ‘마도2호선’에서 나온 맷돌(2010년 8월 3일. 박종진). 같은 날 대바구니도 나왔다.

특히 마도선에서는 화물 종류와 그 수량, 발신자, 발송지가 적혀 있는 고려시기 목간 수십점이 발견되어 고려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발표된 내용만 보더라도 목간에 적힌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풍부하기 때문에 목간의 판독이 마무리되고 마도선에 대한 종합조사보고서가 발표되면 침체되어 있는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활성화에 도움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2. ‘마도선’은 조운선이 아니다.

문화재청의 보도자료에서는 발굴한 화물 종류와 목간의 내용을 종합하여 마도선을 세곡운반선(조운선)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필자는 목간을 비롯하여 마도선에서 수중 발굴한 내용 전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판단한 문화재청의 견해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까지 발표된 내용만 보더라도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1)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마도선의 크기와 구조가 『고려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안 조창의 조운선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마도 1호선’은 길이 10.8m, 중앙 폭 3.7m규모이고, ‘마도 2호선’은 길이 12m, 너비 5m, 깊이 1.5m 가량으로 1호선보다 약간 크다. 물론 두 배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한강 상류의 조창(충주의 덕흥창과 원주의 흥원창)에는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이 있었지만 해안에 위치한 조창에는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렵다. 다만 『고려사』의 내용은 고려 초인 정종대의 사정을 말하고 있고 ‘마도선’은 고려 중기의 것이기 때문에 이후에 연안의 조창에도 평저선이 추가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앞으로 ‘마도선’의 구조와 적재용량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기 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2) 마도선을 조운선으로 보기 어려운 둘째 이유는 목간에 기록된 화물을 받는 주체가 모두 개인이기 때문이다. 조운은 공적인 운송체계로서 주로 지방의 조세를 중앙으로 보내는데 이용하였다. 고려시기 조세는 지방 군현 단위에서 수령과 향리의 책임 아래 중앙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보도자료에서도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 배를 조운선으로 판단한 듯하다. 그렇지만 조세는 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관청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다양한 잡물로 구성된 공물(貢物)은 중앙관청으로 보내야 한다.


사진5. 대장군 김순영 이름이 적힌 목간(2009년 11월 4일 문화재청 보도자료). 대장군 김순영 댁에 벼 6석씩 보내는 목간 6개가 발견되었다. 김순영이 최충헌 집권기에 대장군이 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함께 발굴된 다른 목간에 기록된 정묘년과 무진년은 1207년과 1208년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토지에서 수확한(田出) 곡물류의 경우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전출’은 화물주의 소유지에서 거둔 지대일 수도 있고 화물주의 수조지에서 거둔 전조일 수도 있다. (임경희 최연식, 앞논문) 고려시기에는 소유지에서의 지대 징수는 말할 것도 없고 수조지에서의 수조 역시 수조권가 직접 하도록 되어 있지만 『고려사』의 기록을 유추해 볼 때 지방에서 수조한 곡물은 조운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간의 ‘전출’은 개인이 수조한 곡물이 향리의 도움으로 조운을 이용하여 중앙의 수조권자에게 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전출’의 화물주 중 상당수가 산직(散職)이라는 점에서 ‘전출’은 화물주의 수조지에서 거둔 수조액으로 볼 수 없다. 고려 문종 때 정해진 경정전시과에서는 직사가 없는 산직 관리에게는 토지(수조지)를 분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발굴되어 판독된 목간이 배에 실렸던 화물 전체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현재 판독된 것은 개인에게 가는 것만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마도선’에 실린 화물은 조세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마도선의 물품은 지방의 향리들이 보낸 개인 화물(지대, 선물, 뇌물 등)일 가능성이 높다. 마도선과 그 화물의 성격, 특히 화물 전체의 양과 무게, 각 화물 사이의 비율 등 화물 전체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3) 결과적으로 마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기 배는 조창에서 관리하는 배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조운선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고려시기 조창에서는 『고려사』에 기록된 정기 조운선 외에도 다양한 배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배를 이용하여 부정기적인 조세를 납부하거나 중앙관리에게 선물 등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배들을 고려시기 조운선으로 추정한 문화재청의 판단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하여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고려 사회경제사 연구의 ‘보물단지’

고려배가 발견된 마도 앞바다에는 ‘1호선’과 ‘2호선’ 외에도 발굴 준비 중인 배가 있으며, 근처에서 상당히 많은 닻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물살이 세고 안개가 짙은 이곳 난행량을 지나다 많은 배가 침몰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아울러 고려중기 송나라 사신 일행이 정박하여 고려정부로부터 군산도(선유도)에 이어 공식 영접을 받은 곳도 바로 이곳 마도의 안흥정이다. 이 사실은 이곳 태안 앞바다가 고려시기 수도 개경으로 가는 항로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곳의 발굴이 관심을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6. 닻돌(2010년 8월 3일. 박종진)


사진7. 마도 등대에서 본 신진항(2009년 11월 11일. 박종진). 당시 서긍 일행은 마도와 신진도 사이 지금 신진항에 정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도선’은 생생하고 풍부한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자료를 담고 있는 ‘보물단지’이다. 발굴 자료의 정확한 조사와 정리가 선행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다면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에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농장 규모와 경영형태, 도량형, 향리의 기능, 중앙과 지방 사람들의 관계와 교류, 배의 구조와 기능, 조운을 비롯한 해상 운송, 곡물의 종류와 형태, 음식물의 종류와 저장방법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