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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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의 발생
– 광해군이냐 영창대군이냐?-

신병주(중세사 2분과)

임진왜란은 왕실의 세력판도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위기를 맞은 국왕 선조는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하는 한편,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분조(分朝:조정을 나눔) 활동을 통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도록 했다. 18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대왜 항쟁에 나섰던 광해군은 강력한 주전론을 전개한 정인홍 등의 북인세력과 호흡이 잘 맞았다.

  의주로 피난해 백성의 원성을 들었던 선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야의 명망은 광해군에게 쏠렸고 광해군의 왕의 계승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602년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인목왕후가 계비로 들어오면서 왕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1. 적장자 출생이라는 변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채 1600년 사망하였다. 1602년 의인왕후의 빈 자리는 19세의 인목왕후 김씨가 차지하였다. 당시 선조는 후궁인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왕자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다.

  임해군은 이미 자질에서 문제가 드러났으므로 선조는 왜란이라는 국난의 시기를 맞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전란 후 능력을 인정받으며 훌쩍 커버린 광해군은 선조에게 이제는 크나큰 정치적 부담으로 다가섰다. 왕이라는 지존의 자리를 두고 부자의 관계도 다만 정치적 라이벌로만 인식되었을까?


(그림 1)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 선조의 능과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이 세 개의 언덕에 따로 모셔진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이다. 동원삼강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조의 마음을 파고 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1606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정에도 감지되어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정치판의 줄서기가 시작된 것이다.

  과거의 정치판도 ‘친이’, ‘친박’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정치판과 결코 다를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다시 두 개의 당파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이 그것으로,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를 잡았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당연히 광해군으로 이어질 것 같은 왕통에 영창대군이라는 변수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선조 후반의 정국에서 영창대군은 광해군을 제치고 차기 대권 주자로 급부상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급서로 정국은 일변한다.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이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16년간의 세자 생활을 어렵게 청산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일순간에 대북정권 중심으로 짜여졌다. 광해군이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면서 영의정 유영경을 탄핵하다가 귀양길에 올랐던 대북의 핵심인물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이후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광해군 정권을 뒷받침하는 산림(山林)의 영수로 떠오른다. 광해군의 ‘왕의 남자’ 정인홍은 위기의 시기에서 보인 노선의 선명함으로 인해서 광해군과 운명을 같이하는 관계가 된다.

2. 1613년의 계축옥사의 발생

광해군 정권의 출범. 이것은 한편으로 가장 강력한 왕위 계승의 라이벌이었던 영창대군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선조는 훗날을 염려하여 일곱명의 신하를 따로 불러 ‘어린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 줄 것’을 신신당부했지만 권력교체 속에서 거침없는 숙청이 이어지고 그 위협은 영창대군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왔다.

 유영경이 선조 사후 한 달이 못되어 처형되고 잦은 옥사로 소북인사들이 대거 축출되는 등 정국은 혁명정국과도 같은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1613년 4월 25일 문경새재(조령)에서 발생한 은상(銀商) 살해사건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정국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은상 살해의 주범은 서인의 거물 정치인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하여, 서양갑,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이경준, 허홍인 등 7명의 서얼들로 밝혀졌다.

  이들은 여주, 춘천 등지에 모여 강변칠우(江邊七友)를 자청하면서 ‘도원의 결의’를 맺고 무기와 양식을 준비했다. 서얼들이 차별 받는 현실을 바꿔보는 것이 이들의 궁극적 목표였고 그 과정에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은상을 살해했노라고 자백했다.

 그런데 심문을 받는 도중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가 놀라운 진술을 했다. ‘거사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산되었고 정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사건의 불똥은 결국 김제남의 처형으로 이어졌고, 7세의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614년 봄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증살(蒸殺) 시켰다. 8살의 어린나이로 맞은, 조선초기 단종의 죽음과도 비견되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7명의 서얼들의 거사는 훗날 허균의 대표작 『홍길동전』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에 허균은 이들과 긴밀한 교분을 유지했으며 공주목사시절에는 서양갑, 이경준 등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허균은 능력은 있으되 이것을 발휘할 수 없는 막힌 사회, 허균은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예리한 눈으로 주목하였으며 서얼이나 무사와 같이 차별받는 신분들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 사상의 동반자임을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사상에서 대표적인 것은 ‘호민론(豪民論)’이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에 백성을 호민ㆍ원민(怨民)ㆍ항민(恒民)으로 나누었다. 여기에서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의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들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허균이 소설에서 설정한 주인공 홍길동의 캐릭터는 호민이나 칠서(七庶)의 그것과 너무나 유사하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가정에서의 신분적 제약과 사회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에 부닥쳤지만 이를 극복해 나가는 호민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허균은 자신의 희망이 현실 정치에서 해결될 수 없자 차라리 소설 속에서 통쾌하게 활약하는 호민 홍길동을 통해 대리만족을 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 2)
『홍길동전』의 표지

3. 화합할 수 없는 모자 관계 – 서궁 유폐

아들을 잃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이제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광해군을 원수로 여긴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법통상 어머니와 자식간인 두 사람이 한 궁궐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1615년 추운 겨울 광해군은 인목대비에게 문안을 드린 후 그녀를 서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모셔놓고 혼자만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후일에 광해군의 죄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가 시작된 것이다.


 (그림 3)  인목대비가 유폐된 서궁. 현재의 덕수궁 전경(출처 : 덕수궁 홈페이지)

1615년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대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이러했으니 서궁에서의 생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 인목대비의 측근 궁녀가 쓴 『계축일기』에는 광해군에 대한 분노와 함께 서궁에서의 비참한 생활상이 수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1613년의 계축옥사를 계기로 광해군은 왕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면서 정치적 부담을 없앤 것처럼 보였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에 대한 반대세력을 암암리에 결집시키는 ‘확실한’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지만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성리학의 의리론과 명분론을 전파시키면서 고아해군 정권의 부도덕성을 전파하면서 세력의 확산에 들어갔고, 남인들 역시 서인의 입장을 지원하였다. 이이와 이항복의 문인들이 중심이 된 서인들은 비밀 회합과 함께 군사력을 확충시켜 나갔고 마침내 광해군 정권의 타도에 나섰다.

1623년 3월 13일 홍제원에 모인 서인 중심의 반정 세력은 창의문을 넘어 창덕궁을 습격하여 ‘폐주’ 광해군을 몰아냈다. 두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역사적 경험도 반정군들에게는 든든한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서궁에서 분노와 복수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을 몰아낸 1623년의 인조반정은 가뭄 끝의 단비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인조가 인목대비를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대접하면서 그녀는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풀 수 있게 되었다. 『인조실록』의 다음 기록은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亡靈)에게 제사지내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 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인조실록』 인조 3년 3월 13일)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는 개인적으로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했고, 인조의 즉위 이후 대왕대비로서의 지위도 완전히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복수와는 별개로, 신흥강국 후금의 성장과 성리학의 의리론에 충실하여 후금 강경책을 내세운 서인정권의 등장은 순탄하지만은 않은 역사를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