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DJ를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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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DJ를 회상하며…

박태균(현대사 분과)

역사학자가 가장 흥미를 갖는 주제의 하나가 ‘인물’이다. 물론 역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흥미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인물’은 그냥 인간이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데 있어서 보통 사람 이상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인물’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흔히 인구에 회자되는 몇 가지 질문들은 인물 연구의 흥미를 더해준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과연 경제성장이 가능했을까? ‘이재유’‘안창호’가 1945년 이전에 죽지 않았다면 해방 이후 김일성이나 이승만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을까?‘조봉암’이 죽지 않았다면 4.19 혁명의 성과를 민주당이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김대중’에게도 유사하게 던져질 수 있다. ‘김대중’이 없었다면 민주화가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 없었다면 지역감정이 없었을까? ‘김대중’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죽을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사진 1> 1969년 9월 6일 3선개현반대연설 중인 김대중대통령(출처: 김대중도서관 홈페이지/ 오마이뉴스 홈페이지)

  ‘인물’에 대한 연구가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당대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인물’은 그 시대를 앞서 나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은 당대의 상황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특정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나 사상, 정치노선의 변화를 보여줄 때 그 인물은 연구의 대상뿐만 아니라 논쟁의 대상이 된다.

  1947년 말까지 그 누가 ‘김구’의 단선 반대와 북행을 예상했겠는가? 윤보선의 폭로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박정희’의 좌익 활동의 경력을 알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김대중은 연구대상으로서 그다지 흥미로운 인물이 아니다. 일생을 통해 절박한 순간도 많았고, 환희의 순간도 많았지만, 그의 일생에서 예상 밖의 행동이나 정치노선에서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였지만, 김대중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진 2> 2000년 남북정상회담(출처: 오마이뉴스 홈페이지)

아마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고 한다면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보여주었던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개혁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금융 위기 직후 국가부도 직전의 상황에서 IMF의 강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던 개혁이었다고 치부하면 된다.

또는 어차피 대한민국이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로 가지 않는 한 자유주의에 근거한 개혁을 통해 시장을 정상화하는 과정을 거쳤어야 했고, 이것이 자유주의적인 개혁보다는 박정희식 모델에 익숙했던 한국의 보수보다는 김대중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DJP 연합 역시 또 다른 이야기 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DJ와 JP가 어떻게 연합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사상만 놓고 따져 본다면 1960년을 전후한 시기 JP는 DJ보다도 더 진보적인 입장이었을 수 있다. 또 평화적 정권교체의 대의만을 놓고 본다면 DJ가 아니라 그 누구와 손을 못 잡겠는가? 노무현 대통령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김대중은 역사연구자들에게 결코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아니다. 어쩌면 아직도 베일에 가려있는 1945년부터 1950년대 정치에 데뷔할 때까지 비어있는 시간이 ‘김대중 연구’의 하이라이트일 수도 있다. 이 시기 김대중의 정치노선과 활동에 대해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뚜렷한 물증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별로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베일에 싸여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기에 너무나 현대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정치의 가장 중심에 우뚝 섰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난 100여년 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던 개화와 근대화, 그리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김대중은 그 그늘에 있었던 사람들의 상징적 정치인이었다. 그가 유사 근대화, 유사 세계화를 주장했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결코 ‘주류’에 편입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늘 ‘비주류’의 맹장으로 그를 위치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명박 정부 하에서 ‘비주류’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어느 사회 건 ‘비주류’는 ‘비주류’가 아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만들었던 봉준호 감독에게 왜 그런 영화를 만드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보통 사람들은 결국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데 거꾸로 뒤집어 놓고 보면, ‘비주류’가 ‘주류’보다 이 사회에 더 많은 사람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사진 3> 8월 23일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출처: 오마이뉴스 홈페이지)

  그래, 김대중은 이 사회의 더 많은 구성원들을 대표하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간에 사람들은 그의 노력을 인정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이 항상 예상되었던 것이기에 그의 일생이 역사연구자들에게는 흥미롭지 못한 것일지언정 한국현대사에서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국장이 그러한 김대중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면 너무 관대한 평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