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무릎을 짓밟는 고문, 압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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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짓밟는 고문, 압슬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남영동 대공분실

5공화국의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에 악명을 떨치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보안3과가 자리했던 이 7층짜리 건물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한 채 현재는 2005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거쳐 박종철 인권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많은 조직 사건,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졌으며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고문 속에서 쓰러져 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도 이 건물 509호 조사실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그림 1> 남영동 대공분실의 전경 : 독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치던 경찰청 보안3과 건물. 5층이 조사실 전용이다.(한겨레신문 2005년 8월 11일자.)

이곳 대공분실을 거쳐간 대학생, 활동가 중에는 1983년에 결성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을 역임한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 전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는 1985년 깃발사건으로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이다.

  고문이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줄뿐 아니라,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성을 유린하는가 하는 것은 당시 김근태 전의원의 법정 진술을 통해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이곳 대공분실에서 몇 시간에 걸친 전기고문과 물고문, 집단 구타를 수 차례에 걸쳐 당했다고 한다. 고문기술자로 한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던 이모 경감도 그를 고문한 경찰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림 2> 남영동 대공분실의 5층 조사실 복도 모습 : 5층에는 조사실이 16개가 있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11일자.)

그에 가해진 고문은 전기고문이 중심이었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위해 행해졌다. 고문을 하는 동안에는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고문을 할 때는 눈을 가리고 온몸을 발가벗긴 다음에 고문대에 눕혀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다. 발목과 무릎, 허벅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까는데,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다. 전기고문은 처음엔 약하고 짧게 하다가 나중에는 강하고 길게 강약을 반복하였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알몸 상태에서 능욕당하는 수치. 계속되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 그는 마침내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했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서 내용을 쓸 수밖에 없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몸무림치는 와중에 들려오는 라디오 속 DJ의 너무나도 한가로운 목소리를 김근태 전의원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훗날 술회하였다. 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이 불과 10여년 전의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2. 조선시대의 고문

현실에서 고문이라는 야만적 폭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현재 우리나라에서 고문 행위는 불법이다. 하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지금과는 달리 합법적으로 고문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럼 당시 고문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조선시대에는 법에 고문 절차와 고문 방법에 대해 일정한 원칙을 정해두었는데, 고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신장(訊杖)이라는 매로 피의자를 가격하는 것이다.


<그림 3> 조선시대 태ㆍ장과 신장  : 태ㆍ장은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사용하는 형구이며, 신장은 고문할 때 쓰는 매이다. 신장은 종류가 세 가지인데 추국(推鞫)할 때 쓰는 것이 좀더 굵고 두껍다.『흠휼전칙(欽恤典則)』 수록.

범죄의 정황이 분명한데도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는 자에게는 으레 고문을 가했는데 이 때 흔히 길이가 약 1미터 정도 되는 신장이라는 매를 이용했다. 원래 신장으로는 다리를 치게 되어 있었는데, 구체적인 타격 부위는 피의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 부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극 같은데서 볼 수 있는 ‘동틀’이라는 형틀 의자에 앉혀놓고 피의자의 두 다리를 의자에 고정시킨 후 정강이 부위를 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신장을 아무렇게나 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장은 한 번에 30대 이상을 치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한 번 신장을 친 후에는 사흘 뒤에 다시 치게 되어 있었다. 이같은 제한 규정이 없다면 고문 중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장은 기본적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죄인이 물고(物故)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림 4> 변학도가 춘향이 고문하는 모습 : 남원테마파크에 있는 모형. 원래 조선시대 법에는 고문할 때 신장으로 종아리를 때리게 되어 있으나, 모형에서 보듯이 동틀에 앉혀서 정강이를 치기도 하였다.

  ‘매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단단한 몸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매 앞에서 견뎌낼 재간은 없었다. 대개 몇 차례의 매질만으로 피의자는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게 중에는 아무리 신장을 가해도 끄덕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 취조는 이것으로 끝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신장으로 자백을 받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고문 방법이 동원되었다.

  무릎을 꿇게 하여 그 위에 널을 올려놓고 무릎을 짓밟는 고문인 압슬형(壓膝刑), 숯불에 달군 쇠로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烙刑), 양쪽 엄지발가락을 한데 묶어 모아놓고 발바닥을 치는 난장형(亂杖刑), 붉은 몽둥이로 몸을 찌르는 주장당문(朱杖撞問), 또한 다리 사이에 몽둥이 두 개를 끼워 벌려서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리(周牢) 등과 같은 또 다른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리로 산 너머 산이었다.
3. 일본 에도시대의 고문 ‘이시다키’

조선시대 고문 절차와 다양한 고문 방식에 대해서는 앞으로 하나하나 설명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이 가운데 압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다. ‘압슬(壓膝)’은 누를 압(壓), 무릎 슬(膝) 글자 그대로 피의자의 무릎을 밟아서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으로 조선초기부터 신장으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할 경우에 특별히 사용되던 고문 방법이었다. 이 조선의 압슬과 유사한 고문이 일본에도 있었는데, 에도시대에 시행된 ‘이시다키(石抱)’가 그것이다.

  최근 임명수가 쓴 『에도시대의 고문형벌』(어문학사, 2009)를 보면 일본 에도시대에는 대략 네 가지 유형의 고문이 가해졌다고 한다. 그 네 가지는 무치우치(笞打), 이시다키(石抱), 에비제메(海老責), 쓰리제메(釣責)를 말한다.


<그림 5>  에도시대의 고문, 이시다키와 무치우치 :  왼쪽 그림이 이시다키, 오른쪽 그림이 무치우치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무치우치는 피의자의 상반신을 벗기고 양 손목을 등 뒤로 해서 묶은 뒤에 채찍으로 어깨 부위를 세게 때리는 채찍질 고문이었다. 무치우치로도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 이시다키가 행해졌는데, 일종의 ‘돌 안기 고문’이다. 이밖에 에비제메와 쓰리제메는 피의자의 고문받는 자세를 본따 ‘새우 고문’, ‘매달기 고문’이라 하였다.

  먼저 에비제메는 양팔을 뒤로 한 채 그림에서 보듯이 어깨와 다리를 바짝 밀착시켜 꽁꽁 묶어서 온몸을 새우모양으로 만들어 고통을 주는 방식이다. 쓰리제메는 양팔을 뒤로 비틀어 올려 손과 손목을 종이와 짚으로 감아 밧줄로 묶은 후 남은 밧줄로 가슴을 감아 고정시켜 매다는 것으로, 매달린 무게로 인해 2시간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림 6> 에도시대의 고문, 에비제메와 쓰리제메 :  왼쪽 그림이 에비제메, 오른쪽 그림이 쓰리제메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이시다키 고문 방법을 좀더 살펴보자. 이시다키를 할 때에는 먼저 기둥에 피의자의 몸과 양팔을 뒤로 묶은 뒤, 삼각으로 날카롭게 홈이 파인 삼각판 위에 무릎을 꿇게 한다. 삼각판 위에 무릎을 꿇게 되면 뾰족한 것이 정강이에 닿아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본격적인 고문은 그 상태에서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으면서 시작된다.

  당시 고문에 사용하는 돌은 청백색의 결이 고운 수성암(水成岩)이 사용되었다. 돌은 대략 길이 1m, 폭 33cm, 두께 10cm로 자른 것인데, 무게는 1장에 48kg이 넘었다. 돌을 한 장, 한 장 무릎 위에 올리면 돌의 무게 때문에 삼각대 위의 정강이를 누르게 되는데, 죄인은 서서히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시다키는 보통 다섯 장부터 시작했는데, 대여섯 장을 무릎위에 올려놓으면 대부분의 경우 기절하거나 바로 자백했다고 한다. 물론 때로는 심지어 돌 열 장을 올려놓아도 꿈적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견디다 못해 온몸이 파랗게 변하고 피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죽는 자들도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4. 무릎을 짓밟는 고문, 압슬

앞서 보았듯이 이시다키는 무릎에 심한 고통을 주문 고문이며, 조선에서 시행한 압슬도 이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시다키가 무릎 위에 돌을 올려놓는 것인데 비해, 압슬은 무릎을 사람이 올라가서 밟는 것이 다르다.

  압슬 방법은 이렇다. 즉, 먼저 자갈을 널 위에 깔고 피의자의 무릎을 꿇게 한 뒤 다시 자갈을 부어 무릎 주위를 채워넣은 뒤, 그 위에 사람들이 올라설 수 있도록 새로운 널을 다시 올려놓고 형리 등 고문집행관들이 그 위에서 지근지근 짓밟아서 고통을 주는 고문이다.

  울퉁불퉁한 돌에 놓인 무릎을 사정없이 밟아대니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피가 솟아 땅으로 흐르기 예사였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잔인하고 참혹한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이정도가 뭐 그리 큰 고통을 주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문을 당하는 당사자로서는 숨이 금방이라도 멈출 듯 괴로웠다.


<그림 7> 김준근의 ‘죄인 널뛰는 형벌’ :  한말의 화가 김준근이 그린 풍속도의 하나로 무릎을 꿇게 하여 널을 밟아 고통을 주는 압슬과 유사한 형태의 고문.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1999) 수록.

그런데 압슬을 시행할 때 자갈 대신에 종종 사금파리를 깨뜨려 깔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압슬을 ‘압사(壓沙)’라고 하였다. 그런데 압슬이 꼭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고문은 아닌 것 같다. 고려 충렬왕 때에 심양(沈諹)이란 자를 문초하면서 나무토막을 다리 위에 놓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기왓장을 다리 사이에 끼워 사람을 시켜 번갈아 그 위를 밟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는 말이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때에 이미 압슬형을 시행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처럼 압슬은 조선왕조의 초기부터 조정에서 죄인을 심문할 때 사용하였다.

  압슬을 시행하면서 관련 규정이 마련되기도 하였는데, 태종 17년(1415) 5월 11일 실록 기사에 따르면 압슬을 가할 때 널에 올라가 밟아대는 사람을 처음에는 두 명으로 제한하였고, 그래도 자복하지 않으면 두 번째에는 네 명, 세 번째에는 여섯 명까지 올라가서 밟도록 하였다. 그리고 역모나 패륜, 강도, 살인과 같은 중죄인 외에는 압슬을 함부로 시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릎을 망가뜨리는 등 고문 후유증이 제법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압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하는 일도 생겼다. 세종 18년(1436)에 별시위(別侍衛) 이석철(李錫哲)의 조카 유중인(柳仲諲)이란 자가 이석철의 부인 유씨(柳氏)와 간통하였다는 죄목으로 붙잡혀와 고문을 당한 일이 있었다. 유중인과 유씨는 조카와 숙모 사이로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로서는 용납받기 어려운 패륜 범죄에 해당했다.

  유중인은 바로 체포되어 고문에 처해졌는데, 신장으로 가하는 매질을 네 차례나 당하였고 그 중간에 압슬도 세 차례 시행되었다. 견디다 못한 그가 간통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죄 값으로 목을 내 놓을 판이었는데, 사실은 이것이 거짓 자백이었다.

  그는 고문을 못 이겨 자백하긴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옥중에서 몰래 자신의 종에게 편지를 보내 신문고를 쳐서 임금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결국 다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의 간통은 무고로 밝혀졌다. 압슬 등 참기 힘든 고문을 해대는데 누가 견뎌낼 수 있었을까?


<그림 8> 청나라 말기의 족책(足責) 고문 :  상해 법정에서 주점을 강탈한 피의자를 심문하는 모습. 독특한 고문기구 좌우에 있는 두 명이 손과 발로 고문을 가하고 있다. 무릎에 고통을 가한다는 점에서 압슬과 일부 유사하다. 『점석재화보(點石齎畵報)』 수록(『도설 중국혹형사』 54쪽).

한편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어린아이와 노인은 고문할 수 없었는데, 간혹 어린 아이에게도 압슬을 가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조 22년(1589)에 선조대 최대의 정치사건인 기축옥사, 즉 정여립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역모사건이라는 선을 넘어 동인(東人) 정파 정치인에 대한 정치탄압사건으로 비화하여 수많은 호남 지역 유신들이 무고, 조작, 연좌로 죽임을 당했다.

  이 때 남명 조식의 문인이며 동인내 강경파였던 이발(李潑) 일가는 대부분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이발의 여든 두 살 모친 윤씨(尹氏)와 열 살짜리 아들 이명철(李命哲)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은 옥사에 연루되어 2년을 끌다가 결국 윤씨는 매를 맞아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명철도 압슬에 승복하지 않고 견디다가 죽고 말았다.

  정파 간에 두고두고 갈등과 후유증을 남긴 이 기축옥사는 불행하게도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역모사건 처리의 선례가 되었다. 취약한 명분을 가지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공안 통치를 행했는데, 압슬, 낙형 등 가혹한 고문이 자주 동원됨으로써 평범한 범죄가 대규모 역모사건으로 확대, 비화되곤 했다.

  이후에도 간간이 사용되던 압슬형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마지막 사례는 영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25년 1월에 있었다. 영조가 선왕인 경종의 능(陵)에 행차하던 중 군사 이천해란 자가 영조의 어가(御駕) 앞에 뛰어들어 큰소리로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였는데,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조가 무려 24차례에 걸쳐 그에게 압슬을 가하고 그 날로 처형한 것이 그것이다.

  이후 영조는 뒤늦게 이천해에 대한 심문이 너무 가혹했다고 후회하고 신하들에게 더 이상 압슬을 가해 심문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혹독한 고문의 하나인 압슬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