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일대 근현대 유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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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근대사분과 2012년 답사

‘정동 일대 근현대 유산을 찾아서’

송미경(근대사분과)


분과총무 고태우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9월 1일에 시간 괜찮으냐고. 아니면 8월 25일도 괜찮다고. 정동으로 근대사 분과 답사를 가자고 하셨다. 9월 1일이면 좋겠다고 소소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나니 문득 학부 때 정동으로 갔던 일일답사가 생각났다. 아무 것도 모르던 새파란(물론 이번 분과 답사 때도 나는 새파란 막내였다) 학부 1학년. 다소 따갑던 햇살 속에서 뭐가 그리 신이 나던지 까르르 웃으며 돌아다녔던 기억. 사실 어느 곳을 돌아다녔는지, 무슨 설명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선생님 죄송해요). 그럼에도 막연하게 좋았던 추억은 이번 분과 답사를 더욱 기다리게 했다.

답사 당일 날. 모이는 장소가 가까워 늦장을 부렸더니 시간이 촉박했다. 늦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선생님들이 먼저 기다리실까 걱정하며 두리번거렸더니 이게 웬걸. 고태우 선생님 혼자 계셨다.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신입회원이 거의 없다는 말에 아쉬웠다. 답사인원은 총 10명. 서대문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한 우리는 근처의 경기감영 터와 경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일일답사 때처럼 조금은 뜨거운 햇볕 아래 열심히 걸었다.

이번 답사지인 정동은 개항장과 더불어 근대의 모습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곳이다. 개항기 정동은 신식학교와 개신교회, 미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로는 대한제국 정치의 격변지였고, 직접적으로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의 거처였던 경교장과 이기붕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림1>  현재 경교장의 모습 Ⓒ송미경

그 중 첫 답사지는 경기감영 터였다. 임오군란 당시 무장봉기한 훈련도감 군인들이 경기관찰사를 응징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이곳은 현재 적십자병원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표지석조차 남아있지 않아 답사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다녔을 곳이었다. 그 병원에서 직진을 하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타난다. 원래 4.19혁명 희생자들의 유영봉안소가 있었던 이곳은 수유리에 국립4.19민주묘지가 생기면서 지금은 도서관의 역할만 하고 있다. 입구를 들어가면 혁명 당시 사진들이 홀을 메우고 있는데, 거리로 향하던 그들의 소리가 아직도 홀에서 울리는 것 같아 비록 남아있는 유물은 없었지만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도서관을 나와 경교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너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은 참 뻔질나게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 앞에 있는 경교장은 그동안 올라가볼 생각을 못했다. 근대식 양옥이라기에 기대를 하며 올라갔는데 눈앞에 펼쳐진 경교장은 탄식과 화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강북삼성병원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모습에 이렇게 밖에 있을 수 없나 한숨이 나왔다. 내부 복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외부를 현재와 같은 상태로 둔다면 내부를 공사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김구가 암살을 당한 곳이자 환국한 임시정부의 정무처였으며, 식민지시기 ‘금광왕’으로 불리던 최창학(崔昌學)이 처음 지은 근대 건축물인 경교장은 35년여가 지난 지금, 자신이 있을 자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림 2>  러시아공사관탑의 모습 Ⓒ송미경


<그림 3>  공사관탑의 내부 모습 Ⓒ송미경

늦더위가 심술을 부리는지, 한낮에 조금 걸었다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름 선선한 가을 분위기를 만끽해보고 싶었건만, 어느새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물고 옛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했다. 지금이야 공사관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아관파천 직전의 러시아공사관 사진을 참고해 보면 그 위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답사를 갈 때마다 탑과 근처 터만 보고 돌아왔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탑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사진처럼 내부에는 계단 밖에 없었지만, 같이 오신 선생님들도 처음 들어와 보셨다고 하셔서 괜히 우쭐해졌다.


<그림 4>  비밀통로가 이곳인지 궁금해 하는 선생님(미처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해요 ^^;;)Ⓒ송미경

러시아공사관 지하에는 밀실과 지하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탑의 동북쪽 지하실은 경운궁까지 연결되어 있어 고종이 유사시 러시아에 의지해 신변안전을 도모하고자 도피경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설이 있다. 공사관탑 옆쪽으로 넘어와 비밀통로 같이 생긴 곳을 살펴봤다. 선생님 한 분이 스윽~ 들어가 봤는데, 사람이 지나다니기에는 너무 좁고 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왕설래했지만 이곳이 그 비밀통로일 것이라고 우리끼리 결론을 냈다. 뭔가 큰 비밀을 알아낸 듯한 뿌듯함과 함께 통로를 뒤로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지금도 저 비밀통로가 경운궁까지 이어져있으면 어땠을까하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 ‘가비’를 보면 그런 모습들이 비슷하게 연출되는데, 아마 실제 남아있었다면 화면에서 묘사된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의 추측처럼 도피경로일지라도 그 슬픈 역사의 단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해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림 5>  중명전. 이 날 처음으로 중명전 안에 들어가 봤다. Ⓒ송미경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정동의 옛 모습에 대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설명대로 상상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갖은 그림을 그려 가면서 걸음을 옮긴 곳은 경운궁(덕수궁) 중명전이었다. 중명전도 내부를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올 때마다 공사 중이어서 근처에도 못 가보고 항상 입구 언저리에서 설명만 듣고 돌아가곤 했다. 여전히 앞마당은 공사 중이었지만, 이날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시실에는 중명전의 시기별 사진들과, 을사늑약에 관련된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 다음 전시실로 들어가면 헤이그특사에 대한 내용과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했던 고종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헤이그특사와 고종에 관한 전시를 보면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고종은 어떤 왕이었는가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근대라는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가, 당시의 국제 정세를 얼마나 파악하고 있었는가, 국권 신장에 대한 의지는 있었는가. 대체적인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고종에 대한 평가가 여러 갈래로 이뤄지고 있지만 어느 쪽이 옳다거나 진실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우리의 몫으로,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겠거니 싶었다.

원래 중명전은 1층만 전시실로 개방해 놓았는데, 정중하게 부탁을 드리고 사무동으로 쓰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었다. 테이블도 의자도 없이 휑하니 방만 남아있었다. 1층에 전시되어 있던 을사늑약 체결 당시 중명전 오찬 배치도를 생각하며 그 당시 이곳을 상상해봤는데, 그 안에 대한제국 대신들의 표정을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지 난감했다. 을사늑약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2층도 개방하는 것이 중명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2층을 내려왔다. 답사코스가 몇 군데 더 남아 있었지만, 이화여고와 경운궁(덕수궁)을 들리는 것으로 답사를 마치기로 하고 처친 걸음을 다잡았다.

현 이화여고, 옛 이화학당은 여학생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1886년에 문을 열었다. 백주년기념관에는 100년이 넘는 이화학당의 연혁과, 그 사이 배출한 여러 인재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당시 상황에서 해외로 유학 간 여학생들을 보면서 대단하기도 했지만 짠한 마음이 들었다. 집을 떠나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데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이었으니 더 지난한 일이었겠다 싶어서이다. 열심히 해야지, 그 사진들 앞에서 다짐했는데, 여전히 미적거리며 글을 손에 못 놓고 있는 내 자신을 보니 그 때 느낀 감정이 금새 다 날아갔나 보다.

한편 백주년기념관 자리는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이다. 손탁호텔은 정동구락부를 비롯한 각종 사교모임의 장이었으며 정치적 격변의 중심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퇴조하면서 위상이 변화하였고, 1917년 이화학당이 사들여 기숙사와 교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재는 학교 정문의 경비실을 지나면 표지석으로만 손탁호텔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지석으로 달래기엔 손탁호텔이 차지하는 위상이 너무 커서 표지석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해봤지만, 남아 있지 않은 호텔이 참 많이 아쉬웠다.

답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은 경운궁이었다. 현재는 덕수궁으로 불리는데, 이는 고종이 태상황이 되면서 정해진 덕수(德壽)라는 궁호에 따라 궁의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다(덕수궁이라는 명칭에 대한 말이 많아 여기서는 경운궁으로 부르기로 한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곳 주변에 외국공사관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사망할 때까지 경운궁에 머무르면서 한국근대사에 남게 될 여러 사건들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현대사로 넘어오면 이곳 석조전에서 미소공동회의가 열리고, 유엔한국위원회가 들어서게 되면서 남북분단체제를 고착시키게 되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큰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으나 항상 궁궐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는 정문과 정전의 위치 때문이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으로 곧바로 가야하는데, 경운궁은 굽이돌아 가야 정전이 나온다. 또 정문을 원래 남문인 인화문에서 동문인 대한문으로 바꿨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양식 건물과 여러 양식을 조합한 건물이 들어와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정관헌은 여전히 가비(커피)향이 나는 이색적이고 매력적인 건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림 6>  정관헌. Ⓒ송미경

짧게 쓰고 싶었는데, 괜히 쓸데없는 감상으로 길어진 것 같아 지루하진 않을까 걱정이다. 답사가 끝나고 뒤풀이는 삼겹살에 소주. 크으. 역시 가장 재미있는 자리는 뒤풀이였다. 하지만 말로 옮길 수 없는 자리 역시 뒤풀이 자리. 거의 자신의 인생에서 절반 이상을 학문에 매진하신 선생님들께,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특히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공감되면서도 조금은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정도로 뒤풀이 자리를 정리하며. 궁금하면 다음 답사에 오셨으면 좋겠다는 약간의 꼬임과 함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