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중종, 승부수를 띄우다 : 조광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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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승부수를 띄우다 : 조광조의 등장

신병주(중세사 2분과)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한 동안 공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재위 8년 무렵 반정 3인방이 모두 사망하면서, 기존의 훈구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파트너를 구했다.

  그 때 중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사림파의 선두주자 조광조(趙光祖:1482~1519)였다. 조광조는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국왕인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3년 만에 종 2품인 대사헌에 오르는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다.

  비범한 카리스마를 무기로 등장하여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도덕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부르짖었던 인물 조광조. 16세기 초반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했다가 5년 만에 좌절된 정치 행적. 그의 좌절은 보수와 현실정치의 벽이 당시에도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개혁정치 추진과 그 실패가 가져다 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일까?
  1. 조광조의 시대와 삶

  조광조는 서울 출생으로 전형적인 조선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국공신 조온(趙溫:1347~1417)의 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지만 그의 인생은 사림파와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조광조는 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에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김굉필에게 수학(受學)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고려말 정몽주와 길재를 거쳐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사림파의 핵심인물로서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 길에 있었다.

  영남과 서울을 기반으로 하여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았던 만남, 그러나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사건은 이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만남은 개국공신의 후예 조광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운명적인 것이었다. 영남사림파의 학맥이 기호사림파에게 접목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미친사람(狂人)」이라거나 「화의태반(禍胎)」이라고 할 정도였다.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친구들과의 교유관계도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이 절제가 있어서 품행이 방정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어린시절 보였던 자신에 대한 철저함은 훗날 정치적으로도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

  조광조는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에도 2등으로 급제하여 국왕인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성균관을 찾아 새로운 인재를 구하려 했다.

  이때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책문(策問)을 던졌고,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을 핵심 요지로 하는 답안을 냈다.

  이 책문을 계기로 아직까지는 가능성만 있었던 학자 조광조는 중종의 파격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중종은 조광조를 정언, 대사헌 등 언관의 핵심 직책에 임명하면서 국왕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삼았다.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조광조의 파격적인 정치적 성장에는 젊은 피를 수혈하여 정치권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자신의 시대를 ‘개혁의 시대’로 냉철히 인식한 조광조는 시대의 부정과 모순을 극복해가는 다양한 정책들을 강력하고 급진적으로 추진해 갔다.

 
  2. 거칠 것  없는 개혁정책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의 실현, 이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요체였다.

  먼저 이를 위해 조광조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학문적 소양과 개혁의지가 있는 인재들을 고르게 발탁하기 위해 기존의 과거 시험 대신에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인물 중심으로 정치권의 물갈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개혁성향의 젊은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조광조의 지지기반이 형성되었다. 김식(金湜)ㆍ김정(金淨)ㆍ박상(朴祥)ㆍ김구(金銶)ㆍ기준(奇遵) 등이 조광조의 지원군이 되었다.

  신진세력들은 왕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을 요청하고 신하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언론의 위상을 강화시켜 국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한편, 국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의하는 경연의 활성화를 통해 군주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또한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성리학이 아닌 이단 사상이 보급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다. 소격서는 국가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조광조는 소격서의 존재를 유교적 정치이념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로 해석함으로써 소격서 폐지를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조광조 일파는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도 전력을 다했다. 지방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의 이념을 담은 『소학』과 같은 책자를 보급하고 사림들이 향촌을 주도할 수 있는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향촌에서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사림파가 주도하는 유교질서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소학』은 특히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김굉필은 ‘업문(業文: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부정과 비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사상 성향에 부합하는 점이 많았다.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조처로서 『소학』의 보급과 그 맥락을 같이하였다.


(도판 2) 『소학언해』: 선조대에 『소학』을 언해한 『소학언해』가 간행된 후 『소학』의 아념은 널리 보급되었다.

  조광조 일파는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적극 착수하였다. 당시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였으며, 균전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집중을 완화하고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여 부유층의 재산확대를 막으려 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백성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에게 큰 부담을 느꼈던 기득권 세력의 반발 또한 보다 조직화되고 확산되어 나갔다. 

  누구보다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노선을 취한 것은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였다. 성종대 이후 기득권 세력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세력은 연산군대에 두 차례에 걸친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축출하고 보다 보수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중종이 파격적으로 등용한 조광조 일파에 의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서서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조광조 일파가 위훈삭제(僞勳削除)까지 들고 나오자 이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에 공을 세운 공신세력에게 준 훈작(勳爵) 중에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하여 이를 박탈하자는 것이다. 공신의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하여 훈작을 받은 사람들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세력을 제거하고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무려 126명으로 이 숫자는 조선의 개국공신(45명)이나 이후에 있게 되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53명)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후에 중종도 공신에 대한 재조사를 명하였는데 그 숫자만도 70명이 넘었다.

  조광조 일파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하여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할 것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세력의 전면적인 물갈이를 구상했던 것이다.    
  3. 중종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

  일반적으로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이래 불안정한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이어지던 시절, 중종은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를 발탁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나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문제에서 중종을 위협하던 반정세력들은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중종은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이러한 시점에서 성리학의 이상론에 입각하여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불편한 관계’의 조짐들이 보인다.

  조광조 또한 중종이 세조나 연산군과 같은 극단의 길을 추구하는 군주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군주의 도덕정치를 강조하고 경연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중종에게 강하게 권유한 것도, 군주독재의 위험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개혁세력인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정치적 길이 달랐기에 동반자이면서도, 어떠한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동반자’였다. 아무리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라 하더라도 국왕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건국 초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도전과 이방원이 피를 부르는 권력싸움을 전개한 것이나 세조의 왕위찬탈과 사육신 사건은 모두가 왕권이냐, 신권이냐를 두고 벌어진 권력투쟁이 아니었던가?  

  조광조는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그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이었던 셈이다. 조광조는 세조나 연산군대의 정치는 결국 왕이 성리학의 이념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식했고 중종과 같은 왕도 얼마든지 그러한 전철을 밟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중종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군주로 성장하여 독재권을 행사하기 전에 성리학 이념이라는 견제장치로 중종을 압박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정공신들과 훈구대신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던 중중 또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자, 이제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릴 나약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1519년 중종이 조광조를 전격적으로 숙청한 것도 왕권에 대한 조광조의 도전에 계속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에 훈구파 대신들이 큰 힘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이다. 기묘사화의 비극은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로서 성리학의 이념을 무기로 하여 등장한 신권의 도전에서 조광조가 패배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