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환인·집안답사기④] 고구려 유적지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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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홍(고대사분과)

 

달밤의 압록강변 산책을 마치고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육해공을 망라하는 요리와 100여석이 넘는 좌석을 완비하고 야외 테라스까지 겸비한 집안의 핫플레이스였다. 그 일대에서 가장 많은 현지 젊은이들이 들어앉아 있었던 데다가, 카운터까지 가서 주문을 해야 하는 고객 불편 시스템으로 봤을 때 핫플레이스가 분명했다. 이 핫플레이스 유경험자인 답사대장이 능숙하게 주문한 요리들은 원탁에 올려지기 무섭게 비워졌고, 동시에 술병도 쌓이기 시작했다.
거나하게 먹고 마신 후, 소화도 시킬 겸 술도 깰 겸 호기롭게 숙소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집안시내 손바닥만 해서 걸어서 다 갈 수 있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누구는 “아!이런!” 핫플레이스에 두고 온 옷이 생각나 질주를 하는가 하면, 누구는 들이킨 맥주 탓에 화장실이 급하다며 빛의 속도로 사라지기도 했다. 우리 숙소는 국내성 두 개의 동문 중 남쪽 문으로부터 동으로 광개토왕비에 이르기까지 길게 뻗은, 고구려 이래의 대로였을 鴨江路에 있었다.
그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후, 아침 8시 10분. 출근으로 분주한 집안 시내를 통과해 지난 밤의 사교댄스장에서 맑은 아침의 태극권 도장으로 바뀐 고구려유지공원에 도착했다. 이 공원의 이름은 궁궐터로 추정되기도 하는 대형건물지를 비롯한 몇 개의 고구려건물 유지들이 발굴된 데서 유래하였다. 이른 아침 이곳 사람들이 이 공원을 가로지르며 바삐 출근하는 모습을 보자니, 이 사람들에게 고구려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했다. 이곳의 고구려는 경주의 신라만큼이나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국내성 대형건물지

국내성 대형건물지2

[사진1] 국내성 대형건물지 사진 ⓒ권순홍

8시 20분. 다시 차로 국내성 북벽을 통과 후 우산 옆으로 통구하를 건너 만보정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국내성은 참 작다. 둘레가 3km 정도이니 한 변의 길이가 채 1km가 안 되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20세기 초 일본인연구자들은 국내성을 王宮으로 보면서 고구려 도성에는 이른바 羅城이 없었던 것으로 보기도 했는데, 현재 우리학계는 국내성을 산성자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으로 봄으로써 내성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쪽이 설득력이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다만 중국식 도성 개념을 잣대로 고구려의 초기도성을 재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국내성

[사진2] 국내성  ⓒ권순홍

8시 28분. 만보정에 도착했다. 이곳은 지금까지 봐왔던 고분군 중 가장 관리가 안 되어 있었다. 흙더미인지 돌더미인지 고분인지 쓰레기더미인지, 고분들이 마을에 구분 없이 산재해 있거나 칠성산의 동쪽 자락 밭과 혼재해 있다. 큰 고분은 10m이상의 것도 있지만, 와편은 보이지 않는다. 평지에는 기단이 있는 경우도 눈에 띈다. 지근에 있는 산성하 고분군과는 규모나 형태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장자의 신분 혹은 조성시기에 따른 차이일 것이리라. 칠성산 동쪽 자락 중턱에 위치한 고분 위에 올라 국내성을 내려다 보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누군가 외쳤다. “꽉 찼네! 꽉 찼어!” 듣고 보니, 집안 분지에 남은 공간은 없어 보였다. 중심지를 제외한 모든 분지 내의 평지는 고분군으로 가득 찼다. 포화상태라 할만 했다. 지금이야 산 깎아 오르고 물 건너 넓히지만, 5세기경 고구려는 집안 분지라는 이 꽉 끼는 옷을 평양이라는 넉넉한 옷으로 갈아입은 건 아닐까.

만보정 (1)

만보정 (3)만보정 (2)

[사진3] 만보정 ⓒ권순홍

9시 45분. 차로 10분가량 이동해서 우산공원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산을 약 5분 오르니 중턱에 고분 하나가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산 3319호분이다. 한인관리 묘라는데,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겉으론 일반 적석총과 다름없지만, 내부가 전실이라고 한다. “그래요?” 고분에 올라가면 뭔가 보일까 싶어, 가볍게 울타리를 넘어 오르려는데 헉! 뱀 몇 마리가 기단 위 수풀에서 사사삭 움직인다. “어우~ 안 되겠다” 바로 포기. 그 곁에는 ‘고구려인상석각’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상이 웃고 있다. “너 나 비웃냐”

우산 3319호 (1)우산 3319호 (2)
우산 3319호 (3)

[사진4] 우산3319호분 ⓒ권순홍

다음 목적지는 집안에서의 마지막 답사지인 무용총과 각저총이었다. 그런데 예의 고구려 수신이 보내기 아쉬우셨는지 못 찾고 한참을 헤매게 하셨다. 10시 5분. 우산공원을 출발하여 40분 만인 10시 45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에 잘못 나온 것인지, 지도대로 찾아가도 그 위치엔 우리가 찾는 고분이 있지 않았다. “여기 어디인 것 같은데~ 저기 저 사람한테 물어 봅시다” 마침 어제 다녀간 오회묘의 관리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위치를 알겠다싶어 현지가이드가 출동했다. 그런데 웬걸 가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돌아왔다. “안 알려줍니다. 도리어 뭐라고 하네요. 중국인이 왜 한국인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데 찾느냐고.” 저기서 몇 사람이 모여 우리에게 눈총을 쏘고 있더라니.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신세가 따로 없었다. 이때 옆에서 “찾았다!” 소리쳤다. 우리에겐 구글이 있지롱.
무용총과 각저총은 남북으로 쌍둥이처럼 나란히 있다. 물론 들어갈 순 없었다. 석실 입구는 서쪽에 나 있는데, 그러고 보니 장군총, 태왕릉, 무용총, 각저총 등의 석실은 모두 서쪽이었다. 단순한 우연일까.

무용총

각저총

[사진5] 무용총(상), 각저총(하) ⓒ권순홍

 

11시 52분. 이른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이제 집안을 뒤로 하고 심양으로 향했다. 지난 답사기에서 언급했듯이, 오늘 날 집안에서 심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통화를 거치는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최단코스이다. 50여분을 달려, 13시 45분 경 통화 인근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별도의 답사 계획이 있진 않았지만, 귀국 전에 발 마사지 한 번 받자는 여론에 힘입어 고속도로 휴게소 들른단 생각으로 통화에서 정차했다. 1시간 반짜리, 꽤나 긴 코스의 마사지를 받고 다시 버스에 오르니, 노곤노곤 잠이 쏟아졌다.
15시 35분 통화 출발 후, 기울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버스에 앉아 헤드뱅잉을 하다, 제 풀에 놀라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신빈과 영릉을 지나고 있었다. 시간은 17시. 애초의 답사기획 때는 코스에 이곳 신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은 제2현도군의 치소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될 뿐만 아니라, 4세기 고구려-전연의 전쟁 시 등장하는 남·북도의 분기점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관련 유적을 찾기 쉽지 않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듣고 답사 코스에서는 제외했지만, 이렇게 창밖으로만 보자니 아쉽긴 했다.
다시 40여분을 달리니, 남가목에 다다랐다. 이곳 역시 신빈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주요 교통로 상에 있던 곳이다. 소자하와 혼하가 만나는 지점인데, 오히려 이곳을 남·북도의 분기점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여하 간에 남가목과 신빈은 공히 고구려의 주요 교통로 상에 있던 요충지였고, 그런 이유로 신빈서부터 이곳까지는 달리는 내내 좌우를 두리번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덧 18시가 다 되어, 해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 교통의 요지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1500년 전엔 요충지이니만큼 방어시설 등이 밀집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밀레가 <만종>에서 표현한 석양 드리운 평야가 이곳에도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아! 이 타이밍엔 맥주 한잔이 딱 인데!’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 식당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한 시간. 버스는 비로소 심양에 입성하였다. 이제 답사도 마무리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