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과거사 규명과 현대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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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과거사  규명과 현대사 연구

                                                          정 용 욱(서울대 국사학과, 한국현대사)

 

과거사 청산 논란과 관련해 기자들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 통화의 빈도수가 최근 부쩍 늘었다. 질문 내용 가운데 과거사 청산의 대상과 방법, 청산을 담당할 기구 구성 등에 대한 질문이 많고, 여론 조사도 국민 다수가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보아 과거사 청산의 당위성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거사 정리를 학계에 맡기자는 주장이 일부 야당의 공식 입장으로 제기되는 형편이니 과연 그 당위성과 필요성에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 의문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나라당은 김영삼 정부 때 정신문화연구원에 설치되었다가 김대중 정부에 와서 사라진 현대사연구소를 모델로 현대사연구소를 새로 만들되 정부기관이 아닌 학술원 산하에 두고, 그 연구소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정리’를 하는 방안을 한나라당의 공식 입장으로 삼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학자들의 중립성에 기대는 외양을 취함으로써 학자들의 식견을 존중하고 학자들을 대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한나라당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 연구와 과거사 청산을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과거사 청산을 물타기 하려는 시도로 비칠 뿐이다.

과거사 청산은 불가피하게 진상 규명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진상 규명이 먼저고 청산은 국민에게 물어보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부터 정리해야겠다. ‘과거사’란 무엇인가. 역사면 역사고, 현대사면 현대사지 과거사는 또 무엇인가. 과거의 사건(過去事)을 의미하는가, 과거 역사(過去史) 전체를 의미하는가. 과거사 청산의 경우 ‘청산’의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관계 사항 또는 주의, 사상, 과오 등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다. ‘정리’의 사전적 정의는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이 되었든 ‘과거 역사 일반’이 되었든 정치가들이 타협한다고 해서 이미 흘러간 과거사가 청산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무엇보다 진상이 규명되어야지 청산을 하든 정리를 하든 할 것이 아닌가.

지금 논란이 되는 과거사 청산이 우리 국민들의 역사 지식이 부족하고 역사 인식이 천박하기 때문에 전국민을 향해 근현대사를 재교육하려는 국민적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이때의 ‘과거사’는 이 시대에 고유한 맥락과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문제가 되는 과거사는 ‘우리 근현대의 어떤 시점에서 마땅히 해명되었어야 할 현실적, 역사적 과제가 당시의 억압적 사회구조와 정치상황으로 인해 미처 해명되지 못하고, 현재로 이월되어 새로이 역사적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들’이다. 그런 면에서 과거사 규명작업은 사실 자체에 대한 해명과 함께 그 사실이 제대로 해명될 수 없었던 사정의 규명과 시정을 불가피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즉 과거사 청산에서 과거사는 결코 역사 일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진상 규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된 것과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정치적 음모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여당 대표가 선친의 친일 전력 때문에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또 경제상황을 들어 과거사 청산을 미루자는 말이 있지만 듣기에도 딱한 것이 과거사 청산이 어디 경기 봐가며 하고 말고를 정할 일인가. 호황인지 불황인지 따져서 청산해야 할 과거사는 도대체 어떤 과거사이고, 그런 식으로 하자면 어느 세월에 과거사를 청산할 것인가. 결국 청산하지 말자는 소리 아닌가. 경제 걱정을 하는데 지난 봄 촛불시위를 통해 국민적 유행가가 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정치인들은 경제에 신경 쓰지 말고, 불법 정치자금 걷을 생각을 거두는 것이 이 나라 경제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점은 이제 국민적 상식이 되지 않았는가.

과거사 청산은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과거사 청산의 타이밍과 관련한 이런 식의 논란을 보노라면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역사적 감각이 얼마나 무디어지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였는가를 보는 것 같아 씁슬해진다. 우리 현대사에서 과거사 청산은 나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불거진 것이 아니다. 정부수립 후 어렵게 구성된 반민특위가 끝내 좌절함으로써 일제 식민지기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고, 4.19 이후 거창 민간인 학살 등 6.25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나 했더니 그것 역시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경찰과 친일관료를 정권기반으로 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는 물론이고 다카키 마사오라는 창씨개명 이름을 가졌던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친일파’의 친일경력을 문제삼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한국사회는 그 이후 정권에서도 과거사 진상 규명이라는 과제를 정면에서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면에서 지난 겨울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성금 모금이라는 형식을 통해서나마 이 과제가 대중적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했음을 반증한다. 지난 겨울 16대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 예산이 삭감되자 시민들의 호응으로 불과 1주도 안되어 성금 목표액을 달성하고, 친일진상규명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을 때 이미 지금의 과거사 청산을 둘러싼 논란을 예감했어야 했다. 큰 지진은 사전에 여러 번 신호를 보내지 않는가. 왜 이 시점에서 과거사 청산이 제기되는지 묻는다면 그 답은 이제 이 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들을 시정하고, 과거 역사의 잘못들을 바로잡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더 전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이 체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라는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고 한다.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과거사 청산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제기될 것이 분명하다.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과거사 규명을 위해 나서야

과거사 청산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정치인들이 학계에 책임을 떠넘기는 데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노력 부족을 탓하기 위한 것이라면 학자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고, 그 동안 역사가 누워서 쉬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세워주려는 것이라면 그 충정은 이해하지만 제발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예산 지원을 삭감해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계속 할 수 없게 만든 때는 언제이고, 정치적 공방이 가열되니까 학계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또 무슨 태도인가. 그렇게 학계의 의견을 중시했으면 친일인명사전 편찬 같이 국가적 사업이 제기되었을 때 지원을 대폭 강화해서 학계가 이 사업을 성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반민특위가 실패하고 그 동안 과거사 진상규명 노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중립적인 학계가 참여하지 않아서 그리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과거사 진상규명이 국민적 공감대 속에서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풀어야 할 일이지 어디 학자들에게만 맡길 일인가. 소를 잡기 위해서는 소 잡는 칼을 써야 하고, 닭을 잡기 위해서는 닭 잡는 칼을 써야 한다. 탄핵사태가 닭 잡기 위해 소 잡는 칼 들고 설친 사례라면 학자들에게 과거사 청산을 맡기는 것은 소 잡는 데 닭 잡는 칼 쥐어주는 격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방자치단체들도 모두 현대사연구소 하나쯤은 만들고,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현대사연구소를 여럿 만들어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인력과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학계의 연구역량을 강화하고, 과거사 청산 문제는 정치권과 정부, 시민단체, 학계가 모두 나서서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풀어갈 일이다.  

요하네스버그의 버스 기사는 길눈이 어둡다

이태 전 이맘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한국에서도 거의 4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참가단이 참석했는데, 그곳에 다녀온 이로부터 흥미 있는 에피소드를 들었다. 한국 대표단이 머문 숙소에서 대회장까지는 불과 20-3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회 내내 아침마다 대회장에 가는 데 두세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어정거려서가 아니라 한국 대표단이 탄 버스의 흑인 기사가 길을 몰라 두세 시간씩 헤매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는 서울만큼 크고 복잡한 도시가 아니고, 호화주택이 즐비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 인종분리 정책 하에서 대중교통 수단을 전혀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인종분리 정책이 철폐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소웨토라는 제한 구역에 살아야 했던 흑인들은 거리감각이 전혀 없고 길눈이 어두운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한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질곡이 되는지, 또 과거 청산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남아공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화합과 진상 규명을 시도하였지만 가해자들이 여전히 실질적 권력을 지니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상태에서 진실 규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줄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사의 미청산 때문에 버스 기사가 길을 못 찾아 헤맬 정도는 아니라고 위로하려 들지 말라. 과거를 망각하거나 제때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복수하는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세인의 뇌리에서 사라졌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 박기서라는 버스 기사가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찾아가 병석에 누워 있던 그를 ‘정의봉’으로 타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결국 살인죄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는데, 이 평범한 시민을 살인으로 내몰고 결국 감옥으로 보낸 것은 의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망각증과 미처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때문이었다. 그가 안두희를 타살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안두희의 배후를 추적해서 백범 암살의 진상을 밝혔더라면 그런 희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의로운 시민을 감옥으로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김영삼에 대해 IMF 사태와 경제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일각에 존재하지만 만약 그가 재임 중 백범 암살의 진상을 규명했더라면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았겠는가.

과거사 규명 없이는 온전한 백범, 장준하 강의가 불가능하다

백범과 장준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두 분의 강렬한 민족애와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의(剛毅)함이 그렇고, 두 분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한 역정을 보여준다. 또 두 분의 활동과 사상이 통일민족주의로 비약한 순간 모두 죽음을 맞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분의 죽음은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활동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지만 우리는 이 두 분의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런 면에서 백범과 장준하에 대한 강의는 반쪽강의가 될 수밖에 없다.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서는 쓸데없이 열을 내거나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느냐는 식의 냉소적 태도를 보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도대체 이 눈망울 초롱초롱한 젊은이들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미래의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이들에게 나는 역사적 자긍심 대신 역사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전 어느 세대보다 독립적이고 개성이 강한 이 시대 젊은이들이 역사적 망각증과 선택적인 기억상실증을 극복할 때 비로소 세계인도 이들을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 또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그 어느 사회보다 높은 문화민족으로 대우하지 않겠는가.

새학기에는 백범 암살의 진상과 장준하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길이 열려서 강의실을 메운 학생들에게 이게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우리 사회의 저력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이 정도의 자기 교정 능력은 있는 사회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히딩크 식으로 표현하면 나는 백범과 장준하의 죽음의 진상까지 낱낱이 해명된 제대로 된 백범 강의, 온전한 장준하 강의에 목이 말라 있다. 해방된 지 60년이 다 되가는 이 시점에서조차 과거사 규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후대 사가의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배운 춘추필법이 그랬고, 우리가 후손들에게 가르칠 역사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