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1519년 기묘사화,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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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기묘사화,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신병주(중세사 2분과)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白日臨下土)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昭昭照丹衷)

  1519년 12월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국왕 중종이 내린 사약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는 마지막 시를 읊었다.

  거칠 것 없는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한 사림파 엘리트 조광조. 38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개혁성향이 짙었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개혁정책은 기묘사화의 참극을 불러왔고 개혁파 정치세력들은 허망하게 정치권에서 숙청되었다.


(도판 1) 심곡서원: 조광조를 배향한 서원. 부근에는 조광조의 무덤, 절명시를 새긴 시비도 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1. 훈구파의 반격, 꺾여진 꿈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훈구파는 초조했다. 위훈삭제 추진은 훈구파의 목을 노골적으로 조여 왔고, 궁지에 몰리게 된 훈구세력들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수십년 쌓아온 정치, 경제적 기득권이 애송이 조광조라는 인물의 출현 덕분에 한 순간에 무너질 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훈구세력은 먼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세력을 적극 활용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우선 조광조는 왕권까지 넘보는 야심 차고 위험한 인물임을 유포시켰다.

  홍경주ㆍ남곤ㆍ심정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를 동원하여 조광조 일파의 동향을 중종에게 비방하도록 하고,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만들고 이곳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궁중과 민심을 흉흉하게 했다. 모두가 훈구파들의 계산된 음모였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유교적 이상정치 주장과 왕권의 견제, 경연의 활성화에 점차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중종도 각종 보고를 통해 들어오는 조광조의 전횡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조광조의 참신한 개혁정책의 최초 후원자였던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를 과격하게 공격하는 조광조 일파의 급진성에 점차 불안해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기(修己)를 통하여 국왕 자신이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특히 부담이 되었다.

  중종은 서서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세력들의 급진적인 이상정치 요구와 개혁정책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광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이것은 중종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이탈시키고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힘을 강고하게 결집시켜주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모든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19년(중종 14) 11월 훈구세력들은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왕궁에 잠입,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하였다.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를 비롯하여 그와 함께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김식ㆍ기준 등 신진세력들에 대한 전격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ㆍ김식ㆍ김구ㆍ윤자임ㆍ박세의 등 대부분의 개혁세력은 투옥되어 사약을 받거나 유배되었다.

  조광조는 김정ㆍ김식ㆍ김구와 함께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의 적극적인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ㆍ남곤ㆍ이유청 등이 각각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이 되면서 정국이 바뀐 후, 조광조는 기묘년 12월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셨다.

  조광조의 숙청은 한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노선을 지지하고 실천에 옮기려 했던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는 등 큰 화를 당하였다. 이것이 조선의 4대 사화 중 세 번째인 1519년의 기묘사화로서 젊고 참신한 정치세력들이 개혁정책을 실천하려 하다가 좌초한 사건으로 평가박고 있다.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한때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왕 중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셨다. 38세라는 짧지만 굵은 생의 끝이었다.


(도판 2 ) 기묘제현전 : 김육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의 사적을 모아 기록한 책

  2. 개혁정치의 빛과 그늘

  기묘사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정치노선이 기존 보수세력의 반격을 받아 좌초한 사건으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비록 정치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조광조는 오히려 역사의 승리자로 남았다.

  16세기이후 우리 역사에서는 조광조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사림세력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며,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이황이나 조식, 이이 같은 학자는 한결 같이 조광조를 높이 평가하였다.

  기묘사화이후 조광조 일파가 널리 보급했던 성리학 이념서 『소학』과 『근사록』이 잘 읽혀지지 않을 정도로 정치적, 사상적 파급효과와 그 후유증은 컸다. 조식과 같은 학자는 1519년 조광조의 부음을 듣고 사로(仕路)의 험난함을 알고 과거 공부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조광조의 행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가지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조광조가 학문적 식견이 쌓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책을 추진했고 한번 휘몰아친 개혁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다가 실패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조광조의 사림파 학통을 계승한 인물인 이황은 자신의 언행록에서 냉정하게 조광조를 평가하고 있다.

  ‘공(조광조)은 천품이 대단히 높았으나 학력은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소격서를 없애자고 논한 일만 보더라도 가히 엿볼 수 있다. 군신간의 의리가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이것은 정암(조광조의 호)의 지나친 데라 할 것이다. 임금을 요순처럼 받들고 백성에게 요순의 덕택을 입히려는 것은 군자의 뜻이기는 하나 당시의 사세(事勢)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할 수 있겠는가. 기묘년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에도 정암은 일이 실패할 것을 깨닫고 조화하려 했으나, 사람들은 도리어 그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창끝을 돌려 공격하려는 자까지 있어 정암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고 하여, 이황은 조광조가 일의 형세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리하게 개혁정책을 추진한 점과 걷잡을 수 없는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그 실패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옛 사람은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려서 도를 행하기를 구했고, 도를 행하는 요체는 무엇보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 공(조광조)은 아깝게도 현철한 자질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을 지녔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너무 급하게 요직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 권문세가의 비방을 막지 못하여 그 충성을 바치려 하자 참소하는 일들이 벌어져 몸이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뒷사람들이 이를 경계하여 감히 바른 정치를 해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이 비록 진퇴의 기미에는 밝지 못한 바가 있으나, 학자들이 공으로 말미암아 성리학을 숭상하며 왕도(王道)를 중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볼 줄 알았으니, 그가 끼친 공로는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태산과 북두와 같이 우러러보고 국가에서 표창함이 갈수록 융숭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고 하여 조광조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무르익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가 좌초한 사실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면서도 조광조로 인하여 성리학을 숭상하고 왕도를 중히 여기는 기풍이 진작되었음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도판 3) 정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의 목록 부분

 3. 당대보다 후대에 얻은 높은 평가

  위에서 보듯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에 대해 깊은 존숭을 표시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사림파의 정통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추진한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이,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된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하였다. 훗날 이황과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하면서 조선성리학을 빛낸 인물로 나란히 서게 된다.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주체가 되어 모든 백성이 고르게 혜택을 받는 사회, 성리학적 이념이 온 나라에 두루 미치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라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사회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개혁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은 어쩌면 우리 역사발전 단계에서 가장 개혁적인 조처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지닌 급진성과 과격함, 그리고 개혁 지지기반의 상실 등으로 말미암아 개혁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에는 언제나 보수와 개혁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가 있다. 조광조가 등장한 16세기 초반의 조선사회도 보수와 개혁의 흐름이 서로 충돌한 바로 그러한 시대였다. 그 시대를 돌파하기 위하여 개성이 강하고 젊었던 관료 조광조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하고 원칙에 충실하면서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급진성과 과격성은 이에 반발하는 보수세력들을 결집시켜 주었고, 개혁은 미완인 채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좌절은 역사에서 경직된 이념의 드라이브가 얼마나 위험한 길이었는지, 개혁의 길에는 엄청난 반발이 수반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최근의 현실에서 조광조의 행적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