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3성 답사기③] 고량주는 아무리 마셔도 아침에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말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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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3성 답사기#3]

고량주는 아무리 마셔도

아침에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승호(고대사분과)

 

 


[그림 1]  6박 7일의 답사 일정과 답사코스 원(O) 안의 번호는 답사 날짜 유적 위성 사진  ⓒ구글지도(http://www.google.co.kr/maps)

답사 3일차 : 집안 일대 답사(③)

③번 경로 : 국내성 → 서대묘(西大墓) → 천추총(千秋塚) → 집안고구려비 발견지역(마선천) → 칠성산(七星山) 211호분 → 집안박물관(集安博物館) → 광개토왕릉비 → 태왕릉(太王陵) → 임강총(臨江塚)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밤 꼬치구이에 들이킨 고량주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우리는 숙취에서 벗어날 겸 아침 식사 전에 숙소 앞 국내성 성벽 길을 거닐며 압록강변까지 산책을 하기로 했다. 국내성 성벽 부근에 위치한 아침시장의 분주한 풍경에 절로 기분이 들뜬다. 시장에서 산 약간의 과일을 손에 쥐고 성벽 답사를 시작했다. 성벽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힘일 것이다. 성 중앙에는 ‘국내성 유적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약간의 건물지가 보존되어 있다.


[사진1] 국내성 성벽(상)과 내부 건물지 전경(하) ⓒ이승호

   국내성 유적을 둘러본 다음 압록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변에는 제법 분위기 있는 카페도 보였다. 내부 인테리어로 보아 최근에 생긴 카페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 산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압록강 풍경을 감상했다. 강 건너편 북한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기분이란, 참 묘했다. 우리는 가져온 망원경을 통해 강 건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신기해했다. 우스운 일이다. 

   참, 강변에서 마신 커피 맛은 의외로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런 변경 시골에까지 저렇게 세련된 카페가 자리했다는 것은 중국의 13억 인구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곧 머지않아 세계 커피 원두의 가격이 요동칠 것이 걱정되었다. 앞으로 많이 마셔두자.


[사진2] 압록강, 그리고 강 건너 사람이 사는 곳 북한 ⓒ이승호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마친 후 (언제쯤이나 샹차이 맛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마선구(麻線溝) 고분군으로 향했다. 마선구 고분군에는 전날 답사한 마선구 2100호분과 함께 서대묘(西大墓), 천추총(千秋塚) 등 왕릉급 대형 고분이 다수 위치해 있다. 우리는 우선 서대묘로 향했다. 이른 시간인지라 인적이 드문 서대묘에서 우리는 마음껏 유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본 서대묘는 이름 그대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사진3]
서대묘(西大墓) 전경 ⓒ이승호


[사진4]서대묘(西大墓) 계단 흔적(상)과 붕괴된 중앙 매장부 모습(하) ⓒ이승호

 

  현재 무덤의 가운데 부분은 완전히 파헤쳐져 둘러 갈라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두 개의 무덤처럼 생각될 모습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무덤 주위에 계단의 흔적도 일부 확인된다. 무덤 위로 올라가 보면 마치 굴삭기로 무덤의 가운데 부분을 파낸 듯이 중앙 매장부가 움푹 패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붕괴된 (이것을 ‘붕괴’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흔적을 단서로 이 무덤을 서천왕릉이나 미천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후대 왕들이 파헤쳐진 선대 왕의 묘를 훼손된 그대로 두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혹은 이 무덤을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무덤의 훼손 상태와 별개로 무덤의 입지 조건 면에서 보아 미천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천추총(千秋塚)이었다. 천추총은 서대묘와 달리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즉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가 답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유적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 유적이 개방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관리인이 보였다. 손을 흔들며 맞는 우리에게 관리인은 인상 좋은 웃음을 지어주며 능숙하게 자물쇠를 풀었다. 문이 열리자 거대한 천추총의 전경이 우리를 압도했다. 천추총 또한 서대묘 못지않게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진5] 천추총(千秋塚) 전경 ⓒ이승호

  잘 알려져 있듯이 이곳에서는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무덤 위에서 발견되었고, 때문에 무덤의 이름도 천추총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천추총 또한 다른 왕릉급 무덤과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 바 있는데, 미천왕ㆍ고국원왕ㆍ소수림왕ㆍ고국양왕 등 4세기 고구려를 통치한 대부분의 왕들이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처음 천추총을 발굴할 당시 무덤의 양식이나 묘역 시설이 태왕릉과 매우 유사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태왕릉을 고국원왕릉에 비정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천추총은 소수림왕의 사후처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사진6] 천추총(千秋塚) 근경과 제대(祭臺) 추정 유구 ⓒ이승호

  어쨌든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굳건하기를 염원했던 당대인의 바람과는 달리 무덤은 이미 그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무덤 곳곳이 무너져 내려 그 지나온 세월이 녹록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무덤 뒤편으로 돌아가면 5단의 계단 흔적과 무덤을 바치는 호석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규모로 보아 본래 무덤은 대략 8단 이상의 계단으로 조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덤을 받치고 있는 호석의 크기도 3m가 넘어 보였다. 무덤 한 편에는 제대(祭臺) 유구 혹은 모종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사진7] 마선천(麻線川)을 건너는 다리 마선교(麻線橋) 천추총 관리인과 현지 주민들에게 집안고구려비 발견 위치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승호

  천추총을 답사하고 나서 우리는 그 인상 좋은 관리인에게 혹시 집안고구려비의 출토 위치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관리인은 집안고구려비의 발굴 당시 자신도 그 과정을 구경한 적 있노라고 말하며 타고 온 자전거에 올라 호기롭게 앞장을 섰다. 그렇게 집안시 서편을 흐르는 마선천(麻線川)에 도착한 우리는 관리인의 세심한 안내에 따라 마선교(麻線橋)에 올라 비석의 발견 지점과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8] 마선교(麻線橋)에서 바라본 집안고구려비 출토 위치(상)와 집안 고구려비 출토 지점에서 바라본 마선교(하) ⓒ이승호

  관리인과 현지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강물이 흐르는 방향을 기준으로 강기슭 오른편(위 사진의 왼편)에 흙으로 쌓은 방벽이 있는데, 그 방벽 위에서 집안고구려비가 굴러 떨어져 강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비석이 왜 하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비석이 발견된 지점뿐만 아니라 본래 비석이 있었던 자리라 여겨지는 강기슭 위쪽의 그 ‘방벽’이라는 곳도 본래 집안고구려비가 세워졌을 자리로 보이지는 않았다. 추후 더 고민을 해보아야할 문제이다.


[사진9] 칠성산(七星山) 211호분 전경 ⓒ이승호


집안고구려비 발견 지점에 대한 확인을 마친 후 우리가 찾은 다음 유적지는 칠성산(七星山) 211호분이었다. 이곳 또한 무덤 주변에 차단 시설이 조성되어 있어 유적 경내 안으로 진입을 하려면 관리인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이윽고 관리인이 다리가 좋지 않아 대신 왔노라고 얘기하는 같은 마을의 이웃 주민이 유적의 경내로 들어가는 문을 개방해 주었다.

 

  이 무덤은 칠성산 고분군의 여러 무덤들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왕릉급 무덤으로서 서대묘의 경우와 같이 중앙의 매장부가 파헤쳐져 훼손되어 있었다.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모용외(慕容廆) 군대에 의해 파헤쳐진 서천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계단 축조 방법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3세기 말 이전에 조성된 것이라 하니 위와 같은 비정이 타당할 수도 있겠으나, 역시 앞서 서대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후대 왕들이 파헤쳐진 선대 왕의 묘를 훼손된 그대로 두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무덤 뒤쪽(북쪽 방향)에는 제대(祭臺) 유구로 추정되는 터가 거칠게 남아 있다.


[사진10] 칠성산(七星山) 211호분의 붕괴된 중앙 매장부 모습(상)과 제대(祭臺) 추정 유구(하) ⓒ이승호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작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칠성산 211호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나오자 뒤늦게 우리를 찾아온 칠성산 211호분 관리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관리인의 얘기인즉슨 집안시 일대의 여러 고분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집안박물관의 허가를 받고 그곳에서 관람료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 박물관 측에서 각 유적지의 관리인에게 연락을 취해 유적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무작정 유적지를 답사하며 유적지의 문이 잠겨 있으면 관리인에게 일일이 전화를 넣어 문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관리인의 입장에서는 황당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며 관리인의 호의에 감사해했다. 그렇게 칠성산 211호분에 대한 답사를 끝으로 집안시 서쪽 방면에 대한 예정된 답사 유적을 모두 돌아본 우리는 집안박물관(集安博物館)으로 향했다.


[사진11] 집안박물관(集安博物館) 외부 전경 ⓒ이승호


2009년에 신축된 집안박물관은 현재 고구려 관련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어 과연 고구려 유물의 보고라 할만 했다. 물론 박물관에서의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가방 검사는 기본이었으며 개인이 소지한 영상장비는 핸드폰까지 모두 입장 전 안내 데스크에 맡겨 놓고서야 입장이 가능했다. 필자의 경우 여러 전시 유물에도 관심을 두었지만 그보다 근래에 발견된 집안고구려비에 대한 관람을 특히나 고대하고 있었다. “우수한 문화를 자랑했던 중국의 지방정권 고구려”라는 논리에 충실한 박물관의 의도와 별개로 박물관의 구성이나 전시 수준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거닐며 전시 유물을 관람한 우리는 드디어 집안고구려비를 실견할 수 있었다. 듣던 대로 비석은 사방 1m 남짓 거리를 두고 바리게이트가 둘러진 가운데 높은 단상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 “와! 비석이다”할 정도의 감상평이 가능할 뿐 유리관 안에 가두어 놓은 비석을 멀리서 육안으로만 글자를 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이미 한국에서부터 성능 좋은 망원경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우리들만의 비장의 무기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한 시간가량을 쓰라린 눈을 비비며 망원경으로 비석을 관찰했다. 특히 비석 7행의 4~7번째 글자를 “丁卯年刊石”으로 읽는 것에 일행 전원이 동의했던 기억이 난다. 한편 비면 뒷면에도 자흔이 확인된다고 하는데, 현장에서 실견한 결과 확단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학계에서 논의된 기왕의 여러 판독안하고 달리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몇몇 있어보였지만, 망원경을 눈에 대고 한 시간 가량을 쳐다보니 현기증이 심해져 더 이상의 관찰은 단념해야만 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 글자는 이 글자였어!”라고 외쳐도 뭐 이를 증명할 방도가 없으니 그저 고민만 더 깊어진 시간이었다.


[사진12] 광개토왕릉비 전경 ⓒ이승호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밖은 또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니 잠시 내리고 말 비는 아니었다. 그렇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다음 유적지로 향했다. 이제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을 돌아볼 차례였다. 또다시 엄청난 속도로 빗길을 내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독여야 했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유적지는 한산했고, 덕분에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비를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13] 광개토왕릉비 답사 인증사진과 비면사진 ⓒ이승호

천 육백여년의 세월 동안 홀로 그 자리에 서서 국강상(國岡上)의 땅을 지켜온 비석은 매우 고단해 보였다. 비면에 보이는 많은 상처와 얼룩은 힘겨웠던 지난 백여 년의 세월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전까지 국강상(國岡上)을 굽어보며 천 이백여 년의 세월을 태평스럽게 보내왔을 돌기둥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괴롭힘을 당하기를 백여 년, 이 돌기둥은 처음 세워지고 몸에 글자를 새겼던 그때보다도 더 많은 관심과 주목 속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이제는 다행히 세간의 관심이 조금 뜸해진 것 같으니 잠시 쉬어도 될 돌기둥이다.



[사진14] 태왕릉 전경(상)과 무덤 동북쪽에 위치한 제대(祭臺) 추정 유구(하) ⓒ이승호

 

  날씨가 좀 협조를 해주면 좋으련만, 좀처럼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옷이며 신발이며 모두 흠뻑 젖은 채 태왕릉으로 향했다. 무덤 주변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면서 태왕릉으로 불리게 된 무덤은 ‘산처럼 평안하고 굳건하기를’ 바랐던 당대인의 염원과는 달리 기단석이 무너지고 강돌과 산돌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진 채로 자신이 보내온 그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15] 태왕릉 전경(상)과 무덤 동북쪽에 위치한 (祭臺) 추정 유구(하) ⓒ이승호

  현재는 무덤 정상부에 위치한 묘실이 개방되어 있다. 태왕릉 등줄기를 타고 걸어 올라가면 묘실 내부를 볼 수 있는데, 안에는 두 개의 관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천 원짜리 지폐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천 육백여 년 전 고구려인들은 돌에 글자를 새겨 그들의 왕이 잠든 사후처소가 산처럼 굳건하기를 기원하였고, 오늘날 우리는 무너진 사후처소의 텅 빈 방 안에 천 원짜리 지폐를 던져 넣으며 사소한 개인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태왕릉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광개토왕을 비롯하여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등이 거론되고 있어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시점의 왕들은 모두 거론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필자는 태왕릉의 피장자를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답사 4일차에 돌아본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 생각되기 때문인데(4편에서 서술), 고국원왕 또한 「모두루묘지명」의 찬자에 의해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이라고도 불렸던 태왕(太王) 중의 한 명이다.

고국원(故國原) 즉 국강상(國岡上)에 묻힌 두 명의 국강상왕(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의 무덤을 각각 태왕릉과 장군총으로 놓고 보면 다음에 들릴 임강총은 고국양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초기 적석총의 모습을 다분히 간직하고 있는 임강총이기에 학계에서는 대체로 3세기 후반 무렵 조영된 무덤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국양왕까지 내려 보기에는 어렵겠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빡!) 고국양왕의 경우 국양왕(國壤王)이란 왕호가 곧 국천왕(故國川王)과 통하므로 압록강변 높은 언덕에 위치해 강을 굽어보는 임강총이 위치상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다. 4세기 무렵 국내성의 고구려인들은 우산하 일대 평원을 국강상(國岡上)으로, 그 남쪽에 흐르는 압록강을 국천(國川) 즉 국양(國壤)으로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잡생각이었던 것 같다. 동천왕의 무덤일 가능성에 보다 무게를 두도록 하자…)


[사진15] 임강총(臨江塚) 앞 표지석 ⓒ이승호

태왕릉 답사를 마치자 이제는 벼락을 동반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곧바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벼락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내리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천둥소리가 사방에 진동하는 가운데 우리는 젖은 몸을 이끌고 임강총(臨江塚)으로 향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번개가 내리치는데 우리는 계속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임강총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무덤 반대편으로 건너가 압록강을 바라보고자 또다시 무덤을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그 주변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하게 되었다. 정말 벼락 맞기 딱 좋은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미치도록 무서웠다. 귀를 찢는 두 번의 번개 소리에 나는 압록강 경치도 뒤로하고 서둘러 임강총에서 달려 내려왔다. 그렇다. 난 평소 죄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비는 더욱 거세게 내렸고, 더 이상의 답사는 무리라고 판단한 우리는 임강총을 끝으로 3일차 답사를 그렇게 마무리했다. 숙소에 들러 젖은 몸을 말리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어제 들른 압록강변의 꼬치구이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 고생하시는 기사님들과도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또다시 숙취에 찌든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고량주는 아무리 마셔도 아침에 머리가 아프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