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45년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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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명종의 즉위와 여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신병주(중세사2분과)

  조선을 대표하는 여걸은 누구일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기본적으로 차단된 만큼 우선 왕실 여성들이 떠오른다. 왕자의 난 때 주저하던 태종을 독려했던 원경왕후 민씨, 내훈을 지은 소혜왕후 한씨,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 15세의 어린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지만 19세기 세도정치의 폭풍전야를 이끈 정순왕후 등 대표급 여성들의 면면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20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불교중흥책과 같은 정책을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이는가 하면, 여주(女主)가 나라를 말아먹는다고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문정왕후. 여기에 윤원형, 정난정, 보우 등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동시에 등장하는 것까지 포함하면 조선시대 여걸의 대표주자라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1. 중종의 사망과 대윤, 소윤의 대립

  중종은 모두 3명의 정비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단경왕후 신씨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로서 중종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 이후 바로 폐위되었다. 이어 장경왕후 윤씨가 계비로 들어왔다. 장경왕후는 왕실의 기대대로 아들(인종)을 낳았으나, 1515년 사망하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두번째 계비였다. 1520년 인종이 6살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면서 중종의 후계 구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1534년 계비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으면서 중종의 후계자 문제는 복잡한 권력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이 중심이 된 외척정치의 대립 양상을 띠고 여기에 훈구와 사림이라는 대결 구도가 복합되면서 권력 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윤임을 지지한 유관, 유인숙 등은 대윤으로, 윤원형을 지지한 윤원로, 윤개 등은 소윤으로 지칭되었다. 권력 투쟁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기득권을 잡고 있던 대윤 세력에 대해 소윤 세력이 저항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의 존재는 권력 투쟁의 큰 변수가 되었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중종이 사망하고 고명대신들의 주선으로 이미 세자로 책봉된 인종이 1544년 11월 즉위함으로써 양측의 권력 다툼은 대윤의 승리로 일단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인종은 원인 모를 병으로 시르시름 앓다가 불과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사망하였다.

  왕위는 1년 전 경원대군에 책봉되었던 명종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였고, 관례에 따라 생모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수렴청정의 시작이었다. 

  명종이 즉위함으로써 정국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특히 인종은 즉위하면서 이언적, 송인수 등 외척정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림파들을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종의 즉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사림파들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이었으며, 마침내 명종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들을 대거 숙청시키는 을사사화(1545년)를 일으킴으로써 4대 사화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도판1) 태릉 – 문정왕후가 묻힌 곳이다. 중종은 죽어서는 자신과 함께 했던 왕비 어느 누구와도 짝을 이루지 못했다. 첫 왕비 단경왕후는 온릉에,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는 희릉에, 문정왕후는 태릉에 각각 묻혀 있다.

2. 문정왕후와 여인천하

  몇 년 전에 중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여인천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서슬 시퍼런 여인들의 암투에 왕과 대신들의 무능은 극에 달했으며, 중흥지주(中興之主)로 평가받던 중종도 왕위계승을 노리는 여인들의 등쌀에 수시로 소리만 버럭 지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내비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여인들의 파워는 막강했다. ‘뭬야’라는 유행어와 질투의 화신처럼 보이는 표독한 눈매로 시청률 증가에 혁혁한 공을 세워 주연급으로 급부상한 경빈 박씨를 비롯하여, 신분적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권모술수로 최고의 파워집단에 줄을 댄 후 당대의 정객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정난정, 여기에 후궁, 상궁과 나인들까지 가세하여 툭하면 험한 말을 뱉고 머리끄댕이를 잡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 처절한 모습들이다.

  그런데 이들과는 일정한 차별을 두면서 교양과 품위, 그리고 냉철함으로 무장한 여걸이 한 사람 등장한다. 바로 문정왕후다. 학창시절 국사책에도 나오는 결코 낯설지 않는 인물 문정왕후, 그런데 기억력이 정확하다면 문정왕후는 그리 긍정적인 평가가 가해진 여인은 아니었다.

  수렴청정, 외척정치, 요승 보우의 등용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문정왕후가 이 드라마에서는 암투의 주역이면서도 상당히 기품 있게 묘사되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그녀에게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문정왕후(1501-1565) 윤씨는 중종의 계비이자 조선의 13대왕 명종의 생모이다. 중종대 후반부터 왕위계승의 중심에 서서 그녀의 소생인 명종의 즉위를 결국 성공시켰다. 1545년 보위에 오른 명종은 이제 겨우 12살이었고 실권은 당연히 문정왕후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국정의 최고 위치에 서서 1565년 사망 때까지 윤원형 등 친인척을 적극 등용하여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윤원형과 정난정의 가세로 명종대는 외척정치의 전성시대가 연출되었으며, 이들은 반대파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외척정치에 반감을 갔고 있던 사림파 학자들은 1545년의 을사사화와 1547년 양재역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벽서(壁書)가 붙은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사화로 말미암아 대거 처형당하거나 귀양의 길에 나섰다.

  중앙에 비판세력이 없어지자 문정왕후는 더욱 날개를 달고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둘렀다. ‘윤원형의 재산이 나라의 재산보다 많다’는 말이 회자되었으며 왕후가 어린 왕을 꾸짖고 심지어 매를 들었다는 소문까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여론을 무시한 채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하였고 이 또한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그녀의 전횡에 가장 강경하게 비판의 글을 올린 인물은 남명 조식(1501~1572)이다. 조식은 1555년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에서, ‘자전(문정왕후)은 과부 명종은 고아’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을 비난하면서 당시를 ‘큰 나무에 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다 빠진 형국’에 비유했다. 문정왕후의 측근 보우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정책에 대해서도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한 양심세력은 수업거부와 동맹휴학으로 집권층의 정책에 저항했다.

  1565년 그녀의 사망으로 외척정치는 종말을 고했다. 날개를 잃은 척신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었다가 정난정은 자살하고, 윤원형은 회병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제 역사는 전 시대의 모순과 부패를 극복하는 대안 세력 사림파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몇 사람의 권력욕으로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민심이 이반하던 시대. 문정왕후는 바로 그 중심에 있던 여인이었다.

  오죽하면 실록에서 그녀가 죽었을 때 사관이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했을까? 그녀 스스로는 교양과 정치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항변할 지도 모르지만 문정왕후는 분명 역사 발전의 대세를 거스르는 외척정치의 최정점에 서서 조선사회를 보수와 반동으로 몰고 간 주역임에 분명하다.

 3. 보우의 등용과 불교 중흥 밀어붙이기

  숭유억불 정책을 국시(國是)로 내건 조선사회에서 불교 중흥의 기치가 가장 높이 솟았던 시기는 바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기였다. 1550년(중종 5) 12월 15일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 양종(兩宗)을 부활시키는 비망기를 국왕인 명종의 이름으로 내렸다.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여 불교 중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승려들의 도첩제가 부활하는가 하면 승려가 되기 위한 과거 시험인 도승시(度僧試)도 실시되었다. 봉은사 마당에서 시행된 도승시에서 급제한 승려 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국난 극복에 크게 공헌한 이도 있었으니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한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책은 당시의 사류들 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었던 성균관 유생들로부터도 강한 저항을 받았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국가에서 불교를 중흥하는 움직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선교 양종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권당(捲堂:수업거부)과 공관(公館:집단 휴학)으로 맞서기도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불교 중흥의 싹은 그대로 꺾여 버렸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 보우 또한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그 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봉은사. 이곳은 바로 450년 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마지막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도판2) 봉은사 전경 –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 공간으로 내세웠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은 인종의 생모인 제1 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죽어 중종 곁에 묻히려면 먼저 장경왕후로부터 중종을 떼 놓아야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였던 보우와 의논하여 지금의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전격적으로 옮겼다. 지하의 중종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은 명당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잦았다. 홍수 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기까지 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힌 소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사후 무덤은 지금의 태릉에 조성되었다. 중종은 결국 자신과 함께 했던 왕비 3명 중 어느 누구와도 영원히 함께하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버지 성종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태릉선수촌’, ‘태릉갈비’와 같이 태릉의 명성을 담은 용어들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정작 이곳이 조선중기 폭풍 정국을 이끈 문정왕후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태릉을 찾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걸 문정왕후의 자취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