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능지처사,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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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사,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심재우(중세사 2분과)

1. ‘각을 뜬다’는 것은?

“미제의 각을 뜨자!”
“전○○의 각을 뜨자!”

  198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분들이라면, 특히 학내에서의 각종 민주화 시위에 적극 참여했던 열혈 학생이라면 간혹 위와 같은 말을 외친 적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1986년에 대학에 입학한 겁 많고 소심했던 필자의 경우 이 당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 속에서 위와 같은 절규하는 외침을 들은 기억이 있다.

  독재 타도, 반미 자주화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그 시절, 이 땅의 민주화를 거스르는 독재정권과 거대 제국을 향한 저주의 외침은 비장한 자신의 마음 속 심경을 보여주는 호소력 있는 메아리였음에 분명하다.


<그림 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전경. 중앙도서관 앞과 대학본관 사이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1980년대 서울대학교 학내 집회 장소로 많이 애용되었다.

  당시에도 그 뜻을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필자는 요즘 들어 ‘각을 뜬다’는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표현인가 새삼 되새긴다. 혹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족을 단다면 ‘각을 뜬다’의 ‘각(脚)’은 짐승의 고기 조각을 말한다.

  북한에서 ‘각을 떠서 매 밥을 만들어도 시원치 않다’는 속어가 있는데, 이 말은 뼈 속 사무치게 증오스런 대상에 퍼붓는 욕으로서 사지를 따로따로 떠서 매 먹이를 만들어도 맺힌 속마음이 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지금이야 구호 속, 혹은 욕설 속에서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실제로 사람의 각을 뜨는 형벌이 존재했으니 그것이 바로 ‘능지처참’이다. 끔찍하고 찝찝한 이야기이지만 아래에서는 능지처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해봐야 소용없는 말이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 혹은 나이 어린 아이들은 가능한 읽지 않기를 바란다.

 2. 능지처사, 더 이상 잔혹할 수 없는

능지처참(凌遲處斬)에서 ‘능지’의 원래 뜻은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를 말한다. 따라서 능지는 가능한 한 느린 속도로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능지처참은 천천히 칼로 한 점 한 점 몸을 베어내고 거의 다 베어냈을 때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 죄인의 목숨을 빼앗은 형벌이다. 흔히들 ‘능지처참’이라고 말하지만, 법전에 나오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는 용어가 더 맞는 표현이다.

  죄인의 몸에 갈기갈기 난도질을 해서 죽이는 가장 잔혹한 극형 중 하나인 능지처사는 중국의 오대(五代) 시대인 10세기 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산 사람의 살을 베어 죽인 사례가 없진 않았지만, 이 무렵 정식 형벌로 채택되어 행해졌다.

  반역자나 폐륜아를 처단하는 극형으로 이 때 시작된 능지처사의 형벌은 송, 원, 명을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송나라에서는 능지처사의 공개처형이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송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지(水滸志)』에 등장하는 이규가 황문병이란 인물의 살을 베어 죽이는 대목은 이렇다.

  이규는 “너는 빨리 죽고 싶겠지만 내가 천천히 죽여주마” 라고 말하고 비수를 꺼내어 황문병의 사타구니부터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려낸 가장자리에서 먹음직스런 살점을 숯불로 구워 술안주로 하여 집어넣었다. 이윽고 다 베어낸 살점이 없어지자 이규는 비수로 황문병의 흉부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어 취기를 가시기 위한 술국을 끓였다.


<그림 2> 『수호지』에 나오는 능지에 처하는 장면. 판화 상태가 좋지 않지만 소고기나 돼지고기 자르는 모습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충의수호전서(忠義水滸全書)』 수록, 명나라 간행).

그런데 능지처사가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원나라 때의 능지는 120회의 살베기로 끝났지만, 명나라 때의 칼질의 횟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명 정덕 연간인 1510년 환관 류근은 모반죄로 무려 3,357도(刀), 즉 3,357회의 칼질을 당했고,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관리 정만이란 자는 숭정 연간인 1639년에 앞서 소개한 류근보다 더 많은 3,600번의 칼날을 견뎌야 했다.

  환관 류근의 능지처사 집행 현장에 있었던 인물의 기록에 의하면 형의 집행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처음 하루는 엄지, 손등, 흉부의 좌우로 357회의 칼질로 몸을 얇게 베어냈는데, 형을 집행한 자가 10도(刀)마다 잠깐 쉬었고, 중간 중간에 기절한 죄수를 깨웠다. 저녁에는 감옥에 가두어 죽을 먹인 후 다음날 다시 칼질이 시작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정해진 칼질의 횟수를 채웠다고 한다.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도려낸 살점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인들이 중국어를 습득하기 위한 외국어 교재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라는 책자에는 원나라 수도인 북경성 내에서의 능지처사 집행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형장에 세워진 큰 기둥에 죄수를 묶고 사형 집행을 담당한 자가 칼로 살점을 도려내어 개에게 먹이고 뼈만 남겼다. 또한 앞서 소개한 숭정 연간에 처형된 정만의 잘게 썰린 살점은 형 집행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팔렸는데, 당시 군중들은 부스럼을 치료하는 약의 원료로 정만의 인육을 샀다고 한다.


<그림 3> 중국어 교재인 『박통사언해』. 원나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수도 북경성에서 시행한 능지처사 집행 장면도 적혀 있다.

청에서 집행한 능지처사의 경우 죄수들의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칼질이 앞선 시기보다는 덜했다. 즉 청대에는 능지처사의 칼질 수가 8도(度), 24도, 36도, 72도, 120도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중 24도, 즉 24회에 걸쳐 살을 도려내는 순서는 먼저 1ㆍ2도로 양 눈꺼풀, 3ㆍ4도로 양 어깨 살, 56도로 양 젖가슴, 7ㆍ도로 양손과 양팔 사이, 9ㆍ10도로 양 팔과 양 어깨 사이, 11ㆍ12도로 양 넓적다리 살, 13ㆍ14도로 양다리의 장딴지, 15도로 심장, 16도로 목을 자르고, 17ㆍ18도로 양손, 19ㆍ20도로 양팔, 21ㆍ22도로 양 발, 23․24도로 양 다리를 잘랐다. 한편 8도, 즉 8회에 걸쳐 살을 잘라내는 경우는 먼저 1ㆍ2도로 양 눈꺼풀, 3․4도로 양 어깨, 5ㆍ6도로 양 젖가슴, 7도로 심장을 관통하고, 8도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림 4> 청나라에서 시행한 능지처사. 불륜을 저지는 남녀를 능지처사에 처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가운데 나무에 묶인 여성의 두 팔은 이미 잘려나간 상태이며, 이어서 왼쪽 다리를 자르는 장면이다. 좌측 편에 칼을 들고 있는 자는 곧 있을 참수를 준비하고 있고, 오른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성은 다음 능지처사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금산현보갑장정(金山縣保甲章程)』에 실려 있다.


<그림 5> 능지처사에 처할 때 양 눈꺼풀에 먼저 칼질하여 죄수의 눈을 가리는 장면. 『대청형률(大淸刑律)』 도설(圖說)에 실려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능지처사의 칼질이 양 눈꺼풀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눈꺼풀을 얇게 저며 눈을 가림으로써 능지처사를 당하는 죄수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극형을 집행하는 마당에서도 뇌물은 오고갔다. 즉 사형 집행인의 재량으로 목숨을 끊는 것에 완급이 조절되곤 했는데, 죄수의 가족으로부터 웃돈을 받는 경우 집행인은 능지처사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대번에 심장을 칼로 찔러 생명을 끊고, 그 후에 신체를 풀어헤치는 관용을 베풀었다.

3. 조선에서는 거열(車裂)로 대신하다

  중국 역사 속에서 오랜 세월 지속되었던 능지처사의 형벌은 물론 조선왕조 수도 한양에서도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내내 능지처사의 극형이 종종 시행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어떤 자들을 능지처사의 극형으로 처단했을까?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보통 형법으로 채택해서 썼는데, 『대명률』의 내용 중에는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이 여럿 등장한다.

 『대명률』의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을 열거하면 우선 역모를 꾀하거나 종묘, 왕릉, 궁궐을 훼손한 경우인데, 이같은 모반․대역죄인은 모의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주모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관계없이 모두 능지처사로 처단하였다.

  다음으로 조부모, 부모, 외조부모를 살해하거나, 남편, 혹은 남편의 부모, 조부모를 살해한 자, 주인을 살해한 노비 등 당시 관념으로 도저히 용납못할 폐륜 살인을 저지른 자도 능지처사로 다스렸다. 일가족 3명을 살해하거나,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여 살해한 자, 외간 남자와 짜고 본 남편을 살해한 처ㆍ첩도 능지처사의 형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요컨대 반역자는 물론이고 살인을 저지는 폐륜아․흉악범들은 능지처사로 처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림 6> 1757년 프랑스에서 집행한 거열형 장면(『고문실의 쾌락』, 238쪽). 다미앵이란 인물이 국왕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후 네 마리의 말에 몸이 묶여 찢겨죽는 모습이다. 조선에서 시행한 능지처사의 집행도 수레가 동원되는 점 말고는 이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사실은 조선에서 능지처사의 집행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대개 수레에 죄인의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로 대신했다는 사실이다. 거열은 ‘환형(轘刑)’, ‘환렬(轘裂)’이라고도 하였는데, 중국 고대에서는 대개 다섯 대의 수레로 몸을 찢었다.

  거열로 능지처사를 대신한 사례로 조선 건국 초기인 태종대의 예를 들어보자. 태종 7년(1407) 충청도 연산현의 시골 여인이 이웃 남자와 짜고 남편을 유인, 살해해 시신을 땅에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주모자인 부인 내은가이(內隱加伊)에 능지의 형이 내려졌다.

  당시 황희(黃喜)는 태종에게 이전부터 능지처사는 거열(車裂)로 대신했다는 사실을 아뢰어 내은가이는 서울의 저자에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거열되었고, 그녀의 절단된 사지는 여러 도로 나누어 전시된 사실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수를 거열하였다는 세조, 성종대 기사를 통해 볼 때 조선에서 능지처사는 곧 거열형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죄인의 거열 장소는? 능지처사, 즉 거열형은 도성 밖에서 집행하던 일반 사형 죄수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도성 안 저자 거리에서 연출되었는데, 지금의 서울시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근처에 있었던 군기시(軍器寺) 앞길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림 7> 군기시가 있던 서울시청 근처 한국프레스센터 사진. 조선시대 거열형은 이 앞길에서 주로 집행하였다.

  특히 역모에 연루된 죄인을 거열할 때에 임금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모든 관리들을 군기시 앞 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싫든 좋든 거열하는 장면을 보도록 했는데, 세조가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관련 죄수를 처단할 때 이같이 지시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거열 후 절단된 머리는 효시(梟示)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으며, 잘라낸 팔과 다리는 팔도의 각 지역에 돌려보이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죄인의 머리를 내거는 장소로 쓰인 곳은 대개 지금의 종로2가 보신각 근처에 있던 철물교(鐵物橋)였다.

  경우에 따라 능지처사한 죄수의 머리는 3일 이상 매달아두거나, 여러 곳에서 효시를 하기도 하였다. 소론 강경파로서 경종 때 신임사화를 일으키고, 영조 즉위 후에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박필몽(朴弼夢)에 대해 1728년 4월에 영조가 내린 조치가 그것이다. 당시 박필몽은 군기시 앞길에서 능지처사되었고, 그의 머리는 저자거리에서 6일간 효시된 후 소금에 담가 반란군 소탕 본부인 도순무영에 보내져 다시 효시되었다. 그의 팔다리는 별도로 8도에 각각 보내졌음은 물론이다.


<그림 8> MBC 창사 46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영조 역을 맡은 탤런트 이순재. 영조는 탕평책, 균역법 등 과감한 정치, 재정 개혁을 단행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지만, 조선의 다른 군주와 마찬가지로 대역 죄인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단하였다.

4. 육시, 부관참시 그리고 박피

  앞서 조선에서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과 그 집행 사례를 소개하였는데, 능지처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육시와 부관참시가 있다.

  요즘도 간혹 들을 수 있는 욕인 ‘육시랄 놈’이란 말에 등장하는 ‘육시(戮屍)’란 시신을 훼손하는 형벌로, 죽은 자에 대한 능지처사로 생각하면 된다. 조선왕조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취조 도중에 죽은 대역죄인의 시신은 종종 육시를 했다.

  세조 때 고문으로 죽은 사육신 일부가 육시된 것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앞서 언급한 박필몽과 함께 신임사화의 빌미를 제공한 목호룡(睦虎龍) 역시 영조 즉위년인 1724년에 육시를 면치 못했다. 목호룡이 고문으로 옥중에서 급사하자 영조는 당고개(지금의 지하철 당고개 역 근처로 오해하면 안되며, 삼각지로터리에서 공덕동로터리 쪽으로 조금 가면 위치하고 있다)에서 목호룡의 시신을 토막내어 머리는 서소문 밖에 효시하였고, 사흘 뒤에 다시 머리와 팔, 다리를 지방에 돌려 보이게 하였다.

  대역죄인으로 몰리면 끔찍한 수난은 무덤 속 시신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무덤을 파헤쳐 관을 부수고 시신의 목을 잘랐으니, 연산군 때에 김종직(金宗直), 한명회(韓明澮)는 물론이고 임금의 유모까지도 이같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이쯤 해서 글을 끝냈으면 하는 독자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왕 능지처사에 대해 말한 김에 마지막으로 잔혹함에서 결코 능지처사에 뒤지지 않는 중국에서 행한 형벌인 ‘박피(剝皮)’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로 한다.

  박피는 살아있는 사람의 살가죽을 칼로 벗겨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명나라 때 박피의 형벌이 간간이 시행되었다. 명의 태조 주원장은 탐관오리를 처형할 때 박피, 즉 산 사람의 피부를 벗겨 낸 뒤 그 안에 잡초를 넣고 꿰매 인형을 만들어서 관청 안에 걸어두곤 했다. 그리고 명의 7대 임금 무종은 1512년 모반을 꾀한 자들 가운데 6명의 박피를 명하여, 벗겨낸 가죽으로 말안장을 만들어 자신의 말에 올려놓고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림 9> 서양인이 촬영한 청나라 말기의 능지처사 집행 사진. 보기 거북한 사진이지만 사실적 상황을 묘사하고자 올리니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사람의 잔인함이 도대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기회에 좀 더 차분히 찾아보기로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능지처사는 조선의 경우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청의 경우 1905년에 각각 금지되었다.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요즘이지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법전 속에서 과거의 잔혹한 형벌을 몰아낸 이성의 힘은 분명 찬사 받아야 마땅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