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 히라누마 도슈여도 독립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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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근대사분과)

 

결국 영화 <동주>를 봤다. 개봉 소식을 듣고 기대하면서도 보지 않았었다. 예고편을 본 뒤 볼 생각이 더 없어졌다. 배속 장교가 대학 강의시간에 윤동주의 머리를 강제로 삭발하는 장면이 불편했다. 지나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원고 청탁을 핑계로 봤지만 보는 내내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외과 의사인 지인은 의학드라마의 수술 장면을 싫어한다. 역사를 전공한 나는 웬만하면 사극을 피한다. 아예 대놓고 허구적 설정을 드러낸 작품은 예외다. 직업병이다.

 

<동주>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짧은 일생을 그린 영화다. 다큐멘터리 같았다. 주인공들의 일본어 대사로 그들의 시대가 식민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어색했지만 ‘연변말’은 그들이 용정 출신임을 상기시켰다. 흑백 필름은 식민지의 어두움을 잘 표현했다. 제작비가 적었던 탓인지 곳곳에 잘못된 고증이 있었지만 영화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윤동주의 해석과 그 해석을 위한 설정이 거슬렸다. 감독은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을 참고했고, 시나리오 작가는 감독과 다르게 해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촌형제인 윤동주와 송몽규를 대비시켰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우등과 열등, 산문과 시, 실천과 관조 등으로 표현되었다. 몽규는 능동이고 동주는 피동이었다. 몽규는 동주보다 먼저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몽규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으면서도 웃었다. 동주는 몽규를 면회했을 뿐인데도 불안했다. 연희전문학교에 갈 때도, 일본 유학을 결정할 때도 몽규가 학교를 선택하였다. 릿교대학을 자퇴하고 도지사대학으로 갈 때 동주는 비로소 몽규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마저도 동주를 좋아하는 가상의 여인의 추천이었다. 교토에서도 동주는 주변이었다. 동주는 몽규와 그 동지들의 모임에 끼지 못했다.

 

동주는 1942년 10월에 도쿄에서 교토로 갔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나흘 뒤에 윤동주가 체포되었다. 지금의 국가보안법처럼 당시의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이적단체’ 조직과 가입이었다. 1928년에 개정된 치안유지법 제1조와 제2조는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조직된 결사를 처벌대상으로 하였다. 결사가 위의 두 조항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조직자, 간부, 결사의 성격을 알면서도 가입한 자 등은 자동적으로 처벌대상이었다. 역할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뿐이었다.

 

교토의 특고(특별고등경찰)는 두 사람과 만난 유학생들을 취조해서 뭔가 그럴싸한 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영화처럼 몽규가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선동한 일은 없었다. 특고는 겨우 한 명을 더 추가해서 세 명으로 ‘교토조선인유학생그룹사건’을 만들어 검찰에 송치하였다.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다. 검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몽규와 동주만 기소하였다. 두 사람의 재판날짜는 달랐다. 조직사건이 아니라 별건이었다. 1941년에 이미 치안유지법은 결사가 아닌 개인의 행위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판결문은 검사의 기소장을 똑같이 인용했다. 몽규와 동주는 공동행동이 아닌 각자의 발언으로 유죄처분을 받았다.

 

영화는 동주의 취조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고의 취조 중간중간 용정과 신촌, 도쿄를 거쳐 교토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특고는 익히 알던 모습, 곧 악랄하고 잔인하며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예의를 지키던 특고는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을 던졌다. 사실 그 모든 것을 주도한 게 몽규가 아니라 동주 너 아니었냐고. 네가 말한 내용에 관계없이 내(특고)가 정리한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영화에 따르면 자신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할 성격이 아니었기에 동주는 조서를 부정했다. 몽규가 조서의 내용대로 하지 못해서 분했던 것과 달랐다. 영화는 동주를 조선독립의 실천에 나설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는” 예민한 감성의 시인이 직접 행동에 나설 리 없다고 말한다. 독립운동가 윤동주는 특고의 조작이었다고.

 

1920․30년대만 해도 독립운동가는 아무나 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처음부터 감옥갈 각오로 나서야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예전과 같은 커다란 조직사건은 거의 사라졌다. 특고는 반전(反戰)의식이나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소소한 발언들을 감시하였다. 일상의 차별을 느끼던 조선인, 특히 유학생들은 누구나 가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동주와 몽규는 교토뿐 아니라 도쿄에도, 조선에도 중국에도 무수히 있었다. 모두가 잠재적 독립운동가였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느냐, 또 그것이 특고에게 포착되느냐의 차이뿐이었다.

 

동주의 창씨는 그의 인생에서나 영화에서나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영화에서 일본 유학 이후 동주의 이름은 항상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였다. ‘민족시인’ 동주의 창씨에 충격을 받은 관객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아직도 창씨개명을 하면 친일파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추진된 ‘창씨’의 실적은 100%였다. 80%는 창씨한 사람들의 신고였고, 나머지 20%는 법정창씨였다. 창씨는 한국인의 성 대신에 일본인의 씨를 쓰도록 한 정책이다. 창씨를 거부했다고 볼 수 있는 법정창씨는 한국인의 성을 일본인의 씨처럼 부른 것이다. 예를 들면 박(朴)을 보쿠, 임(林)을 하야시처럼. 오히려 친일파인 조선귀족이나 도지사 등의 고위 관료 중에 창씨를 신고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창씨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상의 선택이었다. 영화는 ‘민족시인’조차도 창씨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의 지배를 비판하고, 창씨를 친일과 반일의 기준으로 삼는 한국사회의 수준을 문제 삼았다.

 

관람을 불편하게 만든 설정은 특고의 취조 장면이었다. 취조를 받던 동주와 몽규의 가슴에는 수형번호가 찍혀 있었다. 특고는 경찰서에서 취조하고, 검사는 검사국에서 기소하고, 판사는 재판소(법정)에서 판결하였다. 판결이 나면 미결수는 비로소 기결수로서 형무소에 수감된다. 영화는 형무소에 수감된 동주와 몽규를 특고의 취조실로 불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섞어놓기는 동주와 몽규의 용정 시절의 연대기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자막이 올라갈 때 연보가 나왔다. 그것으로 관객의 이해를 바라는구나 생각했지만 이미 영화는 끝나버렸다. 사족인 줄 알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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