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흥청망청 독재의 종말 –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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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망청 독재의 종말 –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

신병주(중세사 2분과)

  1498년의 무오사화, 1504년의 갑자사화를 통해 자신의 정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사림파들 뿐만 아니라 일부 훈구파 대신들까지 제거한 연산군의 폭정은 점차 그 정도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유흥과 사치는 보다 심해졌고, 자신의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의 민가를 철거시키기도 했다. 운평과 흥청 등 기생을 불러들여 흥청망청하는 것으로 날이 지새는 줄도 몰랐다. 그의 독재와 향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조선사회는 독재자의 출현을 장기간 방치할 만큼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먼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왕의 남자’, 연산군대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합니까? 공길이와 장생이가 줄타기 하는 너머에 조선의 궁궐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이다.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예리한(?) 사람은 연산군이 주로 활동한 곳은 경복궁이고, 경복궁의 정전은 근정전인데 왜 인정전을 마지막 무대로 삼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가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왕의 남자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했다. 연산군이 반정군에 의해 쫓겨난 마지막 장소는 창덕궁이기 때문이다. 1506년 창덕궁에서 치솟았던 반정군들의 함성, 그 역사의 무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흥청망청’과 ‘신언패’

  1506년 창덕궁에 머물던 연산군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축이 된 반정군에 의해 쫓겨났다. 10여년 이상 조선을 사치와 향락의 왕국으로 만들었던 그였지만 서슬퍼런 반정군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를 방어해 줄 수 있는 측근 하나 없는 외로운 퇴출이었다. 연산군이 그 동안 자행한 정치 형태에 비하면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는 반정이었다.

1504년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수탈은 보다 본격화되었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어들이는가 하면 노비와 전답에도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해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했다.

또한 1504년 8월,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확대해 경기도 일원의 민가를 철거하라는 명을 내렸다. 금표는 본래 군사훈련이나 왕의 사냥을 위해 일시적으로 백성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지역을 말한다. 연산군은 민가를 허물고 그 입구마다 금표비를 세워 백성들의 출입을 막고 자신만의 향락의 무대가 되는 사냥터를 넓혀 갔다.

또한 연산군은 누구보다 궁궐에서 자주 잔치를 베풀어 타락한 군주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연산군은 자태가 고운 여자들을 전국 팔도에서 찾아내어 이들을 궁궐의 기녀로 차출하였다.

채홍사(採紅使)로 칭해진 사람들이 기녀들의 선발에 나섰고 이때에 뽑힌 기녀들은 운평, 가흥청, 흥청 등으로 불리었다. 연산군이 흥청과 같은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연산군의 위세에 눌려 감히 그 앞에서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흥청들과 놀면서 정사에 관심이 없는 연산군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 유래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유행하고 있는 것에서 역사의 잘못을 경계하는 민중들의 의식은 수백년을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산군은 관리들에게는 ‘신언패(愼言牌)’라는 패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도록 억눌렀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한글로 쓰였다 하여 한글의 학습을 탄압하고 한글로 간행된 서적을 불사르기도 했다. 그만큼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가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느끼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얼마 전 까지도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 조선의 모든 것이 본시 내 것인데 너희가 내 것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더냐? 이제 다시 내가 찾아오려 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하는 등 자신의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시키는 발언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2. 신하들의 반격, 1506년의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에 견디는데 한계를 느꼈던 일부 관리들은 점차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면서 연산군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차곡차곡 세워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훈구대신들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였으니 이가 곧 중종이다.

반정의 선봉에 섰던 3인방 중 박원종은 특히 연산군과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에 있었다. 연산군의 음행은 도가 지나쳐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와도 간통을 했다. 연산군에게 큰 어머니 뻘 되는 박씨는 이때의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 마는데 박씨는 바로 박원종의 누이였다.

박원종은 누이의 자결로 연산군에게 늘 원통함을 갖고 있던 차에, 이조참판으로 있다가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가 말직인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된 성희안과 의기투합하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9월 1일 저녁 훈련원에는 성희안, 박원종, 김감, 김수동, 유순정, 유자광 등 반정 주체 세력과 건장한 무사들이 훈련원에 쏙쏙 모여들었다. 남이의 옥사, 무오사화 때 고변의 중심에 섰던 유자광은 이번에는 반정군에 가담함으로써 처세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이날 밤 반정군들은 창덕궁의 돈화문을 통해 연산군의 처소를 급습하였다. 반정군의 규모에 놀란 궁궐 수비군은 거의가 궁궐을 빠져 나왔고, 몇몇의 승지들과 함께 끌려 나온 연산군은 그 화려했던 독재자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벌벌 떨기만 했다.

이제 그를 지켜주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박원종 등은 곧이어 경복궁에 가서 대비인 정현왕후(성종의 계비)에게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청했고 진성대군(후의 중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중종은 곧바로 연산군을 폐위시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냈고, 연산군은 그해 11월 강화도에서 병을 얻어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두 차례의 사화로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이 원하는 곳 어디에나 금표를 쳐서 백성을 괴롭혔으며, 기생들과 흥청망청 즐기면서 영세를 누릴 것처럼 보였던 연산군. 현재 그의 무덤은 도봉구 방학동에 왕릉의 호칭이 아닌 ‘연산군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폐위된 신(愼)씨가 죽어서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3. 공신을 양산한 반정의 그늘

  반정은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원래 중국의 역사서인 ≪춘추공양전≫의 ‘발란반정(撥亂反正: 난리를 평정하여 바른 것으로 되돌림)’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에서는 한 번도 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역사에서는 반란을 성공시킨 인물 자신이 바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반정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성리학적인 명분을 이념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도 이해된다.

비록 정권을 무너뜨린 권력의 실세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잘못이며 왕위는 왕통을 이을 가장 적합한 인물을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조선의 역사에서 두 차례의 반정(중종반정, 인조반정)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과도 비교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반정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제 권력은 반정을 주도한 훈구 공신들에게 있었다. 중종은 중단되었던 경연을 다시 실시하고 홍문관과 사간원 등 언론기관을 복구시키는가 하면 연산군 시대에 수없이 설치되었던 금표를 해제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반정 이후 조정의 실권은 반정 공신들의 차지가 되었다.

무려 130명이 넘는 반정공신들이 책봉되었고 중종은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의 그늘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공신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작업 이것은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에게는 커다란 과제로 대두되었다.  
☞ 연산군과 창덕궁, 그 인연과 악연

조선전기 정궁이었던 경복궁 보다 연산군은 창덕궁과의 인연이 더 깊다. 그가 즉위한 곳도 창덕궁이고 쫓겨난 곳도 창덕궁이기 때문이다. 1494년 12월 29일 연산군은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성종이 사망한 지 닷새 뒤로서, 성종이 이곳에서 사망하였기에 연산군은 약관 19세로 창덕궁에서 즉위한 것이다.

연산군은 자신이 즉위한 창덕궁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활쏘기, 잔치, 사신 접대 등 주요한 국가 행사가 있을 때는 경복궁에 행차하였다. 연산군은 창덕궁의 확장에 깊은 집착을 보였다.

연산군 2년에는 침전인 대조전을 중수(重修)했으며, 연산군 8~9년 경에는 후궁인 소용(昭容) 장녹수와 숙원(淑媛) 전비와 사랑에 빠지면서 놀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창덕궁 후원을 더 넓혔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가들이 헐렸고, 백성들의 원성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을 숙청한 후 자신감을 얻어서인지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에 서총대(瑞葱臺: 성종 때 이곳에 아홉 가지가 달린 파가 자라나 붙여진 이름)를 크게 건축하였다. 서총대 건설에 동원된 역군(役軍)이 수만 명, 감독관이 100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공사였다.

1506년 6월 22일 연산군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더 높고 크게 지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3개월 뒤 그 문을 통해 반정군이 몰려들었고 연산군은 창덕궁에서 왕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창덕궁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강화도의 교동(喬洞)으로 유배되었다가 두어 달 뒤에 죽었다.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너무나 거침없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던 왕이었기에, 구속된 유배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그의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