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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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 (1)
– 장단나룻길의 유래와 번영 –

정요근(중세사 1분과)

일찍이 백제가 처음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기틀을 갖춘 곳은 현재 서울시 송파구에 위치한 풍납토성이었다. 풍납토성은 북쪽의 한강과 서쪽의 성내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에 대한 방어에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한강 하류지역에서 도하(渡河)에 가장 유리한 광나루(광진, 현 서울시 광진교 부근)와도 인접해 있었고, 한강수운을 통해서는 한반도 동남부지역이나 서해안으로의 이동이 용이한 요충지적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삼국시대 광나루는 한반도의 서북부와 남부지역을 연결하는 핵심지점이었다. 즉 한반도 서북방과 한반도 남부지역 사이의 육상 교통로 이용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암사동의 신석기유적이나 백제의 초기도읍이었던 풍납토성이 광나루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나루가 한강을 도하하는 가장 중요한 나루였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5세기 장수왕대에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하였을 때에도광나루는 중요한 요충지점으로 중시되었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백제의 도읍이었던 풍납토성 대신 광나루 북변의 아차산에 성을 쌓고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광나루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고구려의 주된 남진루트는 평양으로부터 남하하여 임진강의 장단나루(경기 파주시 적성면 및 연천군 장남면 사이)를 지나 현재의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시, 의정부시 등을 경유하여 광나루에 이르는 이른바 ‘장단나룻길’이었다.

  장단나룻가에 있는 호로고루성으로부터 광나루의 아차산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남진루트 근방에는 아직도 곳곳마다 고구려의 군사시설들이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가 남방진출에 있어서 광나루의 확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사진 1>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출처 : 서울시 한강시민공원 홈페이지 http://hangang.seoul.go.kr/)

이후 국력을 강화시킨 백제와 신라는 6세기부터 한강유역의 확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삼국통일을 달성하였던 신라의 경우, 6세기 후반 죽령과 계립령(문경 하늘재)을 넘어 소백산맥 이북으로의 진출에 성공하였고, 결국 한강 하류지역까지 확보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당시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는 한반도 동남방의 경주로부터 서북 방면으로 계립령과 충주, 그리고 현재의 경기도 이천시와 광주, 하남시를 경유하여 광나루에 이르는 루트였다. 아차산성에 위치하였던 북한산군은 신라에 의해 점령되어 한양군(漢陽郡)으로 개명되었고,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신라군과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성 일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러므로 평양으로부터 한강의 광나루를 거쳐 동남방의 경주로 연결되는 교통로는 삼국시대 한반도의 가장 주요한 광역 간선교통로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사진 2> 호로고루에서 바라본 장단나루 전경(@정요근)

  광나루를 경유하는 한반도 서북부와 동남부 사이의 육상교통로는 삼국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중시되었다.

  통일신라는 확대된 영토에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인 9주 5소경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광나루와 동남쪽으로 인접한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일대에는 9주 중 하나인 한주(漢州)의 치소가 건설되어 한강 하류유역을 포함한 광역의 지역을 통할하는 중심지로 부각되었고, 광나루 북변의 아차산성도 한양군으로 편성되어 주변 2개의 고을을 관할하는 지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기에도 광나루의 비중과 중요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에서는 전국의 명산대천에 국가가 직접 제사를 드리는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하천의 경우 전국에 네 곳의 신성한 강을 설정하여 4독(四瀆)이라고 칭하였는데, 광나루가 위치한 한산하(漢山河), 즉 한강은 그 중 북독(北瀆)으로 편성되어 중시되었다.

  또한 통일신라는 신라는 지금의 황해도 지역의 영토개척을 활발히 시행하였는데, 그 진출로는 수도인 현재의 경주로부터 상주와 계립령, 충주, 이천, 하남 등을 거쳐 한강의 광나루에 이르는 루트였으며, 한강 이북의 루트는 이전 고구려의 남방진출로였던 장단나룻길과 동일하였다.


<사진 3> 장단나룻길(@정요근)

신라하대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각 지방의 유력호족들은 자신의 연고지역에서 반독립적으로 할거하였지만, 점차 후삼국 중 어느 한 국가에 대한 지지를 선택하게 되었다.

  고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궁예의 후고구려(태봉)는 철원에 기반을 다지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는데, 지금의 하남시 지역, 즉 광주(廣州)를 거점으로 확보하고 남방경략을 추진하였다. 그러한 흐름은 후고구려를 대신하여 개성에 도읍을 정한 고려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되고 있었다.

  특히 고려는 후삼국통일의 완수를 위해 소백산맥 이남지역, 즉 경상도 지역의 호족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후의를 보였으며, 경상도 방면의 진출을 위한 교통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한강 하류지역과 경상도 방면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통로인 광나루와 광주, 충주를 거쳐 계립령, 혹은 죽령을 넘는 루트는 고려의 건국 이후에도 주요 남방 진출로로 간주되었다.

  한때 태조의 남방 원정군은 남천(南川)이라는 이천지역의 하천을 건널 때에 도하(渡河)에 큰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지역 유력자인 서목(徐穆)이라는 인물이 군사들의 도하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해 광주로부터 충주로 향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천이 고려군의 주요 남방 진출로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충주지역은 경상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의 주요 고갯길인 계립령 및 죽령과 직접 연결되었으므로, 고려에 의해 주요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후삼국시기 충주의 유력호족인 유긍달(劉兢達)은 태조에 적극 협력하여 그의 딸은 태조의 세 번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가 되었으며, 고려의 세 번째 및 네 번째 임금인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모두 그녀의 소생이었다.

  또한 고려는 계립령의 확보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고충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립령은 충주로부터 상주와 낙동강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직로였던 까닭에, 계립령의 확보를 둘러싸고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는 치열한 대결이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태조가 남진하는 도중 계립령에 이르렀을 때 길을 찾지 못하여 곤란에 빠져 있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 주어 태조의 군대가 나아갈 수 있었다는 관갑천(串岬遷)의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는 경상도 방면 진출을 위해 고려가 계립령로의 확보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후삼국시기 고려태조 왕건의 남방경략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하여 장단나룻길로부터 한강의 광나루를 횡단하여 광주와 이천, 충주를 거쳐 계립령이나 죽령을 넘는 교통로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도 여전히국가적으로 중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4> 관갑천(일명 토끼비리)의 일부구간(출처 : 문경시 문화포털 http://www.culture.go.kr/)

고려시대 지방행정체계의 특징은 전국의 군현을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 즉 주현(主縣)과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 즉 속현(屬縣)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인데, 주현으로는 대체로 지역중심지적 입지를 지닌 큰 고을이 선정되었고, 속현은 나머지 대부분의 고을들로서 주현의 행정적 관할 하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임진강의 장단나루로부터 한강의 광나루를 거쳐 계립령이나 죽령으로 연결되는 간선로 상의 고을들은 주변 다른 지역의 고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한 주현으로 설정되어, 주변의 속현들을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임진강 장단나루 근방에 위치한 장단현, 한강의 광나루 북변 아차산 기슭에 위치한 양주, 광나루의 남쪽 지금의 하남시 일대에 위치한 광주, 계립령 및 죽령과 연결되는 충주는 각각 7곳, 9곳, 7곳, 6곳의 속현을 거느리는 대읍으로 편성되었다.

  즉 한강유역과 경상도 방면을 연결하는 간선로 상에 위치한 고을들은 지역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특히 광나루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양진(楊津)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양주의 나루’라는 뜻이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으로 인하여 개경이 함락되어 고려의 현종(顯宗)은 전라도 나주로 긴급히 피난을 간 바 있었는데, 이때 현종은 개경으로부터 장단나루와 광나루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