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인물과 사건] 『난중일기』 ; 일기 속의 장군, 그리고 인간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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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일기 속의 장군, 그리고 인간 이순신

신병주(중세사 2분과)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일기이다. 왜적과 대치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매일의 일기를 정리해 나간 것에서 이순신의 섬세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한 달 전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친필 초고는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현재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림 1) 이순신의 친필편지

1. 『난중일기』 속의 인간 이순신

본래 이순신의 일기에는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찬자의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서 권5에서 권8까지에 걸쳐 이 일기를 수록하고 있다.

  친필 초고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일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것은 친필 초고를 정자로 새겨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했기 때문이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엄격한 진중(陣中) 생활과 국정에 관한 감회, 수군 통제에 관한 계획, 일상생활, 가족 및 친지를 비롯하여 부하 등 주변 인물들의 상황, 부하들에 대한 상벌, 전황의 보고 등으로 임진왜란의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난중일기』에는 전쟁 영웅 이순신의 모습 이외에 가족을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 곳곳에 피력되어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와 아들을 잃은 아픔이 진솔하게 일기에 표현되어 있으며, 그와 고락을 나누었던 군사들에 대한 애정과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는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1545년 3월 8일 자정 한양의 건천동에서 이순신을 출산했다. 출산하기 전 변씨의 꿈에는 일생을 충절로 바친 그의 시아버지가 나타나,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순신이라 하라” 고 하였다고 한다. 깨어난 변씨는 곧 그 사실을 남편인 이정에게 고하고 아이의 이름을 순신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일기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정을 짤막한 문장으로 곳곳에 표현하였다. 1593년 5월 4일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지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오래 사시기를 축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다” 라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님이 평안하신 줄 알다. 다행이다.” (1594년 5월 5일), “오랫동안 어머님의 안부를 듣지 못하니 답답하다.” (1596년 8월 12일), “어머님의 소식을 못 들은 지 7일이나 되니 몹시 초조하다.”(1595년 5월 15일),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 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오게 하였다.”(1597년 4월 11일) 라고 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1597년 4월 13일 이순신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안으로 들어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이루 다 적으랴”.

어머니의 사망 후에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에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들의 죽음까지 겪어야 했다. 1597년 10월 14일에는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영(이순신의 아들)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지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이순신이 구국의 명장으로 그 공을 떨치게 된 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도운 부인의 공도 적지 않다. 이순신의 아내는 상주 방씨 방연화로서, 방씨 부인은 어려서부터 용모와 덕행 뿐만 아니라 학문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아버지 전 보성군수 방진은 무남독녀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영의정 이준경을 찾아가서 이순신을 사윗감으로 결정하고 1566년 8월 혼례를 치르게 하였다. 『난중일기』에는 부인 방씨에 대한 언급은 6곳 으로 1594년에 3번, 1595년에 1번, 1597년에 2번의 기록이 보인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매우 중하다 한다. 그러나 나라 일이 이러하니 다른 일은 생각할 수 없다.” (갑오년 8월 30일)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약하다 하니 걱정스럽다.” (갑오년 9월 2일)
“아내는 부이 난 뒤로 심신이 많이 상해져 천식이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을미년 5월 16일)

위의 기록들에는 아내의 병을 걱정하는 인자한 남편 이순신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내의 병에 대해서는 최대한 절제하려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순신은 가족 뿐만 아니라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군사와 동료, 그리고 전쟁 속에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1596년 1월 23일) 거나,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1597년 5월 13일의 일기에서는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라는 구절도 있으며, 그의 군사가 백성의 물건을 훔쳐 먹었을 때는 엄하게 벌하고 대신 갚아주기도 했다. 엄격하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림 2 자료출처 : 현충사) 이충무공 영정

2. 원균에 대한 분노, 유성룡에 대한 신뢰

『난중일기』 곳곳에는 이순신과 대표적인 군사적 라이벌로 인식되는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격한 감정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원균에 대해 서술한 내용의 대부분은 원균을 비판한 것으로 이순신도 ‘성웅’이기 이전에 ‘인간’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 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아주 괘씸하였다.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경상도 수사 원균을 나무랐다. 이 모두가 경상도 수사 때문이다.” (1593년 2월 22일)
“이영남과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서 원균의 옳지 못한 행동을 들으니 절로 탄식이 나왔다. (1593년 3월 2일)
“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하였다. 배 안의 모든 군사들이 분개하였다. 그 망측한 꼴을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위의 기록들에서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적대감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원균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전장에서도 원균과는 거리감을 두고 협조하지 않는 상태로 이어졌다.

“경상도 수사 원균이 웅천에 있는 적들이 감동포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며 함께 물리치자고 공문을 보내왔다. 흉계가 실로 가소로왔다.” (1593년 6월 5일).
“저녁에 경상수사(원균)의 군관 박치공이 찾아와,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해주었지만 원수사와 그 군관이 본래 헛소리를 잘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1593년 8월 7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593년 경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직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군 선배인 원균을 지휘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점도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593년 5월 30일의 기록에는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강한 불신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홍명이 보러 왔다. 원균이 송경락이 보낸 불화살을 자기만 쓰려고 하였으나 병사 편에 공문을 보내 나누어 보내라 하니까, 공문의 내용을 매우 못마땅해 하면서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명나라 관리가 보낸 불화살 1천 5백 삼십 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모두 쓰려고 하다니 그 잔꾀가 아주 심하여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저녁에 조봉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해 현령 기효근이 배를 우리 곁에 대었는데, 그 배에 어린 처녀를 싣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했다.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이때 배에 예쁜 색시를 싣기 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꼴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균부터가 이러하니 어찌 하겠는가.”

그로부터 4년 후 왜의 2차 침공이 있던 1597년(정유재란) 이순신은 선조의 공격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공을 허위로 보고했다는 등의 이유로 조정에 끌려와 고초를 당하게 된다. 선조의 입에서 “적장의 목을 가져온다 해도 살려줄 수 없다.”는 험한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위기를 겪지만 겨우 목숨만을 부지하고 백의종군으로 전선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1597년의 일기는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난 4월 1일부터 시작된다. 이 때부터 원균에 대한 직접적인 험담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간간이 누군가 원균의 행동에 대해 말한 것을 기록할 뿐이었다.

  특히 자신이 관직을 박탈당한 것에 대해 원균에게는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고 있는 대목도 눈에 띈다.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전황을 직접 살피기 위해 곤양군으로 달려간다.

  이곳에서 그는 원균이 도망치던 상황을 전해 듣는다. 부하들의 입을 통한 간접화법이 『난중일기』에 소개된 원균의 마지막 모습이다.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기에 패전한 당시의 정황을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육지로 달아나는 바람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건 차마 입으로 옮길 수 없고 다만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1597년 7월 21일)

  무능한 대장에 대해 부하들이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는 표현을 한 것을 일기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이순신은 초기 원균에 대해 품었던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나타냈다.

  원균의 경우와는 대비되게 이순신은 그와 절친했던 벗이자 형뻘인 유성룡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의 친구이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과 교분을 유지했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상당히 신뢰했다는 것은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추천하여 일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한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현감이 종6품직이고 수군절도사가 정3품직이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둘의 좋은 관계는 계속 지속되었으며, 『난중일기』에도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 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되어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 (1592년 3월 5일)
“유정승(유성룡)과 지사 윤우신의 편지가 왔다.” (1593년 6월 12일)
“순변사에게 유정승(유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고 한다.(유성룡은 1607년에 죽었으므로 잘못된 소식이었다.) 이는 필시 유정승을 질투하는 자가 말을 만들어 그를 훼손하려는 것이리라. 분한 마음 이길 길 없다. 저녁에 마음이 매우 어지러웠다. 혼자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길 없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서 밤 깊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유정승이 만약 돌아가셨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1594년 7월 12일)
“유자 30개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냈다.” (1595년 9월 17일)

  이순신은 자신을 알아주는 벗이자 후견인 유성룡이 있었기에 국난의 시기에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 3)  유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

3. 『난중일기』의 자료적 가치

『난중일기』는 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무장 이순신이 쓴 진중일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날도 일기는 거르는 법이 없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히기 직전의 일기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를 통하여 임진왜란의 구체적인 경과와 전술, 병사들의 심리 등 전쟁의 여러 정황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정다감하면서도 과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순신의 어머니와 자식에 대한 가족애와 부하들에 대해 엄한 장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초부터 이순신을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압박하여 왔던 인물 원균에 대한 묘사도 『난중일기』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림 4 출처 : 문화재청)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수행했던 전투의 구체적인 상황과 이순신과 전투에 참여했던 장군들의 캐릭터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순신은 전술에 밝았고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에도 매우 능한 지휘관이었다.

  이순신과 동명이인인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을 비롯하여 정운, 어영담, 김인용, 나대용, 권준, 배흥립, 이언량 등 그의 지휘를 따라 전쟁을 수행했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나타나 있어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 장군들의 구체적인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순신이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講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표현한 내용인 “원수(권율)의 답장이 도달하였는데 명나라 심유경이 이미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왜적의 간교한 꾀를 미리 알기 어려우니 이미 술책에 빠져들었건만 또 이렇게 빠져드니 한탄스럽다”(1594년 2월 초 5일) 등과 같이 이순신의 국제관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도 눈에 띈다.

이외에 “곽재우, 김덕령 등과 약속한 다음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상륙하여 산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선봉은 먼저 장문포에서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하였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호응하니 적이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이리저리로 급히 달아났다.”(1594년 10월 초 4일) 는 기록에서 이순신이 곽재우, 김덕령 등의 의병장들과 연합 작전을 전개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모습은 『난중일기』로 인하여 더욱 위대하게 우리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머니와 아내, 아들 등 가족을 걱정하는 인간 이순신의 진솔한 모습이 드러나 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원균에 대한 혹평이나 꿈에서나마 왜적의 항복을 바라는 모습에서는 장군의 이미지에 인간 이순신이 오버랩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