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룡사와 남도의 가을

0
337

창녕 관룡사와 남도의 가을
— 해발 750여 미터 낭떠러지의 석조여래좌상과 화왕산 억새풀

                                                         장 영 숙(근대1분과)

답사모 출범

휴일이 아닌 평일에, 그것도 한 주를 새로 시작하는 월요일 느지막이 답사를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첫 등판(?)에 올랐다. 정말이지 한역연 답사모(답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성황리에 꾸려져 한달에 한 번 정도라도 전국 요소요소를 찾아다닐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먼 산 속, 역사의 때 묻은 사찰과 악수하고 얼굴 형상 각기 다른 석불의 미소 속에 묻혀진 이야기들을 찾아 나서는 즐거움이 어디인가?! 하일식 선생님, 조경철 선생님, 하 선생님의 제자 최경선 양, 그리고 나. 정말 조촐한 답사모 멤버였지만 새로운 출발점으로서 그 자체는 뜻 깊다 할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를 판독하다

23일 월요일 오후 3시. 일행 중 아무도 늦은 사람이 없어 정확히 3시 7분에 연세대 정문을 빠져 나와 중부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경남 창녕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중부고속도로를 얼마간 달리다 호법 IC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여주에서 다시 중부를 타다가 김천에서 경부로,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탄 후 창녕 IC로 진입할 수 있었다. 창녕 IC를 빠져 나온 시각이 7시 8분이었으니까 정확히 4시간 1분 걸린 셈이다. 평일을 택한 덕을 톡톡히 보았으니 창녕이 굳이 멀리 있다 할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해질녘 노을과 비온 뒤 헤어지기 서러워하는 구름다발을 감상하며 달린 거칠 것 없는 드라이브는 복잡한 도시의 곡예운전에 비할게 아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배도 고팠다. 진흥왕 순수비가 안치되어 있다는 만옥정 공원 옆에 차를 세우고 근처 음식점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곁들인 맛난 저녁을 들었다. 식사 후 찾은 공원 한 켠에 순수비가 있었다. 국보 제33호로 지정된 것이지만 보호각만 있고 보호막은 없어 사면이 휑하다. 국보를 이리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 가뜩이나 삼분지 일 가량의 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데 이리 되면 지금 선명하여 읽을 수 있는 글자마저 풍상에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잠시. 네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울타리를 타고 넘어가 손바닥으로 비석을 헤집어가며 글자 퍼즐 맞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함께 간 최양은 마침 순수비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이라 한다. 미리 준비해 온 비문 복사본과 실물을 비교하는 최양의 열성이 아름답다. 옆에서 제자를 위해 한참동안 불을 밝히고 서 계신 하선생님의 넉넉한 사랑도…..
공원 안에는 창녕 객사와 척화비도 있었다. 특히 신미양요 후 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세웠다는 척화비를 창녕에서 마주한 것은 근대사를 전공하는 내겐 커다란 수확이었다.

벼랑 위 용선대 석조여래상

  이튿날 아침 6시 30분 모텔 라운지에서 네 사람은 다시 합류했다. 화왕산 한가운데, 해발 750여 미터 높이에 놓여 있는 석조여래상은 수차례 촬영하였지만 산 능선 위 구름을 타고 앉은 듯한 석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이곳을 다시 찾은 하선생님이셨다. 그러다보니 선생님을 위해 입산시간을 일찍 정했던 것이다. 새벽 1시까지 가벼운 캔 맥주 2〜3개를 비우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터라 네 사람 모두 절대적으로 수면시간이 부족하였다. 게다가 석불이 앉아있는 높이까지 산길을 오르는 데에는 흙 반 돌 반의 길이어서 잠시라도 넋을 놓으면 삐끗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산행에 숙달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앞 동네 조깅하듯 가볍게 올라간다. 폼이 안 나더라도 등산화를 신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붙지만 영 꼴찌를 못 면한다.
화왕산은 꽃 화(花)자가 아닌 불 화(火)자를 쓴다. 봄에는 진달래가 산 가득 피어 마치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여서인지, 정월대보름날 산 정상에서 짚단 태우기와 억새 태우는 행사를 통해 유래한 이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석불이 보이는 정상까지 올라서니 먼 능선 사이로 화왕산성이 언뜻언뜻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산성을 의지해 왜군을 물리쳤던 역사의 현장이라 하던가. 화왕산은 석불과 관룡사가 있는 동쪽의 관룡산과 그 옆의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이지만 산 능선은 참으로 부드럽다. 해뜨기 전 짙푸르게 굽이져 누워있는 산 능선은 두렵기보다 안온함을 안겨준다.
해가 부끄러운 듯 드디어 조금씩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있는 맞은편 절벽 위 석조여래좌상의 큰 몸체가 정면에서 떠오르는 신새벽의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난다. 우리의 전문 사진가는 노출 값 얼마에 색을 어떻게 보정한다는 등 알아듣지도 못하는 용어를 써가며 연방 셔터를 눌러댄다. 전체 높이 2.98m, 불신 높이 1.81m, 대좌 높이 1,17m의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화면 가득 넘쳐난다. 눈은 감은 듯 뜬 듯, 얼굴 가득 미소가 퍼지는 듯 무념무상인 듯 오묘한 여래상이다. 불상 뒷부분까지의 옷 주름과 하좌 둘레를 따라 새겨진 연화무늬의 조각이 선명하다. 해발 750여 미터 높이까지 저리도 큰 불상을 어떻게 만들어 옮겨 놓았을까? 하선생님 설명으로는 불상과 불상이 놓여있는 바위가 서로 자연스럽게 연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애초에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든 거라고 하신다. 아! 옛 조상들의 웅혼한 예술혼이여! 신실한 불심이여!

<사진 1> 막 떠오르는 동녘의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는 석조여래상. 여래상의 시선 너머 보이는 산능선이 평온하다.


<사진 2> 언뜻언뜻 보이는 화왕산성의 모습.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이 산성을 의지해 왜군과 대항한 적이 있다.

옛날 단청 그대로인 관룡사 약사전

두 시간 가까이 같은 장소에서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투혼을 불사르던 하선생님이 드디어 관룡사 경내를 둘러보자며 하산을 결정하였다. 그리도 찍고 싶어 하시던 구름 위에 앉은 석가여래상 촬영은 해맑은 날씨 탓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어쩌랴. 날씨가 기대 이상으로 좋아버린 걸. 석조여래좌상은 관룡사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고 해가 막 떠오를 때 촬영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대웅전과 기타 절 건축물 답사는 잠시 뒤로 미뤄둔 터였다.
관룡사 경내는 이른 아침이라 방문객이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스님 한 분이 호수로 물을 뿌리며 경내를 청소하시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계셨다. 녹음기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는 1401년 초창된 절의 역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대웅전마저 1965년에 해체 복원된 것이었기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사찰에서 오는 중량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대웅전 맞은 편 圓音閣에 1704년(숙종 30) 산사태로 부서진 절을 1763년(영조 39) 크게 중건하였다고 전하는 사적기를 통해 절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대웅전에 대한 실망은 곧 새로운 기쁨으로 이어졌다. 대웅전 옆에 아담하게 세워진 약사전이 옛 모습 그대로의 단청을 지닌 채 단아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약사전 안에는 약사불로 지칭되는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사여래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약합(藥盒)은 들고 있지 않아 불상이 위치한 건물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 까닭인즉 약사전은 15세기 건물로 추정하나 여래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다른 곳에 있던 불상을 후대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불상 뒤에 마땅히 있어야 할 광배가 없어진 점이라든지, 약사전 안에 옹색하게 앉혀져 있는 모습 등은 이 불상의 원 위치가 이곳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수인도 석가모니가 연화대좌에 앉아 마귀를 제압했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참선의 경지에 들어간 선정인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90년대 중반에 발견되어 보고된, 대좌(臺座)의 중대석(中臺石) 안상(眼象)에 새겨진 조성기(造成記)에는 772년에 만든 미륵상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다만, 이 중대석과 석불이 한짝인지를 확정짓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남는다. 중대석과 하대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이지만, 상대석은 후대에 만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석조여래좌상이 그 성격에 맞는 자리를 찾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행히 절 이 곳 저 곳에서는 화려한 불사를 일으키려는 듯 시주자의 이름이 적힌 기와가 담벼락 높이까지 쌓여 있다. 다음에 올 때는 어쩌면 석조여래좌상이 약사전을 떠나 그 이름과도 어울리는 건물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3> 관룡사 약사전의 측면 모습. 오랜 절의 역사만큼이나 낡은 빛을 발하는 벽화.


<사진 4> 약사전 안에 존치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 약사전 안에 있어  약사여래불로 불리우나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약사전의  명칭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좌의 상대석은 후대의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관룡사를 내려오는 길에 흔히 요승이라 불리어지는 신돈의 어머니가 한때 노비로 있었다는 옥천사지를 둘러보기도 하였다. 사찰 건물의 일부인 듯한, 연화무늬가 새겨진 석재들이 이리저리 깨어져 뒹굴고 있었다. 이는 절의 건물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러진 것이 아니라 필경 누군가의 의도된 힘에 의해 파괴된 흔적으로 보였다. 그간의 곡절을 알리는 없지만 역사의 뒤바뀜이 이리도 현란한 것인가 하는 생각에 발길이 멎은 곳이었다.

<사진 5> 옥천사 터의 석축(좌) / 석축 위에 뒹구는 석재(우)

  예상하지 못했던 영산면 구계리의 유적, 유물들

새벽 일찍 답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저축된 시간이 많았다. 시내답사는 오후로 미루고 지금은 창녕군에 속해 있으나 한 때 분리된 행정구역이었던 영산 일대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이곳에서도 영산면 구계리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한 볼거리가 많이 있었다. 구계리의 석불은 영취산 寂照寺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외에 왜,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불상은 광배와 함께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이 맞지 않아 세련미는 크게 떨어진다. 이를 이름하여 지방적 특성이라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안내판에서는 불상의 제작 시기를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한 가지 독특한 부분은 얼굴에 비해 코가 상징적으로 크게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시대 강고하였던 남아선호사상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코가 더 마모되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석불의 비대칭적이고 부조화적인 모습을 감상하였다.


<사진 6> 영산면 구계리의 석조여래좌상. 불상은 광배와 함께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고 얼굴 가운데서도 특히 코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인 균형감각이 떨어지는 편으로, 안내판에서는 고려시대 것이라 했으나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훨씬 후대 것일 수도 있으리라.

답사는 아주 오래 전 과거와의 소통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바꾸게 한 유물을 이곳 구계리에서 만나게 된 건 소중한 체험이었다. 바로 일제시대 모습을 알려주는 비석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비석은 구계리의 林道 개통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昭和 14년(1939) 큰 가뭄이 발생하여 이재민이 속출하자 당시 면장이 창녕군수에게 청원을 하고 군수는 도지사였던 山澤和三郞의 재가를 얻어 국민정신총동원 구계리 연맹을 주축으로 林道를 닦았다는 것이다. 1만3천여 원의 공사금과 연맹 성원 1만여 명의 협력으로 임도가 생겨 구계부락민의 편의와 임산물 유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일제 치하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연맹이라고 하는 것이 전국 방방곡곡 조직되어 마을을 조종하고 통제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비문 가운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자애로운 어버이 같은 마음의 총독각하가 구제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일본은 그들의 통치방식을 조선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제와 은근슬쩍 접목시키려 했었던 모양이다.


<사진 7> 구계리 임도개통기념탑. 일제 치하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주축이 되어 1939년의 大旱災를 이겨냈다는 기념비. 그 공을 어버이같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부락민들을 돌봐준 총독각하께 돌리고 있다.


<사진 8> 구계리 林道. 요즘 표현으로 치면 일종의 ‘취로사업’과 같은 차원에서 건설한 임도이다.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라는 것이, 일제 말기 먼 산골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엄밀한>조직이었음을 실감케 한다.

규모도 수효도 엄청난 교동 고분군

영산면 구계리에서 창녕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통일신라시기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유적지와 유물을 보기 위해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호국의 격전지였다는 남산호국공원을 지나 교동의 고분군을 둘러본 때는 점심식사를 막 하기 직전이었다. 교동 박물관 옆에 흩어져 있는 70기, 80기에 이르는 서쪽과 동쪽의 어마어마한 고분군은 가야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이 있는 자리는 조금 높은 언덕배기 평지로서 위에 올라서면 창녕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고분의 주인공을 이리도 경관 좋은 장소에 앉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경비가 들었을까?


<사진 9> 교동 고분군. 고분 앞의 표지석으로 고분의 크기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저 무덤의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군데군데 고분 숲을 장식하고 있는 이름모를 나무들 한 켠에는 창녕에서 그 유명하다는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사실 억새밭은 산 능선을 끼고 축조된 화왕산성 주변에 밀집되어 있어 가을이면 아주 멋진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니 고분군 옆에서 우연히 마주친 억새는 산성 주변의 광활한 억새밭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사계절 모두 각각의 매력을 지닌 곳이 이곳 창녕이 아닌가 싶다. 관룡사를 내려오는 길섶에는 제법 큰 폭의 계곡이 흘러내린 자취가 있었고 여름에 사용되었음직한 널찍한 평상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오후 3시경 한창 공사 중인 창녕 향교를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하며 올라오는 차안에서 생각해 본다. 훗날 다시 이곳에 들러 화왕산 정상에 오르는 길에 펼쳐지는 억새밭 장관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인가? 문득 용선대 석조여래좌상과 관룡사 경내만 감상하고 애둘러 내려온 것이 후회가 된다. 산성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 볼 것을…허나 그러기엔 1박2일의 일정이 너무 버겁다. 산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만 꼬박 4시간여 이상이 걸린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이번 답사는 관룡사와 고분군 외에도 창녕 시내와 인접한 면리지역을 돌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와 유물을 본 데에 뜻깊은 의미를 새겨야겠다. 화왕산성의 억새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사진 10> 명륜당 대청마루. 대한민국의 국기 아래 무거운 필체로 눌러 쓴 ‘忠’이란 글자. 옷걸이와 벽면의 선풍기로 보아 현재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사진 11> 명륜당 대청마루. 우리에게 ‘忠’과 ‘孝’보다 더 아름답게 지켜야 할 가치가 어디 있는가를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저 글자. 그리고 저 육중한 서체. 그러나 퇴색해 가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