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목구멍이 포도청’ : 조선 경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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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포도청’ : 조선 경찰 이야기

심재우(중세사2분과)

1. ‘목구멍이 포도청’

지금부터 정확히 이십 년 전인 1990년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10․13 특별선언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소위 ‘범죄와의 전쟁’이다. 이 선언의 주요 골자는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무질서를 추방하고 이른바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범죄와 폭력을 근절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후속 조치로 폭력, 마약 등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형사 관계법을 개정하고, 조직폭력배 등 범죄조직에 대한 소탕을 강화하였다. 또한 범죄의 온상으로 간주되던 유흥업소를 단속, 규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정 이후 심야영업도 금지시켰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낯선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이같은 조치로 인해 당시 대학원생이던 필자가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이어가기 위해 밤 12시 이후 몰래 영업하던 술집을 찾아다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림 1> 서울지방경찰청 전경 서울지방경찰청은 조선시대 한성부 치안을 담당했던 포도청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당시 정권에서 유난을 떨었던 범죄와의 전쟁은 엄청난 성과를 가져왔을까?실제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후 강력 범죄가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폭력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것이 검찰이나 경찰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부정적 견해도 적지 않다. 조직폭력배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지 않다는 점에서 폭력 조직의 소탕을 운운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선언이 당시 분출되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 것이라는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않다.정책의 성패는 좀 더 따져볼 일이지만, 아무튼 분명한 것은 당시 범죄와의 전쟁은 혈기 왕성한, 다른 말로 하면 폭음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참 불편한 조치였음은 분명하다.
사회 있는 곳에 범죄는 늘 생기기 마련이며, 어느 정부나 치안 문제에 고심하는 것이 사실이다. 범죄의 성격이나 내용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어도 조선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먹고 살기 위해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조선시대 포도청도 지금의 경찰청이나 마찬가지로 분주하였을 것은 짐작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포도청은 한성부, 즉 서울 일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한 일종의 경찰 기구인 셈이다. 조선에서는 이 외에도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 삼법사(三法司)를 두거나, 죄인을 직접 구금할 수 있는 관청인 직수아문(直囚衙門)을 두어 여러 관청에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그림 2> 한말의 한성부 청사  조선시대에 한성부는 행정기관인 동시에, 핵심 사법기관인 삼법사(三法司)의 하나였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 생활과 풍속』(서문당, 1996), 134쪽 수록.

  그런데 포도청은 단순히 도둑을 잡는 기관일 뿐만은 아니었다. 더 나아가 서울 도시민의 삶을 통제하는 역할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의 사적인 물리적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왕권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광해군은 포도청을 적극 활용하여 각종 역모, 조직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조선 중종 무렵 생긴 포도청은 좌포도청, 우포도청의 두 개 청사가 있었는데, 좌포도청은 중부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 즉 지금의 종로구 종로3가 단성사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우포도청은 서부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 지금의 종로구 종로1가 89번지 일대에 각각 위치하였다. 좌포도청의 관할은 한성부의 동, 남, 중부와 경기좌도이며, 우포도청은 한성부의 서부 및 경기우도였다.


<그림 3> 과거의 단성사 모습 단성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으로 1907년에 개관하였다. 조선시대 좌포도청 청사는 이 단성사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2. 선교사 리델이 본 한말의 포도청

포도청에서는 야간순찰을 비롯한 주기적인 순찰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도적, 강도, 살인 등을 단속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포도청의 단속 대상 중에는 ‘검계(劍契)’ 조직도 있었다. 검계는 지금의 조직폭력 조직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영조 때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검계라는 이름은 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고, 주로 양반가의 사나운 종이나 머슴들이 가입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의 학자 이규상(李奎象)의 『일몽선생문집(一夢先生文集)』에는 영조 때 포도대장을 역임한 장붕익(張鵬翼)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장대장전(張大將傳)」이 실려 있다. 글 속에서 장붕익은 ‘검계(劍契)’ 조직원을 일망타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장붕익은 실존 인물이었다. 「장대장전」에서 검계 조직원들은 몸에 모두 칼자국이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요즘 폭력배들이 몸에 문신을 새겨넣은 것과도 닮은꼴이라 흥미롭다.


<그림 4> 포도대장과 순검 한말에 찍은 사진으로 좌측이 포도대장(捕盜大將)의 모습이고, 우측이 신식 순검(巡檢)이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 : 생활과 풍속』(서문당, 1996), 133쪽 수록.

  아무튼 검계를 예로 들었지만,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각종 무뢰배, 치한, 강절도 등을 매일 상대하고 조사하는 일이 당시에도 지금과 별반 다름없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포도청에는 확실한 자백을 받기위해 가혹한 고문과 형장이 으레 등장하기 십상이었다. 그럼 실제 포도청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글에서 이곳 광경을 유추할 수 있다.

한말에 천주교 선교활동을 위해 우리나라에 다녀간 프랑스 선교사 리델(Ridel, 한국이름 李福明)은 1878년 1월 체포되어 6월 10일에 석방되기 까지 4개월 여에 걸쳐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처음 그는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이후 좌포도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가 이곳 감옥에서의 생활을 적은 기록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리델의 수기는 1878년 그 당시의 상황만을 보여주는 것이고, 아무래도 서양인의 편견도 기록 속에 은연중 녹아 있었을 것이므로 한계는 있다. 그래도 조선후기 포도청의 감옥 배치나 형구, 포도청 소속 관리들과 죄수들의 모습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림 5> 리델 초상 1878년 조선의 포도청 감옥 생활을 체험한 프랑스 선교사 리델의 모습.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살림, 2008) 8쪽 수록.


<그림 6> 리델이 그린 좌포도청 감옥 구조도 1과 10은 포졸 숙소, 2는 리델 자신이 수감된 감방, 3은 채무죄수가 수감된 감방, 4는 도둑의 감방, 5는 교수형이 집행되고 시체를 두는 곳, 6은 물건 두는 방, 7이 변소, 8은 부엌, 9는 웅덩이, 11은 법정, 12가 감옥 출입문이라고 적고 있다.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살림, 2008), 114쪽 수록.

먼저 포도청 감옥 배치에 대해서이다. 조선시대 감옥이 죄수들을 위한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추었으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렵지만, 리델의 묘사에 따르면 상황은 더 열악하였다. 그가 손수 그린 좌포도청 감옥 도면에 따르면 감옥의 가운데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고, 그 주변으로 죄의 유형에 따라 죄수들을 분산하여 수감하던 세 개의 감방이 있었다고 한다. 감방 옆에는 교수형 집행시 쓰던 형구를 보관하거나 시신을 임시로 보관하는 방,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 하나도 있었다고 한다.

리델은 특히 나무 판자 두 개가 놓여있고, 그 아래에서는 악취가 풍기던 이 조선의 재래식 화장실 냄새에 기겁을 했던지 ‘끔직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눈에 씻을 물도 갈아입을 옷도 없는 불결하고도 너무도 열악한 그곳이 바로 좌포도청 감옥이었다.

그런데 좌포도청 감옥 배치도는 일제 때 경성형무소장을 지낸 중교정길(中橋政吉)의 책자에도 등장하는데, 이를 리델의 도면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중교정길의 경우 20세기 초에 좌포도청 감옥을 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리델과 몇 십년 차이밖에 나지 않으나 그 사이에 감옥 내부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7> 일제시대 중교정길(中橋政吉)이 그린 좌포도청 배치도 좌포도청의 평면도와 입면도. 입면도에는 교수형을 집행하는 곳이 보이며, 전체적으로 리델이 그린 도면과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교정사』(법무부, 1987), 155쪽 수록

  리델은 자신과 함께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포도청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은 크게 도둑, 채무 죄수, 천주교 신자 세 부류로 나뉘었다. 이들의 처지는 같은 죄수라 하기엔 상당히 큰 차이가 존재하였다. 그중 가장 비참한 대접을 받은 자들이 도둑들이었다. 이들은 밤낮이고 발에 차꼬를 차고 있어야 했으며, 밤에도 잠을 잘 수 없었다. 행여 이들이 졸기라도 하면 포졸들이 가차없이 몽둥이로 등과 다리, 머리 할 것 없이 후려쳐서 깨웠다고 한다. 리델은 열악한 처지의 도둑들이 대략 30여 명 있었는데, 하나같이 병에 걸려 가련한 몰골이었다고 전한다.

이에 비해서 채무 문제로 투옥된 죄수들은 한결 나은 대접을 받았다. 이들 중에는 공무상 뇌물이나 횡령 등으로 잡혀온 관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연락할 수도 있었고, 감옥 내에서 지급하는 식사 대신 비교적 먹을 만한 사식(私食)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굶주린 도둑들이 보는 앞에서 사식으로 잔치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이며 채무를 갚는 즉시 감옥을 빠져나올 수도 있었는데, 리델과 같은 천주교 신자는 앞서 소개한 도둑과 채무 죄수의 중간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한편, 붙잡힌 죄수 처지에서는 자신을 감시하는 옥졸들이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하였다. 이는 리델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포도청 관속들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좌포도청, 우포도청 각각 약 50여명의 포교들이 있었고, 그들 밑에 포졸 등 하급직원과 망나니 등이 있었다고 한다. 포졸들은 대개 8-10명 내지 20명씩 교대 근무를 하였는데, 아침 6-7시경에 와서 한밤중에 돌아갈 때까지 웃고 떠들고 말싸움하며 하릴 없이 시간을 보냈다.

  매우 위선적이며 교활한 이들 포졸들은 죄수들을 상대할 때 특히 ‘맹수’로 돌변하는데 심한 경우 웃으면서 형벌을 집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에 의해 죄수가 몽둥이로 맞아 죽어나가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수형도 포도청 안에서 간단하게 끝냈다고 한다. 리델은 밥 먹는 시간에 감방에서 붙들여나온 도둑 한 명이 옥졸 네 명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지는 비참한 광경도 목격하였다.


<그림 8> 교수형 집행 장면 한말의 화가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의 한 장면.

  “나와! 목매러 가자.” 옥졸들이 저녁 식사 시간에 도둑 감방에 들이닥쳐 해당 죄수를 교수형을 집행하는 방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후 교수형이 집행되는데, 옥졸이 죄수의 목을 줄로 맨 다음 밖으로 나와 방문을 닫는다. 그리고 옥졸 네 명이 달려들어 마치 닻을 끌어올리듯 죄수의 목을 맨 올가미 줄을 잡아당긴 다음, 팽팽해진 줄을 묵직한 나무토막에 묶어 놓으면 형 집행이 완료된다. 리델은 교수형을 집행하는 옥졸들이 이 전 과정을 아무 표정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모습에 치를 떨었다.

3. 포도청 사람들 : 포교, 포졸, 다모

앞서 리델의 이야기가 다소 장황해졌는데, 솔직히 리델의 글에는 다소간의 과장이 섞여있었을 것이지만 없는 사실을 꾸며놓은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리델의 글을 통해 우리는 한말 포도청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다.

이제 포도청 감옥의 칙칙한 얘기를 벗어나 포도청 조직과 관속들의 활동에 좀더 주목해보기로 한다. 먼저 포도청 조직이다. 포도청에는 제일 우두머리로 좌, 우 포도대장(捕盜大將) 1명이 있었고, 그 밑에 종사관(從事官)이 각각 3인 배치되었다. 종사관은 포도대장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는데,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 이들이다. 또한 포도대장, 종사관 밑에 포도청의 중견 지휘관인 포도부장(捕盜部將)과 군관(軍官), 그리고 말단 관속들인 포도군사(捕盜軍士)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포교(捕校)라 부르는 자들은 포도부장과 군관을, 포졸(捕卒)은 포도군사를 말한다. 포도청 창설 초기인 중종 때에는 좌, 우 포도청에 각각 포도부장 3인, 군관 10인, 포도군사 50인을 배치하였으나 포도청의 역할이 증대하면서 인원은 조금씩 증가하였다.


<그림 9> 포도청 조직에 관한 규정 고종 때인 1865년 만들어진 법전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나오는 포도청에 관한 규정. 이전 시기와 인원수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포도청 포교와 포졸의 활동과 관련한 생생한 이야기는 『한국의 풍토와 인물』(을유문화사, 1973)이란 책자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한학자이자 민속 연구자인 김화진(金和鎭)이 썼는데, 김화진 집안은 구한말 왕가의 친척이고 아버지가 고관을 지냈기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궁중 나인 등을 통해 대궐 안이나 조선의 제도, 풍속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포교는 나무로 된 통부(通符)를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통부에는 포도대장의 수결(手決, 수결은 지금의 사인을 말한다)이 새겨있었다. 포교가 죄인을 체포할 때 이 통부를 내보였는데, 지금의 경찰 신분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0> 정조 때의 포졸 모습 1795년 정조 임금이 화성을 행차할 때의 행렬 중 한 부분. 그림의 가운데에는 두 명의 포졸이 등장한다. 『정조대왕 화성행행 반차도』(효형출판, 2000) 수록.

포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장을 하며 한성부 시내를 순찰하였다. 포교와 포졸들 사이에는 고유한 암호가 있어 매일매일 바꿔가며 사용하였으며, 그들만의 은어(隱語)를 썼다. 이는 지금의 경찰, 형사들도 예컨대 흉기를 ‘연장’이라 하듯이 자신들끼리의 은어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화진이 소개한 은어를 몇 가지 열거하면 ‘밥을 내라’(고문을 하라), ‘모양을 내라’(잔뜩 묶어라), ‘대장으로 모시어라’(칼을 채워두어라), ‘새벽녘이다’(단서를 얻었다), ‘미꾸리다’(새어 나갔다) 등이 있다. 범인과 관련한 은어로는 힘이 없는 놈을 뜻하는 ‘파리’, 억세고 무리를 이룬 자들인 경우에는 ‘참새’라고 했다. 포교와 포졸들이 밤마다 잠복했다가 범인을 발견하고 체포할 때에 이들 은어가 빛을 발하는데, 포교가 ‘파리!’ 혹은 ‘참새!’라고 외치는 것에 따라 출동하는 포졸들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또한 포교는 민간에서는 ‘나그네’라고 하였다는데, 지금 경찰을 ‘짭새’라고 부르는 것에 비하면 훨씬 점잖고 나은 것 같다. 이상 김화진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장담할 수 없지만, 당시 포교, 포졸들이 암호나 은어를 사용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림 11> 포교가 투전꾼을 잡는 모습 포교가 도박을 하고 있는 투전꾼의 일종의 ‘하우스’를 급습하는 장면. 한말의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가운데 하나.

  한편, 포도청 관속들 중에는 편법이나 비리를 범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샤를르 달레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달레에 따르면 한성부 등 큰 도시에는 포도청의 포졸이 매수해둔 도둑이 있어서, 포졸들은 보수를 지급하여 이들 도둑을 꾸준히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둑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수령이 범죄 단속에 대한 성과를 독촉할 때 포졸들은 미리 매수해둔 도적에게 가벼운 범죄 행위를 엮어서 체포하였다. 한마디로 편법으로 자신의 범인 체포 실적을 부풀리는 행위인 셈이다. 지금도 조직폭력배나 유흥업주들과 경찰과의 유착 내지 부적절한 관계가 종종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유형의 부정부패는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 것 같아 씁쓸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포도청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다모(茶母)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자. 몇 해전 MBC 사극 ‘다모’가 유행하여 조선시대 다모의 활약상이 기록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불행하게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포도청의 여형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다모! 다모는 신분이 천민(賤民)으로서, 포도청 뿐 아니라 여러 관청에 배속되어 식모와 같은 천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법전 등 공식기록에서 포도청에 다모가 얼마나 있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다만, 조선왕조실록을 추적해보면 다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 수 있다. 먼저 세조 9년에 혜민국(惠民局) 소속 의녀(醫女) 가운데 성적이 좋지 않은 자는 다모(茶母)의 일을 시켰다가 다시 성적이 올라야만 의녀로 복귀시켰다는 기사가 있다. 다음, 중앙의 여러 관청뿐 아니라 정조 때 만든 군영인 장용영(壯勇營)에도 다모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방 군현에도 다모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숙종 27년 10월 20일자 기사에는 포도청에 ‘다모간(茶母間)’이라 하여 다모들이 거처하는 처소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림 12> 드라마 다모의 여주인공 2003년 7월부터 9월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MBC 드라마 ‘다모’의 주인공 채옥의 모습. 출처: http://www.imbc.com

이상을 종합해보면 원래 다모는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관비(官婢)의 일종이었는데, 내외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던 조선사회에서 여성과 관련한 범죄 수사나 정보 수집, 여성 피의자 수색이나 검시 등을 담당할 여성들이 필요함에 따라 형조나 포도청 등에 소속된 다모가 수사권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세기 초에 관리를 지낸 송지양(宋持養, 1782-?)이 쓴 소설 <다모전(茶母傳)>에 한성부 소속 다모 김조이(金召史)의 금주령(禁酒令) 위반 범인 체포에 관한 활약상도 당시 다모의 활동과 전혀 동떨어진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믿거나 말거나 앞서 소개한 『한국의 풍토와 인물』을 쓴 김화진의 술회에 따르면 다모는 키가 5척(尺) 정도로 커야 했으며, 막걸리 세 사발을 단번에 마시고 쌀 다섯 말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여장부이어야 했다. 또한 다모는 치마 속에 2척(尺)쯤 되는 쇠도리깨와 오라를 차고 다니며, 필요한 경우 그 도리깨로 집의 문을 부수고 범인을 묶어가지고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포도청 사람들은 딱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일선 경찰서의 경찰, 형사, 여경 등의 모습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사명감이나 그들 나름의 애환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포도청, 경찰청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못하다. 공안통치의 핵심 기구이자 한 때 악명 높은 고문으로 유명했던 포도청, 그리고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의 경찰청. 이런 어두운 면모를 걷어낼 수만 있다면 조선의 포도청이나 지금의 경찰청 모두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직이라는 점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