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역사의 전환점] 광해군과 정인홍은 단짝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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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정인홍은 단짝이었나?

오수창(중세사 2분과)

  일반적으로 정인홍은 광해군으로부터 지극한 대우를 받았다고 설명된다. 선조 말년 광해군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왕위 계승마저 위험하게 되었을 때 정인홍이 몸을 던져 광해군을 보호했고, 그 결과 그는 광해군대에 국왕 아래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 이미지 출처 : http://cafe.naver.com/hm99/109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해군은 즉위 이후 정인홍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경원시하였다. 광해군이 즉위 후 5년이 되어서야 정인홍을 처음 만나보았다. 그러한 상황은 국가 권력을 놓고 정점의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협력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상식에 부합할 뿐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고위 관직에 임명되어 막대한 정치권력을 누림으로써 조선후기 정치의 핵심 변수가 되었던 산림(山林)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기초가 된다.

  광해군을 보위하다가 선조의 명령으로 유배길에 올라야만 했던 정인홍이 광해군의 즉위 후 사면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608년 선조가 죽은 후 2월 2일에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정인홍을 두둔하는 지방 유생들의 첫 상소가 실록에 기록된 것은 2월 9일이었다. 이어 정적인 함흥판관 이귀(李貴)를 비롯하여 정언 이사경과 사간 박이서 등 삼사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인물들이 정인홍을 석방하고 관작을 회복하라고 빗발치듯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선왕의 명령을 경솔하게 뒤집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다가 2월 19일에 이르러서야 유배는 풀되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을 내렸고 다시 나흘 뒤에야 완전히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인홍의 관작을 회복하고 관직에 임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한성 판윤에 임명한 것은 결국 달이 바뀐 3월 1일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광해군의 이러한 조처는 선왕의 권위를 존중하기 위한 의례적인 행위로만 이해할 수는 없을 듯하다. 조선후기의 자료인 『연려실기술』에서도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다가 비로소 내린 명령’이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 광해군의 정인홍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정인홍의 사직소에 대해 광해군은 3월 9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명령을 한 차례 내렸지만, 정작 그가 서울에 도달해 사직소를 올린 3월 29일에는 만나보지도 않은 채 그가 올린 귀향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비록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를 하고 의약과 음식 등을 내렸다지만, 만류하는 조처를 취하라고 승정원에서 건의한 사실을 보더라도 광해군이 정인홍을 간절하게 대우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하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4월 24일에 이르러 정인홍에게 상경할 것을 당부하고 대사헌에 임명하였으며 7월 7일에는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이때 정인홍은 국왕의 부름을 따라 다시 상경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은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자는 신하들의 요청을 윤허했을 뿐 직접 불러보지 않았다.

  결국 정인홍이 7월 말에 이르러 다시 향리로 내려가게 되었고, 광해군은 그동안의 소홀한 대접에 대해 미안한 뜻을 밝혔다. 하지만 처음에는 귀향을 만류하는 어구조차 없었다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 ‘떠나감을 정지하라’는 뜻을 끼워넣는 데 그쳤다.

  반면에 정인홍은 광해군 원년에 도성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병이 무겁다 핑계대고 선왕의 장례 모임에 나오지 않았고, 한 번도 혼전(魂殿)의 배제(陪祭)에 참석하지 않았다.

  실록의 찬자조차 “인홍의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평가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때를 전후하여 국왕은 의관을 파견하여 정인홍을 돌보게 하고 서울을 떠나가는 것을 늦추라고 거듭 당부하였지만, 정인홍으로서는 더 이상 중앙에 머물러 있을 근거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인홍과 광해군의 줄다리기는 그들의 관계가 사실 ‘성심을 다하여 서로 지지하고 끌어주는 혼연일치의 상태’가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이듬해 정인홍은 좌찬성으로 높아졌다. 그리하여 일견 간절한 어구로 올라오라고 타이르고 내려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국왕의 명령만 반복되는 가운데, 정인홍은 광해군 원년 9월에 상경을 시도하였으나 도중에 발병하여 귀향하여야만 했다.

  결국 정치 생명을 걸고 광해군을 두호했던 정인홍은 광해군 즉위 후 5년에 이르러 우의정에 임명될 때까지 그 국왕 광해군을 직접 만나보지조차 못한 상태에 있게 되었다.

  정인홍은 광해군 3년 3월에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疎)」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 특히 자신의 스승 조식(曺植)을 비판했던 이황을 공격하고 스승에게서 그가 경도되었던 것으로 의심받던 노장적 경향을 떨어버리고자 하였다.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인조반정에 의한 몰락으로 이어지는 북인들의 경직된 정책이 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되곤 한다. 이 「회퇴변척」의 소동에서도 광해군과 정인홍 사이의 불협화음을 읽을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정인홍이 그 상소를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은 1610년(광해군 2) 광해군이 전격적으로 허락한 「오현종사(五賢從祀)」였다. 더욱이, 문묘종사에 나타난 광해군과 산림 정인홍 사이의 틈은 「회퇴변척소」 사건의 처리에도 그대로 연장되었다. 정인홍의 상소는 중앙의 관인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생들에게까지 격렬한 반격을 초래했다.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을 두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중립을 지키고자 하였다.

  『광해군일기』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때 사방의 유생 중에 소를 올려 두 선현의 무함받은 일을 논하는 자들이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정인홍 역시 자기 문도들로 하여금 소를 올려 글로 맞서면서 서로 쟁론하게 하였는데, 왕은 모두를 장려하였다.”

  결국 「회퇴변척소」로 나타났던 정인홍의 북인 학통강화 노력은 반대세력의 격심한 반발뿐 아니라 국왕 광해군의 중립적인 태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광해군의 그러한 태도는 이황 등이 지니는 전국적 차원의 절대적 권위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었겠지만, 국왕과 정인홍 사이에 존재하던 입장의 불일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광해군과 정인홍의 관계는 효종ㆍ현종과 후대의 산림 송시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고 판단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최초의 전형적 산림이었던 정인홍과 당시의 국왕 광해군 사이에 나타났던 그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후기 산림의 의미에 깊숙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 논문: 오수창, 「17세기 조선의 정치세력과 산림」(『17세기 한국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