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죽음에 얽힌 사연들 – 조선시대의 자살과 위핍치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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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얽힌 사연들
– 조선시대의 자살과 위핍치사 (1)

 

심재우(중세사2분과)

 

1.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란 찬사를 듣고 있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처럼 알듯 말듯한 말을 했다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자살은 가장 안타깝고 부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자살은 중대한 사회 문제 중의 하나였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부쩍 연예인이나 청소년들의 잇단 자살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어 우울하다.

 

<그림1> 알프레드 알바레즈가 지은 『자살의 연구』 번역본(1995, 청하) : 자살의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본 책이다.


그런데 결코 유쾌하지 못한 이런 상황이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도 자살 소식은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단골 메뉴 중의 하나였다. 최근 이경민이 쓴 경성, 사진에 박히다란 책자에는 일제시대 자살 통계가 나온다.

  즉, 1927년 3월 14일자 동아일보기사에 따르면 1910년 391명에 불과하던 자살자 수가 불과 15년만인 1925년에는 1,536명으로 무려 4배 가량 증가하였고,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30년에는 자살자 수가 더욱 증가하여 2천 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남자의 경우 목을 매 자살하는 반면 여자의 경우 음독 자살이 가장 많았는데, 생활난, 가정불화, 치정관계 등 자살 원인도 다양하였다.



<그림2> 유서를 손에 들고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자살한 길삼식 : 우등생으로 매년 1등만 해오던 길삼식의 의문의 자살은동아일보1928년 2월 19일자에 ‘졸업 앞두고 우등생이 자살, 유서 쓰고 사진까지 박혀’라 하여 크게 기사화되었다(경성, 사진에 박히다, 2008, 산책자, 184쪽).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 자살자 가운데 자살 직전에 본인의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몸에 지닌 채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죽고 나면 그만인데 사진은 찍어서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저자 이경민은 자살자들이 자살 전후에 남긴 사진 속에는나의 존재를 알리고 나의 죽음을 알리고, 그리고 나를 기억해줄 것을 요구하는 죽은 자들의 마지막 기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모든 자살은 남아 있는 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가치관,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20세기에 자살은 심각한 사회적 병리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이전 시기라고 해서 자살이 적었다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이하에서는 시대를 소급해서 조선시대의 자살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지금의 이 문제를 다시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2. 조선시대의 자살 빈도는?

  요즘처럼 확실한 통계를 확보하고 있지 않지만 문헌을 통해서 조선시대에도 자살 사건이 종종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조선시대에는 누가 얼마나 자살을 감행했으며,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불행하게도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자살 통계와 관련한 몇 가지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없지는 않다. 그 중 하나가 심리록이다.

 

<그림3> 『심리록』의 번역본 : 정조가 심리한 중죄수에 대한 판례를 모은 이 책은 최근 모두 여섯 권으로 번역이 완료되어 내용을 살펴보기에 편리하다.

 

  주지하듯이 심리록은 정조가 심리, 재판한 중죄수 관련 판례를 모은 책자로, 이 책자에는 정조 재위 기간인 1776년부터 1800년까지의 24년 동안에 발생한 자살 사건 38건이 등장한다. 1년 평균 1.5건 내외로 2건이 채 되지 않는 이같은 집계는 아무리 전통사회였다 하더라도 너무 적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사실 심리록에는 적지 않은 자살 사건이 누락되어 있었다.

  심리록에는 누군가 자살의 동기를 부여하거나 자살을 강요한 자가 있는 경우, 혹은 자살과 타살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 등 자살 중에서도 범죄 혐의가 있는 사건들만이 수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단순 비관 자살 등은 빠져 있기 때문에, 당시 실제 발생한 자살 사건의 일부만이 실린 셈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병사, 사고사, 자살 등으로 농촌 마을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예컨대, 구상덕(具尙德, 1706~1761)이란 인물이 영조 때인 1725년 7월 29일부터 1761년 8월 25일까지 37년간 경상도 고성 지역을 배경으로 쓴 생활일기인 승총명록(勝聰明錄)을 들여다 보면 고성 일대에서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 등으로 죽는 것은 다반사였고, 호랑이에게 물리거나 난파 사고로 익사한 사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 가운데 1732년 12월에는 부부가 함께 목매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일기 속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등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심지어 살인 사건의 경우도 종종 관에 보고되지 않기 일쑤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 고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해도 관에 고발하기를 꺼리는데, 이유는 관리들이 검시, 수사하는 과정에서 토색질, 괴롭힘 등으로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살인 사건의 열에 일곱, 여덟 건은 숨긴다고까지 하였다.

  정약용의 말은 다소 과장이 섞인 지적이지만,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관에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 것에 비추어보면 자살 사건이 조용히 묻혀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833년(순조 33) 충청우도에 파견된 암행어사 황협에 의해 적발된 충청도 덕산현(德山縣) 모녀의 비극적인 강물 투신자살 사건이 그 한 예이다.


<그림4> 암행어사 황협의 어사 활동상을 기록한 『수행기사(繡行記事)』 : 충청도 덕산현 모녀 자살이라는 비극적 죽음에 관한 조사 내용을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황협의 조사로 밝혀진 본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덕산의 전현감 한용용(韓用鏞)이 외읍에서 미모가 조금 곱상한 아낙네만 보면 음탕한 짓을 했다고 얽어매서 관비(官婢)로 삼곤 했는데, 하루는 임신한 한 여성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쁜 소문을 퍼뜨려 관비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녀가 끝내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못하자 어미와 함께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고, 그녀를 데리러 간 관차(官差)도 이들을 구출하려다 함께 익사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뱃속 아기까지 포함하여 무려 네 명의 목숨을 빼앗은 중대한 이 사안은 암행어사의 조사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묻혔을 사건이다.

3. 심리록에 등장하는 자살에 얽힌 사연들

  앞서 보았듯이 기록상의 한계로, 때론 고의적 누락으로 조선시대 자살 사건을 모두 수치화하여 통계 처리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심리록에 실린 38건의 경우 정조 재위기간 발생한 자살 사건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아무튼 심리록에 실린 것이 당시 발생한 모든 자살 사건을 망라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사건들을 좀더 분석해보기로 한다.

  먼저 자살자의 성별이다. 심리록수록 자살자의 성별을 분석하면 남성은 7건에 불과하고, 전체 38건 가운데 31건은 여성이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는데, 그만큼 남성에 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 할 절박한 처지에 있었던 여성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림5> TV에서 방영된 수사극 『별순검』에서 죽은 여인을 검시하는 장면.


<그림6> 『증수무원록언해』 : 조선시대 인명사건이 발생할 경우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서 참고한 법의학서인 『증수무원록』의 한글본.

  다음, 자살의 원인이다. 남성의 경우 빚 문제 등 생활고로 인해서, 혹은 우발적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여성의 경우는 상당수가 간통, 강간, 추문 등 치정에 얽힌 자살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로써 남녀의 자살 배경이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남성들의 경우 예를 들어 1782년 강원도 양양의 박성재처럼 고을의 토호 이해인이 사판(祠版)과 제기(祭器) 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의심하여 주리를 틀자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또한 같은 해 서울 서부의 최성휘처럼 빛 문제로 이웃과 다투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였다. 반면 여성 자살은 전체 31건 중 22건이 강간을 당하거나, 간통에 대한 이웃의 추문과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삶을 마감한 경우이다.

  예컨대, 1781년 충청도 전의의 서여인은 이웃의 서행진이란 자가 자신의 정조를 더럽히려고 하자 수절하는 반족(班族)인 자신이 상놈에게 욕을 볼 수 없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 죽었으며, 1787년 경기도 여주의 김씨 딸 판련(判連)은 강취문이란 자가 자신과의 결혼을 목적으로 이미 간통한 사이라고 헛소문을 퍼뜨리자 간수를 마시고 그 날로 죽었다. 이처럼 여성 자살의 경우 대부분 간통, 추문에 대항하여 자신의 결백과 수절을 증명하기 위해 감행한 사건들이었다.

론 여성 자살 사건 중에는 부부갈등이나 가정불화,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1784년 경상도 안동의 새댁 김명단(金命丹)처럼 남편 김험상이 삼끈을 제대로 삶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끓는 잿물을 덮어씌우고 때리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 죽은 경우가 그 한 예이다. 그렇지만 이 시기 여성 자살의 대부분은 자신의 성(性)을 노리는 남성들의 폭력과 시선 때문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즉 여성 자살 사건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정절 이데올로기를 강요당하던 당시 취약한 여성의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짚어 볼 것은 자살의 도구이다. 지금이야 죽고자 마음먹으면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이전 시기보다 다양하지만, 조선시대의 경우는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대개 목을 매거나 음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즉, 심리록 수록 자살사건 38건 가운데 목을 맨 사건은 17건, 음독이 13건이며, 드물게 강물에 투신하거나 칼과 같은 흉기로 자해하는 사례가 집계되었다.

  그런데 음독자살의 경우 독 성분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이 시기 자살할 때 마시는 대표적인 독약으로는 ‘간수’가 있었다. 간수는 고염(苦鹽), 또는 노수(滷水)라고도 하는데, 소금을 만들 때 습기가 찬 소금에서 저절로 녹아 흐르는 짜고 쓴 물을 말한다. 두부를 만들 때 응고제로 이용되는 간수는 강한 독성 때문에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애용(?)되었으며, 간혹 1782년 전라도 김제의 박여인처럼 사약의 재료인 비소(砒素)를 먹는 경우도 있었다. 박여인은 남편이 이웃사람으로부터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자 억울한 마음에 택한 극단적 선택이 음독자살이었다.

간수든 비소든 독은 먹기는 간단해도 독성은 강렬하였다. 1779년 전라도 함평의 김여인은 김봉기란 자가 자신을 겁탈하려고 하자 그의 어깨를 물어뜯고 가까스로 그 상황을 모면하였는데, 이후 주변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사건 발생 23일 만에 음독자살한 일이 있었다. 심리록에는 그녀의 시신을 검시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손과 발, 손톱, 발톱이 온통 청흑색(靑黑色)으로 변했으며, 독성으로 인해 혀가 오그라들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림7> 남편을 따라 죽은 열부(烈婦) : 병으로 죽은 남편을 따라 목을 매 죽는 열녀를 그린 것으로, 중국 복건(福建)에는 실제로 남편을 따라 죽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점석재화보』 광서 16년 7월 상순).


<그림8> 동반자살 : 광동(廣東) 지역의 어느 집에서 주인이 실직하여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가 아이를 달랜 후 뒤뜰에서 목을 맸고, 돌아온 주인이 이를 보고 함께 목을 맨 광경(『점석재화보』광서 23년 2월 하순). 생활고로 인한 가족동반자살의 비극은 요즘도 되풀이되고 있어 안타깝다.

  한편, 목을 매거나 음독하는 경우와 달리 때론 극단적인 자살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1782년 경상도 의성의 과부 조여인은 길가던 도중 무뢰한 최광률이 겁탈하려고 손을 잡자, 천한 상놈이 감히 양반의 후손을 겁탈하려 한다고 그 자리에서 자기 팔을 칼로 잘라 자결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자살을 성공한 경우도 있었는데, 1787년 경상도 안동의 과부 금씨(琴氏)의 예가 그런 경우이다. 이 사건은 이석이란 자가 김사겸 형제를 사주하여 과부 금여인을 핍박하여 겁탈하려고 하자, 금여인이 따르지 않고 이석의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사건이다.

  심리록에 실린 이 사건에 대한 정조의 판결문 중에는 금여인이 목을 매서 죽기 전에 감행한 여러 차례의 자살 방법이 등장한다. 즉 그녀는 죽기 위해 처음에 다섯 손가락을 깨물어 절단하고 칼로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죽으려고 하였고, 여의치 않자 심지어 강물에 몸을 던졌으나 물이 얕아 죽지 못하였고, 마침내 목을 매 자살에 성공하였다. 내용으로 봐서 금여인의 높은 절개와 지조를 강조하기 위한 과장이 아닐까 미심쩍어 할지 모르나, 수사 기록에 근거한 만큼 사실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심리록에 실린 자살 사건 중에는 내용이 소략하여 자세한 사연을 알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가볍게 보고 넘어갈 것이 하나도 없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조선시대 불평등한 사회적 상황과 갈등에서 빚어진 사건들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 자살에 얽힌 애절한 사연들을 추적하며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일은, 거창한 역사 이야기와 다소 거리가 있을 지는 몰라도 그 시대 사람들의 아픈 현실이나 삶의 모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