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산벌”과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시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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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영화 “황산벌”과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시각들

강문석(고대사 분과)

  영화 “황산벌”은 7세기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립을 배경으로,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한 전쟁을 묘사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는데, 백제의 멸망은 7세기 고구려ㆍ백제ㆍ왜의 연합이 당ㆍ신라의 연합에 비해 상당히 느슨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림 1> 영화 황산벌 포스터

  결국 백제는 홀로 라ㆍ당연합군을 막아야했는데 백제의 해군은 당의 해군을, 백제의 육군은 신라의 육군을 막아야했다. 황산벌전투는 백제의 육군이 신라의 육군을 막아야 했던 전투이다.

  군대수는 백제가 5천이었고 신라가 5만이었다. 군대 수만으로도 이미 승패가 예견되어 있었으나 백제군은 뛰어난 용맹성으로 신라군을 막고 있었다. 전쟁의 승패에는 인원수 뿐 아니라 사기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제군의 사기가 신라군을 훨씬 능가한 것인데, 이것은 황산벌 전투가 백제의 존망이 걸린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계백은 출전에 앞서 자신의 처자를 죽인다. 계백은 승패가 자명한 전투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가족들을 미리 죽인 것인데 이는 현대의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의 동반자살과 비슷하다.

  영화에서 계백의 부인은 이 동반자살을 따르지 않고 자신과 자식들의 당연한 생존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는 계백에게 용납되지 못한다. 계백 처자의 죽음은 동반자살 외에 선전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사령관이 죽음을 각오하고 이 전투에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선전은 처자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림 2> 영화 황산벌 장면

  백제군이 이렇게 죽음을 각오한 군대였음에 비해 신라군은 사실 전쟁의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에서 백제에 가장 원한이 컸던 층은 신라왕실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에서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인 김품석의 아내를 죽인 것은 김춘추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 외 계층이 이 전쟁의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 것을 짐작하고 있던 김유신심리전을 시작한다. 먼저 전쟁을 일으킨 지도층이 일반병사들 뒤에 숨어있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효과가 크지 않았다.

  품일의 아들 관창이 그 다음 주자가 되는데 관창은 당시 나이 16세였다. 이 나이로 전쟁에 출전하는 것이 드문 경우였는지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품일은 자신의 아들이 나이가 어림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반굴과 관창이 비슷한 연배로 나오고 관창이 특히 명예심이 큰 인물로 묘사된다. 이것은 관창이 끈질기게 적진에 뛰어드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관창의 죽음이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촉매가 되었던 점을 설명하는 데는 설득력이 약하다.

  관창이 반굴보다 어린 소년으로, 부모에 대한 효와 나라에 대한 충을 충실히 따르는 순수한 사람으로 신라군에게 인식되었기 때문에, 관창의 죽음이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을 일으킨 지도부가 전쟁에 결사적으로 대응하고 있고, 전쟁은 어느 한편이 무너져야 끝난다는 것을 깨달은 신라군은 사기를 진작시켜 백제군을 공격한다. 수적 열세에서 사기도 백제군에 필적하는 신라군에 의해 백제군은 무너진다.

  이 전쟁에서 백제의 군사들 중 유일하게 한 군사가 살아남는다. 그도 끝까지 죽기를 각오하지만 의미없는 죽음을 하지 말라는 계백의 설득에 도망가게 된 것이다. 계백 자신은 백제 집권층을 대표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이미 승패는 자명하였던 것이다.


<그림 3> 영화 황산벌 장면

  영화 “황산벌”은 몇 가지 안되는 기록을 바탕으로 황산벌 전투를 겪었던 백제와 신라의 여러 계층들의 전쟁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각들은 허구의 사건들로 구성되었으나 그 역사적 타당성은 긍정적이다.

                              ** 이 글은 정동준,  “영화 “황산벌”과 7세기 국제전” 과 연관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