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과거 공부법과 수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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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과거제도 속으로 #5

과거 공부법과 수험서

박현순(중세2분과)

조선시대 양반에게 과거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과거 응시는 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의무였다. 반대로 부형들은 자제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자제들의 교육 과정을 마련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형들의 몫이었다. 부형들은 집안의 전통과 자신의 경험을 살리고 주변의 성공담, 일반적인 교육 이론 등을 참고하며 자제들을 위한 교육 과정을 마련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제들은 기대를 따라 주지 못했다. 부형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들의 교육법이 적절한지 고민해야만 했다.

   남자아이들의 교육은 유교 경전과 역사에 대한 이해, 한문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 능력은 사족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일 뿐 아니라 과거 시험에서 요구하는 능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청소년기까지의 교육은 일반적인 소양 교육과 과거 시험공부가 하나로 합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예닐곱 살 즈음부터《천자문》을 통해 글자를 익히고,《소학》,《효경》등을 거쳐《사략》,《고문진보》, 사서삼경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이황의 고제(高弟)로 유명한 조목(趙穆, 1524~1606)은 열두 살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고 하는데, 연보에 특기한 것을 보면 상당히 이른 나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내용을 음미하는 숙독보다는 기본적인 경서를 섭렵하고 암송하는 데 보다 주안점을 두었다.

   십대 중반이 지나면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과거 시험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집을 떠나 동년배들과 절에 올라가 경서와 문장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다. 때로는 고을이나 동네에서 과거 준비를 위한 집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곧 결혼을 하고 집안일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조용히 공부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일상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시험 준비에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사오십대에 이른 유생들은 특별히 시험 준비를 하기 보다는 이삼십년 동안 쌓아 온 독서와 경륜을 바탕으로 그 때 그 때의 시험에 응시할 뿐이었다. 시험 준비에 보다 집중하는 기간은 20~30대의 일이었다.

   과거 시험은 유교경전과 역사, 문장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글을 짓는 시험으로, 기본적인 수험 교재도 사서오경과 역사서, 문장서 등 사대부로서의 소양을 다지기 위해 익히는 서적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문한(文翰)을 담당할 관원을 선발하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업무 수행과 관련된 보다 전문화된 문장을 짓는 법을 익혀야 했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관련 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중국서적인《원류지론(源流至論)》,《책학제강(策學提綱)》,《단지독대(丹墀獨對)》,《송파방(宋播芳)》,《원파방(元播芳)》등이 모범적인 교재로 인식되었다. 이 중 내용이 확인되는《송파방》과《원파방》은 각각 송대와 원대에 저술된 산문을 뽑아 만든 중국의 문선집으로 표(表), 전(箋), 제고(制誥), 소(疏) 등 조정에서 사용되는 공식문서를 주로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말선초에 간행하여 보급한 바 있으며, 중종 대에도 다시 간행하였다.

   보다 직접적으로 과거 수험서로 기능한 것은《삼장문선(三場文選)》이다. 이 책은 원나라 때의 유림(劉霖)이 향시, 회시, 전시 답안을 모아 편찬한 책인데, 1341년 유정(劉貞)이 대책(對策), 경의(經疑), 고부(古賦)로 나누어 다시 간행하였다.《삼장문선》은 고려 때부터 수험서로 활용되었는데, 조선 초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 판본을 복각한 목판본, 활자본, 복각본 등을 간행하여 과거 수험서의 고전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 국가에서 간행한 수험서는 모두 중국의 책을 다시 간행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답안을 모은 책들을 간행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문종실록》에 따르면 주자소에서 비공식적으로《대책(對策)》을 간행하여 유통한 바 있으며, 정인지는 정식으로《어제대책(御製對策)》을 간행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유생들이 독서를 소홀히 하고 선유(先儒)들의 글을 표절하는 데 골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 후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명종ㆍ선조연간 목활자로 된《전책정수(殿策精粹)》,《동책정수(東策精粹)》가 간행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훈련도감자로 된《진영수어(震英粹語)》가 간행되었다. 이 책들은 모두 대책(對策)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과거 시험의 답안을 모은 것이다. 또 중국과 우리나라의 부(賦)를 모아 합편한《선부(選賦)》라는 책도 간행되었다. 이런 책들의 등장은 문과를 겨냥한 전문적인 과거 수험서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림 1] 《동책정수(東策精粹)》2권 2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중종ㆍ명종대에 작성된 책문을 뽑아 편찬한 책이다. 문제와 답안의 작성자 이름, 답안을 수록을 수록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디브러리

   응시자인 유생들은 물론 부형들도 보다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모색하였다. 합격이라는 정해진 목적이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보다 쉬운 방법으로 더 빨리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전문 수험서의 등장은 이런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책만 읽는다고 문과 급제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과는 학술과 문한을 담당할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으로 유생들도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아야 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급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하였다.

   17세기 문장가로 유명한 택당 이식(李植, 1584-1647)은 쉰아홉이 되던 1642년에 자손들을 위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공부법을 정리하였다. 그가 남긴 공부법에는 유가경전이나 저명한 문장서 외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양웅(楊雄) 등의 제자백가서나《한서》와《사기》등의 역사서, 조선에서 금기시한《노자》,《장자》,《열자(列子)》등 도가 경전도 활용하도록 하였다. 또 시험에 출제되는 사륙문(四六文)이나 조선의 과문(科文)을 뽑아 집중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즉, 기본적인 경서나 역사서, 성리서, 문장서, 문집 외에도 이단시되는 도가 경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좋은 문장을 발췌하여 익히도록 하였다.

이식이 전한 공부법의 핵심은 다양한 서적에서 좋은 글들을 발췌하여 자신만의 노트를 만들어 반복적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발췌를 통해 글을 익히는 것은 조선초기부터 일반화된 과거 공부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췌한 책은 흔히 ‘초집(抄集)’이라고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사람의 과문을 뽑아서 초집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이런 책들은 오늘날까지《동책(東策)》,《동부(東賦)》,《동표(東表)》등의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전책정수》나《동책정수》역시 초집에 해당된다. 다만 이 책들이 간행본으로 보급된 것과 달리 조선후기의 초집은 개인들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뽑아 만든 필사본으로 그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초집은 수험생이 직접 뽑기도 하지만 보다 글에 능한 부형들이 만들어 후손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그림 2] 《동표(東表)》1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과문 중 하나인 표문을 뽑아 필사한 책이다. 특이하게 인조반정 후 처형된 이이첨(李爾瞻), 이재영(李再榮), 이대엽(李大燁)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디브러리

   이식이 전한 공부법은 가장 모범적인 과거 공부법이면서 자녀들을 가르치는 부모에게는 실용적인 지침이 되었다. 이선(李選, 1631~1692)은 노년에 자손들을 가르치는 교육법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이식의 공부법을 모범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많은 부형들은 이식과 마찬가지로 자손들이 정도(正道)를 따라 착실히 공부를 쌓아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가급적 수고를 줄이며 효율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고자 하는 본연의 욕망에 짝하여 전문적인 과거 공부법도 발달하였다. 정조대 학자 윤기(尹愭, 1741-1826)가 전하는 방법은 가장 나쁜 사례일 것이다.

“아이가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주흥사(周興嗣)의《천자문》을 가르치고, 글자를 이어서 읽게 되면《사략(史略)》초권이나《통감(通鑑)》초권을 가르친다. ㆍㆍㆍ 또《맹자》나《시경(詩經)》국풍(國風)을 가르치고 여름이 되면 먼저《당음(唐音)》절구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당음》장편(長篇)을 가르쳐 오언시와 칠언시, 산문을 짓게 한다. 관례를 치르고 결혼을 하면 우둔하여 깨닫지 못하는 아이는 여기서 그만두고 조금 재주가 있는 아이는 유서(類書)를 섭렵하고 우리나라 사람의 과작(科作)을 본다. 시에 압운(押韻)을 할 수 있고 산문을 지을 수 있으면 곧 과장에 들어가 합격할 생각을 한다.” [윤기,《무명자집(無名子集)》]

   윤기가 전하는 방법은 가장 기본적인 초학서를 익힌 후에 바로 유서(類書)와 과문 초집을 통해 과거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식이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도록 한 것과 달리 전문적인 수험서로 독서를 대체한 것이다.

   선유(先儒)들이 지은 과문은 모범답안으로서 과문의 형식이나 체제를 익히기 위하여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참고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장에 대한 탐구도 없이 과문만 익히면 창의적인 글을 짓지 못하고 결국에는 표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이었다.

   유서는 주제별로 여러 책에 수록된 내용을 한꺼번에 찾아 볼 수 있도록 편찬한 참고서였다. 이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뿐 아니라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성종대 이래 중국 송대에 편찬된《사문유취(事文類聚)》가 널리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에는 그 중 일부를 발췌한《사문유취초(事文類聚抄)》나《사문초(事文抄)》,《고금사실류취(古今事實類聚)》등의 초집류가 간행되었다. 또 경서(經書)의 어구를 뽑아 인용에 편하게 한《경서류초(經書類抄)》도 간행되었다. 유서 초집은 과거 수험을 도와주는 전문적인 참고서적으로 민간 출판업자들이 간행하여 보급하였는데, 그만큼 수요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서 초집이 등장하면서 나타난 결과는 여러 책을 두루 읽고 학식을 넓히기보다 출제 경향을 중심으로 필요한 부분만 익혀 식견이 좁아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림 3] 《사문유취초(事文類聚抄)》3권 3책(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전라도 태인의 민간 출판업자인 전이채(田以采) 박치유(朴致維)의 이름으로 간행된 방각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디브러리

   수험생의 입장에서 보면 과문 초집이나 유서 초집은 상당히 실용적인 책이었다. 그러나 통합적이고 균형 잡힌 식견과 문장력을 배양한다는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공부를 방해하고 편법을 조장하는 유해한 서적이었다. 또 시험장에 갖고 들어가 부정을 저지를 때 활용하기 쉬운 위험한 책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시험장에 초집을 갖고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과거 공부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 글을 지어 주위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이다. 오늘날의 모의고사다. 글짓기는 어린 시절부터 익히지만 성년이 되어 과거를 준비할 때에는 출제 경향에 맞추어 과문을 집중적으로 지었다. 1792년 정조는 구일제에서 입격한 유생들을 불러 평소에 과문을 얼마나 지었는지 물었는데, 1등을 한 이옥(李鈺, 1760-1815)은 표 500수, 책 백여 수를 지었다고 답했고, 2등을 한 오태증(吳泰曾, 1754-?)은 표 수백 수, 책 수십 수, 시 700수를 지었다고 답했다. 본격적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성년기에 이르면 연습으로 수백수의 과문을 짓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유생에 따라서 많이 짓는 글의 종류는 달랐다. 1795년 정조는 직접 문제를 내어 유생들을 시험하면서 88명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하였는데, 어떤 유생은 부(賦)를 주로 지었다고 답했고, 어떤 유생은 표(表)를 주로 지었다고 답했다. 예를 들어 이황의 후손인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은 부만 700수를 지었다고 대답한 반면 이만상(李晩祥)은 표는 900수, 부는 100수를 지었다고 답했다. 각자 자신에게 보다 유리한 문장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익히는 응시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대책의 경우 88명 중 13명만이 지은 글이 있다고 답했는데, 당시에는 대책의 출제 빈도가 낮았기 때문에 응시자들도 크게 유의하지 않았던 탓이다. 응시자들은 출제 경향에 따라, 또 자신에게 보다 유리한 과목을 골라 자신만의 공부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시험의 목적은 평소의 공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시험공부는 공부 자체가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로 성격이 변질되기 마련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합격을 위한 시험공부법은 더욱 전문화되고, 본연의 공부와 과거 공부법 사이의 간극도 커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공부를 가리키는 ‘독서’와 시험공부를 가리키는 ‘거업(擧業)’은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