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시기 서해 바닷길의 중심지 군산도(선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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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서해 바닷길의 중심지
군산도(선유도)

                                                                 박종진(중세사 1분과)

  지난 달 중세1분과의 홍영의 선생과 전라북도의 선유도와 위도에 다녀왔다. 이 섬들은 고려 인종 원년에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 일행이 정박했던 곳이다. 서긍은 그들이 배를 타고 통과했거나 정박했던 섬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해 놓아서 당시 뱃길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서긍은 특히 군산도(선유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바로 그 섬 선유도 해안 갯벌 자갈 속에서 홍영의 선생이 수많은 청자 조각을 찾아냈다. 선유도 해안에 지금까지 청자조각이 수북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1> 해변 갯벌의 청자조각 (@박종진 2009)
1. 서긍이 지나간 바닷길

  해상왕국이었다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고려왕조이지만, 당시의 바닷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없다. 고려시기 바닷길에서 선유도가 차지했던 위상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앞서서 서긍 일행이 고려 해역에 들어와서 개경으로 갔던 서해 바닷길을 따라가 보자.

  노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을 정 부사로 하는 송나라 사신단(『고려도경』을 쓴 서긍의 직책은 제할인선예물(提轄人船禮物)이었다.)은 1123년(인종 원년) 5월 28일 신주 2척과 객주 6척 모두 8척의 선단을 이끌고 송나라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대양을 통과해 6월 2일 협계산을 지났다. 서긍이 중국과 고려의 경계로 인식한 한 협계산은 흑산도 남쪽의 가거도(소흑산도. 신안군 흑산면)로 보인다.


<사진 2> 흑산도 상라산성에서 내려다 본 예리항 (@박종진 2003)

  소흑산도를 통과한 서긍 일행은 다음날인 3일 그 북쪽의 오서와 흑산을 지났다. 오서는 가거도와 흑산도 사이의 섬인 하태도 중태도 상태도 등의 섬이고, 흑산은 흑산도(대흑산도. 신안군 흑산면)이다.

  서긍에 따르면 이전에는 중국 사신배는 이곳 흑산도에 정박하였고 고려에서도 이곳 흑산도에서부터 사신 영접을 시작했으며, 관사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서긍 일행은 흑산도에 정박하지 않고 통과하여 월서, 난산도, 백의도, 궤섬, 춘초섬을 지났으며, 다음날인 4일 보살섬을 지나, 죽도에 정박했다.

  서긍 일행이 남송을 출발하여 처음 정박한 곳이 죽도인데, 죽도는 지금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 안마군도에 속한 죽도로 생각된다. 안마도의 서쪽에 있는 조그만 섬 죽도는 지금 안마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죽도를 떠난 서긍 일행은 5일 고섬섬을 지났지만 풍랑으로 이곳에 정박했다. 고섬섬은 고슴도치 섬으로 알려진 전라북도 부안군의 위도이다.


<사진 3> 배에서 본 위도 (@박종진 2009)

  다음날인 6일 서긍 일행은 군산도에 정박하였는데 고려 국가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중국 사신 일행을 공식 영접하였다. 군산도는 지금 군산 앞의 고군산 군도인데 이들이 정박한 곳은 선유도였다. 이곳에서는 수도인 개경에서 내려온 동접반(同接伴) 김부식(金富軾)이 중국 사신단을 맞았으며, 이곳 계수관인 전주목사 오준화(吳俊和)는 사신을 보내어 환영하였다.

  배가 섬으로 들어온 후 정사와 부사가 접반에게 「국왕에게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글」을 보내자, 접반은 사신 일행을 선유도의 군산정(群山亭)으로 초대하여 환영연을 베풀었다. 이 때 접반과 군수가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군수는 만경현 감무로 추정된다. 서긍 일행은 군산도 남쪽의 횡서(안섬)에서 하루 더 묵었다.


<사진 4> 선유도 전경 (@박종진 2009)

  8일 서긍 일행은 홍주경내의 부용창산, 홍주산, 아자섬(알자섬) 지나 마도에 정박했다. 마도는 태안군 근흥면 안흥성 앞 신진도 앞에 있는 섬이다. 서해의 땅끝 태안의 서쪽 끝에 있는 마도 해안은 험하고 물살이 세어서 배를 대기 어려웠다. 최근 마도 해역에서 조운선을 비롯한 고려시기의 배가 계속 발굴되는 것은 배가 이곳을 지나다 침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긍 일행은 마도와 신진도 사이 지금 신진도항에 정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마도는 청주목 영역이었는데, 중국 사신 일행이 청주목 영역인 마도에 들어오자 청주목사 홍약이는 사신을 보내어 중국 사신 일행을 안흥정으로 초대하여 군산정에서와 같은 환영연을 베풀었다. (문종 32년 5월 고려 조정에서 이곳 안흥정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국 송나라 사신을 맞은 사례가 『고려사』에서 확인된다.) 안흥정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진도와 안흥성 일대로 추정된다.


<사진 5> 마도 등대에서 본 신진항 (@박종진 2009)

  9일 마도를 출발한 서긍 일행은 구도산, 당인도, 쌍녀초, 대청서,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소청서를 통과하여 자연도(영종도)에 정박하였다. (서긍 일행이 통과했다는 대청서 소청서를 대청도 소청도로 보면 당시 서긍은 9일 태안반도 끝에서 출발하여 대청도까지 올라갔다가 당일 영종도에 도착한 것이 된다. 당시 바람과 해류의 방향이나 세기를 알 수는 없지만 하루에 마도에서 대청도를 거쳐 영종도에 도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신시초에 소청도를 지나고 신시 정각에 자연도에 도착하였다고 한 것은 기록의 잘못으로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검토가 필요하다.)

  자연도는 당시 광주목 영역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서긍 일행은 공식 영접을 받았다. 접반 윤언식(尹彦植)과 광주목사 진숙(陳淑)이 보낸 사신이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였는데, 병장과 의례가 융숭하였다고 한다. 사신 일행은 산기슭에 지은경원정에 올라 환영연에 참석하였는데,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禮)와 같았다. 중국 사신이 계수관 영역에 들어오면 계수관 단위로 영접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서긍 일행은 10일 급수문을 지나 합굴에 정박하였고, 11일에는 분수령을 지나 용골에 정박하였으며, 12일에 조수를 따라 예성항에 들어가 벽란정에서 조서를 봉안하고 13일 육로로 개경에 들어갔다. 급수문은 강화도 동남쪽 손돌목 근처로 추정되기 때문에 당시 서긍 일행은 영종도에서 염하를 따라 북상하여 조강에 이른 후 예성항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서긍 일행이 지나거나 머물렀던 합굴, 분수령, 용골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경로에 대해서는 더 검토가 필요하다.

  서긍 일행은 6월 2일 고려 영역인 소흑산도를 지난 이후 죽도(4일), 군산도(선유도, 6일), 마도(8일), 자연도(영종도, 9일)를 거쳐 12일 예성항에 들어왔으며, 군산도 마도 자연도에서 공식 영접을 받았다. 서긍 일행은 송나라로 돌아갈 때도 같은 길로 갔는데, 풍랑으로 군산도에서 20일, 마도에서 3일을 정박했기 때문에 개경에서 명주 정해현까지 42일이 걸렸다.


<지도 1> 서긍 일행의 일정. 통과하거나 정박한 곳을 표시했다. ()안은 현재 지명이다. (원도: 정요근 제공)
2. 고려시기 선유도의 시설과 위상

  서긍 일행이 처음으로 고려 조정으로부터 공식 영접을 받은 선유도는 군산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 고군산 군도의 중심섬이다. 고군산 군도는 선유도, 장자도, 신시도, 무녀도, 방축도, 말도 등 6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6개의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항구가 있는 중심 섬 선유도는 북쪽으로는 장자도, 남쪽으로는 무녀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선유도의 중간에 해수욕장이 있고 그 동쪽으로 선유도의 상징인 망주봉 봉우리 2개가 우뚝 서있는데 그 동쪽 봉우리 중턱에 오룡묘가 자리하고 있고 산 아래에는 민가가 있다.

  고군산 군도의 가장 큰 섬인 신시도는 새만금 방조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신시도와 무녀도도 다리로 연결될 예정이어서 고군산 군도의 주요 섬들은 조만간 육로로 연결되게 된다.


<지도 2> 고군산 군도 (원도: 네이버지도)

  고려시기 선유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군산도가 전주목 영역의 어느 군현에 속해있었는지부터 유추해보자. 현재 군산시 일대의 고려시기 중심 군현은 임피현(군산시 임피면)이었다.

  외관이 파견된 주현(主縣) 임피현에는 회미현, 부원현, 옥구현, 만경현 등 4개의 속현이 소속되었는데, 만경현에는 예종 원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초기 기록에 군산도가 만경현에 속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기에도 군산도는 만경현에 소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어서 당시 군산도의 모습을 고려도경을 토대로 그려보자. 서긍에 따르면 수백길 절벽을 이룬 2개의 봉우리 밑에 군산정이 있었고 문밖에는 관가 건물(公廨) 10 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었다.

  또 서남쪽 큰 숲에는 숭산행궁(崇山行宮. 서긍은 이곳을 숭산 별묘로도 표기하였는데, 숭산은 개경의 송악산의 다른 이름이므로 당시 선유도에는 송악신사의 별묘가 있었던 셈이다.)이 있고, 주변에 민가 10여 호가 있었다.

  서긍이 군산정이 자리했다는 2개의 봉우리는 망주봉을 말한다. 당시 사신 일행을 맞아 환영연을 베풀었던 군산정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대문, 행랑, 대청과 부속 건물을 갖춘 관사였다. 이곳은 평시에는 서긍이 군산도 주사라 칭한 만경현 소속의 향리가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복사는 정전과 문, 행랑만 갖춘 단출한 구조였으며 그곳에는 2,3명의 승려만 있었다. 또 서쪽 봉우리에 있는 오룡묘는 두 기둥만 있는 작은 집으로 정면 벽에 오신상이 그려져 있었다. 숭산행궁이 있었다는 서남쪽 큰 숲은 선유도 항구 뒤쪽의 높은 산 선유봉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당시 군산도에는 관사인 군산정을 비롯하여 오룡묘, 자복사, 숭산행궁 같은 종교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사진 6> 망주봉 : 오른쪽 봉우리 중턱에 오룡묘가 있다.  (@박종진 2009).

  아울러 군산도에는 항만시설과 여러 척의 순시선이 있었다. 서긍에 따르면 군산도에는 홍주도순, 공주순검, 안흥 등의 깃발을 단 10여척의 순선이 있었는데, 이들 순선이 사신배가 입경하고 회정할 때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전송하였다고 한다. 이들 배에는 푸른 옷을 입은 뱃사공과 나졸이 타고 있었다.

  또 군산도에는 송방이라는 채색배도 있었는데, 이 배는 정사 부사를 영접하는 배였다. 또한 군산도에서는 국수와 해물이 포함된 10여가지의 음식을 사신단에 제공했는데, 주로 금은기와 청자를 사용하였다 한다.


<사진 7> 오룡묘 (@박종진 2009)

  이렇게 선유도에는 관사, 종교시설, 항만시설, 순선 등을 갖추고 있었고 이에 따라 선유도에는 이들 시설을 관리하고 지원할 사람들이 적지 않게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10여척의 순시선에 타고 있던 나졸과 사공도 적지 않은 수이다.

  물론 그 10여척의 순시선이 군산도에 상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상주 인원 역시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또 사신 일행이 섬에 들어올 때 연안에 깃발을 들고 서있었던 사람이 100여인 되었다고 한 것 역시 당시 군산도에 상당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고려시기 선유도에는 상당한 규모의 시설이 있었고 또 그를 관리하고 지원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군산도에 이러한 시설을 설치하고 인원을 배치한 것은 단순히 몇 년에 한번 올까 말까하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산도가 군사적으로나 교통로상으로나 고려시기 서해 바닷길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서긍 일행은 돌아갈 때 풍랑으로 군산도에서 14일 정박하였으며, 이후 죽도를 지나 흑산도 가까이 갔다가 다시 풍랑을 만나자 군산도로 돌아와 다시 6일을 정박하였다. 이것은 군산도에 이들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도 선유도 해안 갯벌에서 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곳에서 청자 조각 뿐 아니라 적지만 백자조각도 발견되는 것은 조선시기 이후에도 군산도에는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고려말 이후 왜구의 침탈 대상으로 군산도가 자주 등장하는 것 역시 이곳이 서해 바닷길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산도에는 조선 건국이후에도 수군기지가 설치되었으며, 지금 선유도에는 조선말기인 순조 고종 때의 절제사 선정비(불망비) 5기가 남아있다.


<사진 8> 선유도의 절제사비 (@박종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