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지도는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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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지도는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가

 

정대영 (중세2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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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포스터 (네이버영화)

 

들어가며

영화 ‘고산자’를 보았던 기억을 다시금 더듬어가려 한다.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에서 스크린 상의 감흥을 찬찬히 복기하는 일이라는 것은, 영화평론가가 아닌 필자의 입장에서는 벅찬 일임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릿속에 남아있던 기억의 장면들은 점차 희미해지며 그 인과관계는 부유하게 될 것이었다. 경험을 통해 돌이켜 보건대 한 달이라는 시간은 잊히기에 충분한 때였다. 작금의 현실은 그 어떠한 외물에 오랜 사색을 허용할 만큼 낭만적이지도 못하거니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아 왔었다.

 

아마 그래서일까. 동기가 필요했다. 예전, 방탕한 소설가들을 호텔에 머물게 하면서 원고를 독촉받았다는 소위 ‘통조림’같은 제어를 혹여 원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필자가 그런 쪽의 성향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기록은 언제나 기억의 그것을 뛰어넘는 법”이라던 구상덕(具尙德)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쉬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살아가며 늘상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영화 ‘고산자’의 리뷰를 모집한다는 알림에 답을 한 것은.

 

필자는 고지도와 지리지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전공이 역사학이 아닌 서지학이기에, 그리고 학부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이러한 자료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지게 하였는지 모르겠다고 가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는 고지도학회(정식명칭은 ‘한국고지도연구학회’)가 있는데 이곳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를 보자면, 외연을 아무리 넓게 잡아봐야 관련 연구자가 50여 명을 넘지 않을 성싶다. 그만큼 이 분야가 전문적인 영역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더 많은 참여가 요구된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적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 영화화되어 개봉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다른 분야의 학자들도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전공분야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은 관련 학자에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 최소 소심한 필자는 그러했고, 그와 같은 감정은 무관심이라는 방법으로 표면화되었다. 이번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사람들의 리뷰를 살펴보니, ‘역사 왜곡’,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무시하는 구시대적 이야기’ 등등의 말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을 보았었다. 사실 영화를 볼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 것이다. 찻잔 속 태풍은 그저 필자의 삶과 전공에 어떠한 괴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추석 연휴. 모든 일의 발단은 그 길었던 추석 때문이었다. 올해는 연휴가 유독 길었기에 아내와 시내의 영화관을 들르게 되었는데, 아무리 비껴가려 해도 결국은 볼 영화가 ‘고산자’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냉소적인 시선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 비판해 주마.”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며, 리뷰를 쓰는 작금의 시간이 되어서도 여러 감정이 혼재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할 듯하다. 아마도 관련 학자로서 이런 복합적인 이유가 다시금 오른손에 펜을 쥐게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고증에 앞서, 그러한 마음을 스스로 설명해야만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이나,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분명 필자에게 날카로운 비판과 왜곡된 사실관계에 대한 지적을 바랐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으나 고백하건대, 애증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문헌에 천착하고 있던 필자와 같은 학자에게 ‘사람’이라는 화두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를 살펴보고 참조하면서도 그것을 만들었던 김정호라는 인물엔 늘 관심이 비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속에 이름 석 자를 남긴 그가 우리와 같이 희로애락을 겪었을 것이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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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스틸컷 (네이버영화)

 

Fact Check는 필요하기에

리뷰를 작성하면서 인터넷상에 게재된 많은 수의 영화리뷰를 읽어보게 되었다. 일반 블로그에 올라온 사람들의 후기에서 시작하여 영화 평론가의 전문 리뷰까지 상당히 많은 리뷰가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영화의 리뷰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그러한 재주도 없기에 연기력, 연출, 미장센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있는 바가 없다. 다만 영화에 나타나는 사건과 이야기들이 고지도를 전공하는 필자의 그것과 같다는 점에서 약간의 첨언을 할 수 있는 정도이겠다. 하여 어떻게 글의 시작을 알려야 할지 고민이 들게 된다. 우리들은 이미 정규교육 시간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해 배워 왔기에 필자가 다시금 교조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만약 그리해야 한다면 다큐멘터리도 아닌 영화의 허구성에 분노해야 하는 것인지도 고민이 된다. 물론 다큐멘터리도 모든 것이 사실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먼저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영화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행차에 몰래 따라나섰던 김정호가 쫓겨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때 그를 보호해 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실제 사료에서도 김정호에게 많은 지도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신헌(申櫶)이다. 이후 전국을 누비는 장면과 계절의 변화가 제시되다가 마지막으로 백두산 천지에 올라 감격해 하는 장면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 방랑 끝에 한양의 집으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김정호가 종로 인근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시장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이미 김정호가 대동여지도 목판을 어느 정도 제작하였으며 새롭게 교정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흔히 신유본이라고 불리는 1861년의 대동여지도 이후에서 갑자본이 만들어지기 전인 1864년 사이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영화에서는 김정호가 지도와 지리지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찾고 있다. 당시 황해도 토산(兎山)에서는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군민을 차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호의 아버지도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관에서 나누어준 회화식 지도의 오류로 인해 혹한의 추위에서 산맥을 헤매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어두운 과거와는 달리 차승원이 연기하는 김정호는 시종일관 희극적이고 낙천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빈곤한 삶에서도 지도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모습, 그런 그를 뒷바라지하는 딸과 여주댁의 모습이 잔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정호의 딸은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의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사료에서는 김정호의 딸은 물론 결혼관계나 가계조차 알 수가 없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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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스틸컷 (네이버영화)

희극적인 내용으로 진행되던 영화의 줄거리는 김정호 지도의 정교함에 감탄한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 세력 사이에 김정호가 휘말리기 시작하면서 급박해진다. 양측 모두 강제적으로 목판의 판목을 압수하려 하고, 이런 와중에 딸 순실이와 여주댁이 천주교 박해로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둘을 뒤로하고 김정호는 마지막 답사지인 독도를 향해 발길을 돌린다. 판목을 불 지른 이후 그의 동료인 바우는 김정호 일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22첩의 대동여지도를 광화문광장 앞에 펼쳐놓아 사람들 앞에 공개하게 되고, 김정호는 꿈에 그리던 독도를 방문하면서 영화가 마무리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의 허구성에 구태여 분노를 할 필요는 없겠으나, 몇몇 중요한 사실관계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먼저, 김정호라는 인물 자체에 관한 사실이다. 김정호에 관한 기록은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학계에서는 그에 대한 사료가 A4용지 한 장을 채우기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현존하는 방대한 분량의 지리지와 지도, 세계지도 등을 제작했던 당사자임에도 아주 파편적이고 적은 기록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김정호 개인에 대한 접근은 개연성과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에게 딸이 있었을지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필자가 알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황해도 어디쯤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으나 무슨 일을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신헌의 식객이었던 정황이 있으나 단순히 지도를 도움 받은 것인지 그를 위해 지도를 만들어서 생계를 이어나간 것인지도 부정확하다. 예전 어떤 연구자는 김정호가 개인이 아닌 몇 사람의 연합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도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마치 영국의 셰익스피어를 설명할 때, 그 실존과 생애의 불분명함에 비하여 남겨진 작품의 방대함과 높은 수준이었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대필설이나 단체설이 등장했던 것과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여하간 그가 사료에 기록될 만큼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둘째, 김정호는 전국을 답사했는가. 최근 학계에서는 김정호의 지도들이 그 이전 시기의 방대한 지도들을 편집한 집대성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전국의 모든 지역을 하나하나 그려나갔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처럼 답사를 정말 했을지 안 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겠다. 또한, 전국을 세 번 답사하고 백두산을 수차례 올라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가장 뛰어난 지도학자는 여행가 가운데서 나와야 할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대항해시대 유럽에서 지도학이 가장 발달했던 곳은 네델란드였는데, 이러한 까닭은 수많은 항해자들이 전해주는 정보가 실시간으로 수합되어 정리되고 업데이트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뛰어난 지도의 제작은 방대한 지리정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단순히 걷기만 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김정호가 신헌의 도움으로 관부의 지도를 다량으로 열람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일부 지역을 선정하여 직접 답사를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답사도 거질의 지도인 ‘청구도’와 ‘동여도’를 만드는 이전 과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대동여지도는 기존에 제작한 지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목판변환용 작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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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22첩을 이어붙인 모습 (규장각 소장본)

셋째, 대원군에 의해 목판과 지도가 불타 버렸고 김정호는 옥사당했는가. 최근에는 정규교육에서부터 김정호 옥사설 등이 일제에 의한 날조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근거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동아일보’와 앞서 말한 ‘조선어독본’ 등에서 등장한 것으로 어떠한 사료와 근거를 가지고 썼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대부분 반박이 가능한 이야기 들이다. 대원군의 탄압과 지도 및 목판 몰수에 대해서는 1884년 작성된 ‘내하책자목록(內下冊子目錄)’만을 보아도 논파가 가능할 것이다. 고종이 하사한 서적목록인 이 책에서는 대동여지도 및 여러 지도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하사품 이외에도 규장각 및 왕실에서는 다수의 대동여지도를 소장하고 있었다. 현재 국내외에 소장된 대동여지도는 수십 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일실된 것과 확인되지 않은 자료를 합한다면 당대에는 훨씬 많은 수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있다. 목판에 대한 사실은 영화의 엔딩장면에서도 등장하는 바이지만 현재 숭실대학교와 국립중앙박물관에 대동여지도 목판의 원본이 소장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기에 목판소각설도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학계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판매용 출판물, 즉 방각본(坊刻本)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대두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의견도 향후 긍정적으로 반영되어 논의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역시 자선사업으로 방대한 지도제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후원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수많은 소장처에 대동여지도를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돈을 받고 지도를 팔았다는 것이 확인되더라도 김정호의 지도학적 위대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과 인쇄문화사에 깊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기에 터부시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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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김정호가 만든 전국지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완성된 ‘청구도’ – 1834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필사본으로 2책이다. 책을 위아래로 붙여서 이어보게 만든 독특한 시도를 한 지도로 지리지와 지도를 결합한 김정호의 실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장서각 소장본)

 

네 번째,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과연 백성들의 실용을 위해 제작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당대의 일반 백성들에게 지도가 어느 정도 필요했는지는 정확하게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백성이 사용하기에 대동여지도는 너무 방대하고 자세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한다. 이는 오히려 군사용이나 고을 수령 및 중앙정부에서 활용하기에 편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도 보인다.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지도는 ‘수진일용방’과 같은 포켓형태의 지도책이나 ‘천하도’를 포함한 13장본의 지도책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상세한 형태의 정상기식이니 정철조식의 동국지도는 식자층에게 유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계층에 따른 지도사용의 차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는 거의 모두가 스마트폰의 지도를 보고 있으나 예전에는 승용차마다 전국교통로 지도집이 한권씩 비치되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데 정교한 지형도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지도는 역시 나름의 수요가 있을 것이며, 교통로와 톨게이트가 잘 나타난 지도가 최고의 여행용 지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의 상세함과 정교함의 고하를 논할 수는 있겠지만 그 가치를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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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조선후기 민간화에서 유행한 수진일용방 (장서각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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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7] 정상기식 ‘동국지도’의 형태 – 영조연간에 완성된 정상기의 지도는 이후 많은 지도학자에 의해 수정, 보완 되면서 김정호까지 이르게 된다(규장각 소장본)

 

 The Story of Us

저번 주, 학회에서 선배 고지도 연구자를 만나 이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분은 영화에 대해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것이 허구” 라고 짧게 평을 하셨는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수긍을 하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영화가 끝난 이후로 남아 왔음을 고백해야 할 듯하다. 무엇이 영화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내치지 못하게 하였는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그 영화에는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건 아니 건, 사실관계의 왜곡이 있는 것을 떠나 필자는 고지도를 연구하면서도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물론 그들이 살아 숨 쉬었으며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막연하게 신화 속에 있는 미지의 무엇처럼 느껴졌다. 남겨진 문헌을 볼 때면 늘 연구의 목적으로 이용하였을 뿐 그들 삶 속의 희로애락을 나의 삶에 반추시켜볼 생각을 한 적도 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과연 인문학 비슷한 것을 한다는 필자의 학문에서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혹시 그렇게 망각하고 지내온 시간 동안에 필자의 모습은 물질주의자의 그것에 가깝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이런 속내가 너무 감상적이라면 할 말은 없으나 궁금해졌던 것이다. 이렇게 애를 써서 이루고자 하는 저 뒤에는 진정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하고.

 

지난해 필자는 조선왕조실록과 형지안에 대해 개인적인 조사를 하면서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선생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막연하게 나마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본 실록을 지킨 두 명의 유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으나, 관련 사료를 조사하면서 그 두 사람에 대해 더욱 궁금해 졌다. 그리고 점차 빠져 들게 되었다. 그들이 내장산 용굴암에 들어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록을 지켜왔던 사실과 당직의 기록인 ‘임계기사’를 남겼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잊혀 가고 있었다. 일부 관련 연구자가 아니면 들어볼 일이 없는 인물들이며 특히나 그들에 대한 연구가 논문 한 편에 그친다는 것도 아쉬운 일이었다. 하여 그들의 신위를 모신 정읍 남천사를 답사하고 내장산에 있는 용굴암을 찾아갔었다. 하루 종일 볕이 들지 않는 그 작은 동굴에서 노인 두 사람은 실록을 지키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 작은 위대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선조실록부터 열람을 했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역사에 비단 한 두 사람이겠는가. 김정호는 그나마 널리 알려졌지만 이러한 이들을 찾아내어 모습을 밝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 백이전, 이른바 백이열전을 다시금 읽어본다. 백이와 숙제는 그리하여 원망함이 없이 생을 마쳤는가. 허유, 변수, 무광과 같은 이들은 왜 지극히 높은 덕을 지녔다면서 기록 한 줄이 남아 있질 않는가. 사마천은 이야기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금 세상에 선양하고 드러나게 해 주는 일은 바로 학자의 역할이라는 것을. 백이전의 복잡한 플롯은 백이의 삶과 천도를 묻는 듯 하다가 결국 역사가의 의무를 말하며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런 것처럼 밝혀져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단순히 지도 한 폭, 책 한 권을 보며 무심히 넘어갈 수도 있으나, 그런 유산을 통해 다시금 그들을 반추하여 말할 수도 있지는 않은지.

 

김정호는 조선의 뛰어난 앞 시대 지도학자로, 황엽, 윤영, 정철조를 언급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철조는 그나마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앞의 두 사람은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산에서 높은 봉우리가 생기기 위해서는 거대한 기저의 산맥을 필요로 한다. 촛대바위처럼 저 혼자 잘나서 우뚝 솟는 사람의 경우는 그 무너짐의 세월을 장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저 산의 꼭대기에서 김정호를 보았다면, 이제는 그 기저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조금씩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에 잠기게 된다.

 

글을 마무리하며

예전 학부시절 지질학 수업을 들은 일이 있었다. 당시 영어로 된 개론서의 서문에서 필자는 인상적인 말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돌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와 같을 것이다. 필자 역시 배운 바가 그러하기에 지리지와 고지도를 통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방대한 수량의 고지도와 지리지는 그 자료적 가치에 비해 여전히 활용이 많이 못되고 있다. 고지도 자료를 예로 들자면 그 심미적인 아름다움에서 연구가 그칠 것이 아니라, 지역성, 교통로, 행정구역에 대한 상세한 자료로서 더욱 활용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여전히 조선시대를 연구함에 있어 우리는 각 군현의 정확한 행정구역 면적과 범위, 혹은 주요 장소의 위치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현대의 지도를 가지고 조선시대의 사실을 논한다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이 자명할 것이다. 이미 일본과 중국에서는 역사지도집을 제작하여 지역연구에 통일성을 기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지리지와 지도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 본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긴 이름의 지도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워왔던 예의 사실처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라는 점에서 이 지도는 동서양의 수많은 학자들을 매료시켜왔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는 최근 류코쿠대학(龍谷大學)에서 10년에 걸쳐 복원연구가 진행되었다. 지도 한 장을 가지고 10년을 연구한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를 통해서 그동안 오래되어 확인이 어려웠던 5000 여 개의 지명이 새롭게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단발적인 연구가 아닌 목적을 상정한 연구의 결과가 이와 같을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외국의 연구사례를 들을 때면 부러운 감정을 느끼며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한 사례를 들어보자. 네팔에서 연구를 진행 중인 재야지도학자 오길순 선생님은 10년이 넘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28,000 여 지역을 현대지도에 대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고지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이러한 작업을 바라보노라면, 관련 연구자로서 숙연한 마음이 들게 된다. 김정호를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이들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지도, 그리고 또다시 무관심 속에서 명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이 만들어 낸 문헌들이 중요한가. 물론 그러하겠지만 세상을 이루어낸 그 모든 일들이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필자에게 ‘고산자’라는 영화는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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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고지도 연구자 오길순 선생님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전체 디지털 모사본

 
“처음부터 나라를 가르는 지도가 어디 있었어. 세상 만물은 변하는데 지도라고 변하지 말란 법이 또 어딨어. 까짓 지도는 다시 그리면 그뿐이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지도를 그리란 말이야!” – 끼띠삭(Kittisak Kittisophano, 태국의 불교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