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역동,화려의 고려사] 고려사람들이 백두산을 숭배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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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람들이 백두산을 숭배한 이유는?


송용덕(중세사 1분과)


  백두산은 불함산, 개마대산, 도태산, 종태산, 태백산, 장백산 등 여러 다른 명칭으로도 알려져왔다.

그런데 개마산이나 태백산이라는 산악 명칭은 고려시대나 조선전기 무렵에는 백두산과는 다른 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관련 기록을 보다 엄밀히 살펴보면 불함산, 개마대산, 도태산, 종태산, 태백산, 장백산 등을 모두 백두산을 지칭하는 또다른 명칭으로 통합하여 생각하기 시작한 흔적은 조선후기 이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백두산이라는 말 자체가 역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991년(성종 10) 무렵이다. 고려 사람들은 이미 백두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1131년(인종 9)에는 묘청이라는 승려가 서경(지금 평양)에 여덞명의 신을 모시는 팔성당이라는 건물을 지은 일이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여덜명의 신 가운데 첫 번째 성인의 이름이 백두산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성인은 호국백두악태백선인실덕문수사리보살(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존재로 정확히 그 정체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명칭을 자세히 보면 산악숭배사상, 불교사상이 습합된 존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긴 이름 가운데 백두악(白頭嶽)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고려시대 평양지역에는 백두산과 관련된 산악숭배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장성축조 이전 고려가 축조한 주진성 지역도

당시 고려가 변경지역에 축조한 성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백두산은 고려 변경밖에 위치하였다. 그렇다면 왜 고려사람들은 자신의 영역밖에 위치한 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숭배까지 하였을까?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 국경을 연상해보면 휴전선이나 압록강, 두만강변에 놓여진 철책이 생각날 것이다. 아니면 세계지도에 줄줄이 그어져 있는 국경선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지리적 측량이 가능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우리의 땅과 저들의 땅을 지도에 선을 그리듯이 땅에 선을 그어 구분하였을까?

  고려 시대의 국경지역 인식을 살펴보면 고려 사람들의 영역인식은 지금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달랐다. 주성(州城), 진성(鎭城)과 같이 고려의 힘이 직접 관철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고려의 정치력이 간접적으로 미치는 지역까지도 고려의 영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의 변경지역에는 고려의 영향을 받는 여진 촌락들이 흩어져 있었고 아울러 발해유민, 거란인, 여진인이 대규모로 고려로 투항해 와 고려인과 섞여 살고 있었다.

고려는 이 지역을 투화촌(投化村) 또는 기미주(羈縻州)로 묶어 두면서 고려 왕실의 교화를 받는 지역[화내(化內) 지역]으로 생각하였고 이 지역도 고려의 영역이라 생각하였다.

나아가 고려는 요하 이동지역을 고려가 나름대로 구축한 천하에 속한다고 생각하였다. 고려인들의 영역관념은 지리적으로 명확히 구획되는 단절적 관념이 아니라 지배 강도에 따라 구성된 중층적 지역 관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사람들은 직접 통치권 밖에 위치한 백두산을 중시할 수 있었다.

(그림 2)  장성 너머의 투화촌, 기미주도 중요한 고려의 변경지역이었다.

  또한 당시에 유행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백두산은 새롭게 부각될 수 있었다. 백두산은 한반도 여러산의 근원이 되는 산 또는 산줄기 흐름의 시발점이 되는 산으로 인식되었다.

이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이후 백두산은 조종산(祖宗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종산 관념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어 조선시대에 작성된 각종 고지도에 백두산은 특별하게 표기되었다.


(그림 3)  풍수적 인식의 확산은 백두산을 조종산으로 생각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림 4)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에는 백두산이 다른 산과 다르게 크게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풍수적 인식 확산과정과 더불어 산악숭배 전통이 습합되면서 백두산도 중요한 숭배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묘청 반란 이후 팔성당은 종적을 감추었고 백두산 숭배의 흔적도 기록상 사라졌다.

이후 조선초기 기록에서 백두산 제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414년(태종 14) 조선 조정은 등급이 없었던 고려시대 산천제의 등급을 나누었는데, 이 때 백두산을 ‘옛날대로’ 지역 지방관이 제사를 지내는 제사처로 분류하였다.

1414년의 옛날이라 하면 고려 후기 어떤 시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고려후기 언제쯤부터 영흥지역에서 백두산 제사를 지냈을까?

  영흥지역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총관부를 공취하면서 회복한 지역이다. 이어 고려는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갑산지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되자 고려의 땅은 북으로 백두산에 다다른다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토착세력이나 여진세력이 독자적 기반을 구축하여 상당기간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이었다. 영흥지역의 백두산 제사도 이들 지방세력이 중심이 되어 시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금나라 때 시행된 장백산 치제의 남겨진 풍습이 쌍성총관부 지역에 산거한 여진인들에게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흥지역의 백두산 제사는 지역 지방관이 행하는 제사의 형식으로 유지되다가 1437년(세종 19) 시행된 예제정비에 의해 결국 국가의 공적인 제사에서 제외되었다.

세종대 조선은 적극적으로 북방지역에 진출하여 압록강 중상류 지역이나 두만강 하류지역을 확보하였으나 백두산 주변지역에 진출한 지역거점은 갑산군, 혜산구자, 무산보 지점에 불과하였다.

국경선 관념이 지리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시기에 대규모 인구가 실질적으로 정주할 수 없었던 지역을 경내로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두산은 조선의 경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전(祀典)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백두산 제사가 사전에서 제외된 이유는 조선의 각종 국가의례가 제후국 제도에 준하여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제후는 경내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낸다는 이념이 조선전기에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이 일반화되는 데에는 대명관계의 추이도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명나라의 홍무제는 건국 직후부터 국가의례를 정비하면서 주변국에게도 새로이 정비된 의례를 적용하였다.

홍무제의 산천제 정비성과는 직간접적으로 조선의 산천제 정비과정에 영향을 주었다. 결국 세종대 백두산 제사는 폐지되고 대신 정평의 비백산(鼻白山)이 북방지역의 주요한 제사처가 되었다.

비록 세조대 양성지가 장백산을 북악(北嶽)으로 설정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양성지의 사전 개혁안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백두산 주변지역은 조선후기까지 경계가 획정되지 못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백두산정계비 건립을 기점으로 경계획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후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1767년(영조 43)에 백두산은 다시 나라의 제사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