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생원·진사만 문과를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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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3


생원·진사만 문과를 볼 수 있는가?

 

박현순(중세2분과)


조선시대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생원진사시가 있었다. 그러나 사료상에서 ‘과거’라고 하면 흔히 문과와 생원·진사시를 일컫는다. 더 좁게 문과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흔히 과거라고 하면 문과와 생원진사시를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이 때문인지 생원·진사시에 합격해야 문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별개의 시험으로 반드시 생원·진사가 되어야 문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국가에서 유교적 교양을 갖춘 유생(儒生)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생원·진사는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유생으로서 군역(軍役)을 면제받았으며, 국학인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은 장래에 국가를 짊어질 동량(棟樑)을 양성하는 곳으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학식이 뛰어난 관료들을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성균관에서 수학한다는 것은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문과 초시 때는 관시(館試)가 따로 실시되었다. 일반 유생들은 거주지별로 한성시(漢城試)나 도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으나 성균관에서 일정 일수 이상 수학한 유생은 성균관에서 치르는 관시(館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관시는 같은 초시인 한성시나 향시에 비해 응시 인원은 적고 선발 인원은 더 많았다. 또 조선초기에는 성균관 유생에게만 알성시나 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문과에 급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부여되었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문과 급제자 중에서 생원·진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75%를 웃돌았다. 문과 급제자 10명 중 7-8명은 생원·진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생원·진사가 되어야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오해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머지 25%는 생원·진사가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幼學)으로 문과에 급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있다. 이항복은 1580년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덕형은 같은 해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동무가 되어 개구지게 놀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기록은 두 사람이 문과 급제를 계기로 교유하게 된 것으로 전한다.

 
[그림 1] 이항복(李恒福)의 초상화(17세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항복은 유학(幼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의 영예직을 두루 거쳤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2011,『초상화의 비밀』120쪽 수록

   1582년(선조 15) 이이(李珥)는 이항복과 이덕형을 국왕 선조의 강학(講學)을 도울 인재로 추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추천된 이정립(李廷立, 1556-1595)과 함께 3이(李) 혹은 삼학사(三學士)로 세간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이조좌랑,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제학 등 문과 출신자의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는 공통점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사람이 생원·진사가 아닌 유학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전기 문과급제자들의 관력(官歷)을 보면 한림(翰林)이나 문형(文衡)과 같은 문관의 영예직 담당자들 가운데는 생원·진사의 비중이 더 높았다. 사회적으로 생원·진사들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유학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그런 풍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사실 이항복이나 이덕형이 생원·진사가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너무 일찍 문과에 급제한 탓이기도 하였다. 이항복은 스물다섯 살, 이덕형은 스무 살에 급제하였는데, 이 시기 생원·진사들의 평균나이는 31.1세였다. 이들은 미처 생원·진사가 될 틈도 없이 문과에 급제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더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생원·진사가 아니면서 문형(文衡)을 맡은 인물로는 이외에 태종대의 권제(權蹄, 1387-1445), 선조대의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문과급제자 중 생원·진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한림이나 문형 등의 문한직이나 고위 관료 가운데서는 그 비중이 더 높았다.

   18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18세기 문과급제자 중 생원·진사의 비율은 겨우 40%를 넘는 정도였다. 이때부터 문과 급제자 중에서 유학 등 생원·진사가 아닌 사람들이 생원·진사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문과와 생원·진사시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표 1]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구성 : 생원·진사와 비생원·진사의 비교  ⓒ박현순

   17세기와 18세기의 다른 경향은 그 흐름을 좇아가 보면 17세기 후반부터 조짐이 보인다. 이때부터 유학의 급제가 가파르게 늘어난 반면 생원·진사는 선발 인원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답보상태를 보이다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영조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다시 늘어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선발인원의 증가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같은 시기 유학의 급제는 더 많이 늘어났다.

   그렇다면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현재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답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생원·진사와 유학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논의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실제 시험의 과정을 보면 이 논의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17세기에는 생원·진사시 응시자 숫자가 빠르게 증가하였는데, 숙종대 한성시 응시자 수는 11,000 여명에 이르렀다. 그 답안을 10개 전후의 등급으로 나누어 채점하였는데, 당락이 결정되는 차하(次下)를 전후해서는 동점자가 수십 수백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우열을 따져 200명을 선발하기는 하였으나 워낙 동점자가 많았기 때문에 합격자와 탈락자 사이에 근원적인 능력의 차이가 있었다고 논하기는 어렵다. 또 조선전기와 달리 지방 교육이 활성화된 반면 성균관 교육은 유명무실화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생원·진사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교육이나 학문의 측면에서 생원·진사와 유학 사이에 우열을 논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시험 종류에 따라 생원·진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18세기 선발 인원이 가장 많았던 식년시, 증광시, 정시에서 생원·진사가 차지한 비율을 보면 식년시는 10%, 증광시는 70%, 정시는 50% 정도였다. 생원·진사들은 식년시에서는 그 비중이 미미하였으나 증광시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각 시험의 시험과목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식년시는 여러 과목을 시험하였지만 18세기에는 회시 초장의 강경(講經)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었다. 사서삼경을 토를 달아 암송하고 그 뜻을 풀이하는 시험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17세기부터 나타나는데, 결과적으로는 식년시를 암송시험이라 하여 경시하는 풍조를 낳았다. 이 때문에 생원·진사들은 아예 식년시에 응시하지 않고 제술 시험 준비에 치중하였다.

   영조대에는 성균관의 생원·진사 중에 강경을 공부하는 자가 적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1736년(영조 12) 성균관에 거재하던 생원·진사 94명 중 강경을 공부하는 유생은 15명에 불과하였다. 생원·진사의 10-20%만이 식년시 응시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실제 18세기 식년시 급제자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평안도 출신의 유학들이었다.


[그림 2] 1660년 김총(金璁)의 식년시 강경 시험 채점지  사서삼경의 책이름 아래에 김총이 강한 장의 구절, 성적이 기록되어 있다. 총점은 14분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반면 증광시는 사서의(四書疑), 논(論), 부(賦), 표(表), 대책(對策) 등 다양한 과목에서 급제자를 뽑았다. 그 중에서 표와 대책은 다른 과목에 비해 어렵다는 이유로 점수를 두 배로 주었기 때문에 증광시에서는 표나 대책을 잘 짓는 유생이 더 유리하였다. 이와 달리 정시는 시기마다 출제 경향이 달랐으나 영조대 이후에는 부(賦)를 주로 출제하였다. 부는 누구나 쉽게 지을 수 있는 문장 형식으로 상대적으로 변별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즉, 생원·진사들은 변별력이 높은 증광시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으나 변별력이 낮은 정시에서는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런 경향이 나타난 요인 중 한가지가 수험 전략의 문제였다. 유학은 생원·진사시와 문과에 함께 응시하였기 때문에 생원시·진사시·문과의 시험 과목을 모두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따라서 문과 과목 중에서는 진사시 과목과 겹치는 부(賦)를 보다 집중적으로 익히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반면 생원·진사들은 문과에만 응시하였기 때문에 부 외에도 배점이 높은 표와 대책을 보다 집중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생원·진사들은 유학에 대한 우위가 약화되는 가운데서도 표와 책이 출제되는 증광시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에는 유학들의 문과 급제가 더욱 늘어나 생원·진사의 비중은 25% 이하로 줄어들었다. 시험 종류를 불문하고 생원·진사들의 비교 우위가 사라지고 문과와 생원·진사시는 완전히 괴리되어 버렸다. 그러나 증광시에서는 생원·진사가 여전히 45% 정도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증광시는 여전히 생원·진사들에게 보다 유리한 시험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