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시신을 만지는 아전 ‘오작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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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을 만지는 아전 ‘오작인’의 실체

심재우(중세사2분과)

1. ‘동이’의 아버지 최효원은 누구?

미국 드라마 <CSI>에서 시신 검안을 통한 과학적인 수사기법 등이 소개되면서 드라마나 영화 속 ‘검시’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또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조선시대판 CSI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 제작되고 호응을 얻으면서 일반인들의 조선시대 살인사건, 수사 및 검시 과정에 대한 호기심 또한 커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일까? 최근 MBC 드라마 <동이>에서도 시신을 검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드라마 <동이>는 궁녀 출신이었다가 나중에 숙종의 후궁이 된 숙빈최씨(淑嬪崔氏)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다루고 있다. ‘동이’가 낳은 아들은 우리가 잘 아는 탕평군주 영조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동이의 아버지 최효원(崔孝元)은 시신을 검시하고 처리하는 오작인(仵作人)으로 나온다. 그는 종종 포도청의 명을 받아 검시(檢屍) 활동을 하였고, 원래 가문은 양반출신이었으나 나중에 역모에 연루되어 천민이 된 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림 1> MBC 드라마 ‘동이’의 한 장면. 왼쪽이 최효원이고, 오른쪽이 어린 시절의 동이이다. (출처 : www.imbc.com)

동이가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 최효원의 직업이 정말 오작인이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훗날 동이의 아들, 즉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외할아버지 최효원에게도 관직을 추증하였는데, 처음 종6품의 부사과(副司果)를, 나중에는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였다.

아무튼 현재로서는 최효원의 출신, 직업, 삶의 모습을 고증할 수 없지만, 그가 ‘오작인’이었다는 설정 자체는 아무래도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오작인은 관아에 소속된 하급 아전으로서, 시신을 검시할 때 시신의 옷을 벗기거나 몸을 만지는 등의 천한 일을 하던 자들이었다. 오작인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였을까?

2. 오작인의 실체

조선시대 살인, 자살 등 변사 사건이 발생할 경우 원칙적으로 시신이 발견된 해당 고을의 수령이 검시의 책임, 즉 검시관(檢屍官)을 맡았다. 그리고 지방과 달리 서울의 경우는 5부(部)의 부장이 맡았다. 행정권과 사법권, 수사권 등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당시에 행정기관의 수장이 강력사건 수사 및 검시까지도 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 검시관들이 피의자를 심문하고 시신을 만지는 등의 잡다하고도 험한 일을 모두 할 수 없었으니, 사실상 검시의 실무는 이들을 보좌하는 아전들이 담당하였다. 당시 검시에 참여한 아전들을 응참각인(應參各人)’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을까? 정조 때 편찬된 검시 지침서에 해당하는 증수무원록(增修無冤錄)에는 검시관을 보좌하는 응참각인으로 사리(司吏), 오작(仵作), 항인(行人), 의율(醫律)이 등장한다. 책에 기록된 이들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 『증수무원록』: 시체를 검시하는 장소에 입회해야 하는 아전, 피의자, 증인 등의 명단을 기록한 부분이며, 그 가운데는 ‘오작(仵作)’도 보인다. (출처 : 증수무원록 규장각 도서번호 2865)

  먼저 ‘사리’는 이서(吏胥), 즉 일반적인 아전들을 말하며, ‘항인’은 심부름을 하거나 경비를 맡은 사령(使令)과 같은 부류를 말한다. 다음으로 ‘의율’은 의학 및 법률에 능한 특수 기능직 아전인 의생(醫生), 율생(律生)을 말하는데, 이들의 경우 검시관에게 사망원인과 관련한 의학적, 법률적 자문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인 ‘오작’은 검시과정에서 시신을 직접 만지는 일을 맡았으며, 아전들 중에서도 제일 천한 부류에 속했다. 오작에 대해 『신주무원록』에는‘검시와 시신 매장을 담당하는 사람(檢屍及埋葬之人)’이라 하였고, 『증수무원록』에는 옥에 갇힌 사람을 맡아 지키던 ‘쇄장(鎖匠)과 같은 부류’라고 하였던 것에서 이들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검시 장면 : 한말 풍속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에 실린 검시하는 장면. 검시할 때 시신의 몸에 난 상처 등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식초, 물 등으로 세척하였는데, 화면에 등장하는 바가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자가 ‘오작인’이다. (출처 : 『사법제도연혁도보』)

그런데 오작인이 당시 얼마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각 지방 고을에서는 고을 아전 중에 오작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지만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또한 오작의 숫자나 역할도 고을마다 일정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는 여러 관청에 오작인을 두고 있었다. 조선전기에 빈민들의 구제와 치료를 담당했던 활인서(活人署)에 오작인이 배속되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 성종 1년 6월 11일자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으며, 고종 때 편찬한 법전인 『육전조례(六典條例)』를 보면 감옥을 관장하던 관청인 전옥서(典獄署) 소속 아전 중에도 오작이 1명 확인된다.

또한 죄인을 직접 체포하여 수감할 수 있었던 이른바 조선후기의 직수아문(直囚衙門), 즉 형조, 종친부, 의정부, 중추부, 의빈부, 돈녕부, 규장각,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기로소, 한성부, 권설도감, 의금부에서도 오작의 역할을 한 아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의 경우에는 여러 중앙 관청에 오작인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할 때 조선시대 ‘오작인’은 오늘날처럼 전문적인 수사기법을 배운 수사관이라기보다는, 말단 아전 중의 하나로서 시신을 만지는 일 외에도 감옥 및 죄수 관리 등 잡다한 잡무에 종사하던 자들이었다. 다만 이런 일을 오래 수행하면서 점차 범죄수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림 4> 머리 없는 시체 : 청나라 말기 화보집에 실린 그림. 진군(津郡)의 하북(河北) 해자에서 1886년 11월 초에 발견된 머리 없는 남자 시신 모습이다. 그림의 해설에는 시신의 머리를 해자에서 1리 떨어진 곳에서 찾았다고 적고 있으며, 사망자의 나이는 17, 18세로 추정하고 있다. 그림 중간에 보면 시신을 검시하는 인물도 보인다. (출처 : 『점석재화보』 1886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