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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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남경의 설치와 간선교통로의 변화(2)
– 남경의 설치와 임진나룻길의 대두 –

정요근(중세사 1분과)

장단나루로부터 광나루를 거쳐 광주와 충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한반도 중서부지역에서의 전통적인 간선로는 11세기 중반 이후 노선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서울 4대문 안 지역에 새로이 남경(南京)이 설치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남경은 1067년(문종 21) 최초로 설치되었으며, 1104년(숙종 9)에는 남경에 궁궐이 완성되었다. 남경의 궁궐은 현재의 경복궁과 청와대 지역에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남경의 건설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된 바 있는데, 대체로 왕권의 확립과 같은 정치적인 동기가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국왕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남경이 선택된 것에 대해서는 남경의 지세가 지니고 있는 풍수지리적 명당의 입지가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파악된다. 그러나 남경 건설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남경이 설치가 고려중기 현종계 왕실의 왕위 독점과 관련하여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삼각산(북한산)을 신성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진 1> 고려 현종 15년 제작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태조의 손자이지만 아버지인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어머니인 경종(景宗)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 사이의 혼외 관계로 출생한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은 일찍이 승려가 되어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神穴寺)라는 사찰에 기거하고 있었다.

  더구나 경종의 비이자 목종(穆宗)의 모후인 헌애왕후(獻哀王后, 천추태후)는 자신과 김치양(金致陽) 사이에 출생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고자 하여, 김치양과 더불어 잠재적 왕위계승 후보자였던 현종을 핍박하고 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009년(목종 12) 강조(康兆)가 일으킨 정변으로 현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현종 사후에도 현종의 세 아들을 비롯하여 고려 멸망 시까지 현종의 직계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이렇듯 현종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게 되자, 현종이 즉위 전에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하였던 장소인 삼각산은 왕실에 의해 신성지역으로 부각되었고, 현종의 후계자들은 정기적으로 삼각산을 순행하여 현종의 덕을 기리고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현종의 세 아들 중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삼각산 순행과 삼각산에 대한 신성화를 제도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강구하였는데, 삼각산 아래인 지금의 서울 4대문 안 지역에 부수도 격인 남경을 설치한 것은 그 상징적인 조치였다.

  즉 남경의 설치는 삼각산의 신성화를 통해 현종계 왕실의 왕위계승을 확고히 하기 위한 방편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남경의 건설은 남경의 지세가 지니는 풍수지리적 이점을 배경으로 정치적으로 정당화되었으며, 1067년 문종의 남경 설치와 1104년 문종의 아들인 숙종의 남경 재건 모두 그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사진 2> 장단나룻길과 임진나룻길 (@정요근)

그런데 서울 4대문 안에 남경이 건설되었다는 사실은 한강 하류지역에서 남방으로 연결되는 간선로의 노선변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남경은 새로이 건설된 고을이 아니라, 기존의 지역중심지였던 양주가 승격되어 이전, 개편된 것이었다.

  남경의 설치는 기존의 양주가 위치했던 지역인 서울의 동남부 아차산 기슭으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서울 4대문 안으로 중심지가 이동한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 4대문 안에 설치된 남경의 존재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부터 장단나루와 광나루를 거쳐 남하하는 기존 간선로인 장단나룻길의 노선 수정을 불가피하게 야기하였다.

  즉 신설된 남경은 장단나룻길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장단나룻길을 통한 개경과 남경 간 이동은 삼각산을 우회하는 노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남경의 설치로 인하여 개경과 남경 사이의 인적, 물적 이동이 확대되자, 장단나룻길 대신 두 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새로운 교통로 개척의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개경으로부터 임진강 하류의 임진나루(현 파주시 파평면 임진리)를 거쳐, 현재의 파주시 파주읍과 혜음령,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을 거쳐 서울의 은평구 방면으로 진입하는 루트인 이른바 ‘임진나룻길’이 장단나룻길을 대신하여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남경의 설치 이후 임진나룻길의 이용이 점차 활성화되자 고려조정은 이용자가 늘어난 임진나루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인적이 드물었던 혜음령에 혜음원(惠陰院)을 설치하여 왕래자들에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장단나룻길 상에 위치한 장단현의 중요도 감소로 인하여 장단현의 지방관 파견을 폐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기존 장단나룻길의 비중 축소 및 임진나룻길의 중요성 증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세기 중반 이후 정기적으로 시행된 국왕의 남경 행차 시에도 임진나룻길이 활용되었으며, 임진나룻길의 중간에 위치한 혜음원에는 국왕의 숙식을 위한 행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사진 3>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 전경
(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이상과 같이 남경의 설치는 한강 이북지역의 간선로를 장단나룻길에서 임진나룻길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남경의 설치 이후 간선교통로 노선의 중대한 변화는 한강 이북지역뿐만 아니라 한강 이남지역에서도 감지되었다. 그 변화의 내용은 바로 한강을 횡단하는 대표적인 나루였던 광나루의 중요성이 감소하였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신석기시대 대규모 취락이 존재하였던 암사동 주거지, 백제의 초기도읍지인 풍납토성, 고구려의 한강유역 확보 이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전기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던 아차산 일대 등 한강 하류 일대의 각 시대별 대표적 지역중심지는 모두 광나루의 인근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주가 광나루와의 거리가 멀리 떨어진 남경으로 이전, 승격되면서, 광나루의 중요성은 이전시기보다 급격히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전기 양주와 인접한 지점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인 ‘양진(양나루)’이라는 나루의 이름은 양주의 남경으로의 승격, 이전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불리는 ‘광진’, 즉 ‘광나루’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주가 남경으로 이전하면서 ‘양진’은 서울 4대문 안에 위치한 남경보다 하남시 지역에 위치한 광주와 더 가까운 곳이 되었고, 그 명칭 또한 기존의 ‘양진’에서 ‘광진’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