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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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3)
– 사평나루의 번영 –

정요근(중세사 1분과)

고려중기 남경의 설치 이후 광나루를 대신한 한강의 횡단지점은 사평나루(사평도)였다. 사평나루는 현재 서울의 한남대교의 지점에 위치하였다. 사평나루는 광나루에 비해 하류에 위치하였으나, 남경이 설치된 현 서울 4대문 일대와 인접하였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인하여 기존의 광나루보다 남경과의 접근성에 유리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고려중기 광나루의 쇠퇴사평나루의 성장은 한강 이북지역에서 장단나룻길을 대신한 임진나룻길의 성장과 더불어, 남경 건설로 인하여 발생한 한강 유역 일대 간선교통로 노선의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남경 설치 이전까지는 개경으로부터 장단나룻길을 통해 광나루를 건넌 다음 광주(廣州), 즉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 일대에서 동남쪽의 경상도 방면과 서남쪽의 전라도 방면 두 줄기의 간선로가 갈라졌다.

  그러나 남경의 건설로 인한 광나루의 쇠퇴와 사평나루의 이용 확대는 한반도의 동남방과 서남방으로 향하는 교통의 결절점으로서 광주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그러므로 고려중기 남경의 설치는 장단나룻길과 광나루의 쇠퇴, 그리고 임진나룻길과 사평나루의 이용 확대를 초래하여 한반도 중서부 평야지대인 한강 하류지역에서 한반도 남부로 향하는 간선교통로의 노선을 변화시키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후 고려를 계승한 조선왕조는 고려의 남경, 즉 한양을 새로운 도읍을 확정하면서 고려중기 남경의 건설 이후 수립된 한반도 남부지역으로의 간선교통로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사진 1> 고려중~후기 한강하류 일대의 주요 교통로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한양에 도읍을 확정한 이후, 한양으로부터 전국 8도로 연결되는 교통로는 재정비되었다. 사평나루 이외에도 노량진이나 동작진, 양화진, 삼전도 등 한강을 건너는 여러 나루가 이용되었지만, 사평나루는 한강나루(한강진)로 불리면서 여전히 한양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나루로 인식되었다.

  ‘《증보문헌비고》 여지고’의 9대로 구분에 따르면, 9대로 중 북쪽 방면의 제1로와 2로, 동쪽의 3로, 서쪽의 9로를 제외한 나머지가 한양 이남 방면으로 향하는 대로인데, 충주를 거쳐 경상도 방면으로 향하는 4로와 5로가 한강나루를 지나 현재의 용인으로 연결되는 고려중기 남경 설치 이후의 간선로를 따라 편성된 것이었으며, 서남방으로 연결되는 6로와 7로, 8로는 동작나루(동작진)와 과천을 지나 전라도와 충청도 서해안 방면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강나루와 용인현(현 용인시 기흥구, 고려시대의 용구현)을 거쳐 청호역(현 경기 오산시 대원동)으로 향하는 교통로도 6~8로의 구간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한강나루를 거쳐 용인에 이르는 구간은 사실상 한양과 남방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간선교통로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근대시기 전국의 주요 교통로에는 이용자의 편의를 위해 역(驛)이 설치되었다. 역은 중앙에서 지방이나 외국을 오고가는 사신들에게 말이나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중앙과 지방 사이의 공문 전달,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진상물품의 운송, 통행자의 검문 검색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전근대시기 대표적인 공적 교통통신기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역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도읍인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약 525곳의 역이 설치되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545곳의 역이 편성되었다.

  대체로 큰 고을의 치소 근방이나 주요 간선로 상에는 반드시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공적 여행객들은 먼저 병조에서 관할하는 청파역(현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을 지나 한강나루를 건넜으며, 그 다음에양재역(현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양재역의 남쪽으로는 낙생역(현 경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을 거쳐 구흥역(현 경기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에 이르렀다. 구흥역은 용인현의 치소와 인접하였으며, 용인현에서 서남쪽으로는 청호역 등을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분기되었고, 동남쪽으로는 김령역(현 용인시 처인구 중앙동ㆍ역삼동) 등을 거쳐 경상도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이어졌다.


<사진 2> 구 한강진(출처:서울시 한강시민공원, http://hangang.seoul.go.kr/)

  그러나 역은 공적인 임무를 띤 여행자만이 이용할 수 있을 뿐, 모든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요 교통로 상에는 공적 여행자뿐만 아니라 민간 여행자들도 이용할 수 있는 숙식시설이 운영되어야 했다.

  조선전기 전국의 주요 지점 1310여 곳에 설치되어 운영된 원(院)은 역을 보조하는 대표적인 편의시설이었다. 원과 같은 숙식시설 역시 고려시대에도 주로 불교사원에 의해서 운영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에 의한 통제와 관리가 보다 강화되었다.

  원의 설치지역은 고을 치소의 근방이나 나루터, 고갯길, 교통로의 분기점 등 여행객이 왕래가 많은 곳, 또는 지연지리적 장애로 인하여 여행객의 이동에 불편이 발생하는 곳 등에 주로 집중되었다. 따라서 한양에서 한강나루를 거쳐 남방으로 이어지는 간선교통로에도 다수의 원이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강나루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던 사평원은 일찍이 고려 무신집권기에 활동하였던 이규보(李奎報)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사평원은 고려시대 이래 사평나루(한강나루)의 이용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이용되었다.

  또한 고려말 고관을 지냈던 조운흘(趙云仡)이라는 인물은 관직 은퇴 후에 광주에 거주하면서 사평원과 판교원의 운영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판교원은 현재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한강나루 남쪽의 간선로 상에서 보자면 낙생역과 인접한 지점에 설치되었던 원이었다.


<사진 3> 옛 사평리 추정지역

20세기 초반 일제에 의해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노선은 전통적인 간선로의 노선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요충지들은 경부선 철도 노선의 경유지점으로부터 배제되면서 그 위상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서울 이남의 관문이었던 한강나루와 영ㆍ호남 방면 두 간선로의 분기점이었던 용인, 한강과 낙동강 수운을 배후로 한 전통적인 대읍인 충주나 상주 등은 모두 급격한 쇠락을 맞았다. 반면 철도의 건설과 함께 최초의 근대식 한강교량인 한강 인도교가 노량진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한강나루 대신 노량진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개발경제시대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의 노선은 경부선 철도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간선교통로의 존재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사실은 그 시발점이 노량진이 아닌 한남대교라는 점이다.

  한남대교는 서울지방에 남경이 설치되었던 고려중기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20세기 초까지, 수백 년 동안 서울에서 한반도 남부로 향하는 간선로의 시발지점이었던 한강나루(사평나루)에 건설된 교량이었다.

  그러므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경부선 철도의 부설로 인하여 그 지역적 비중이 쇠퇴하였던 전통적인 간선교통로 경유지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경부고속도로의 수도권 구간은 한강나루로부터 남하하여 양재역, 낙생역과 판교원, 옛 용인현(현 용인시 기흥구)과 구흥역 등을 거치는 전통적인 간선로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의 축을 따라 이루어진 오늘날 서울 강남의 번영과 분당, 용인 등의 개발은 바로 전통적 간선교통로의 궤적을 따라서 진행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