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후기 – 조선후기 재정운영과 시장의 변화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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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참여 후기]

조선후기 재정운영과 시장의 변화 양상


엄기석(중세2분과, 동국대학교 석사과정)


일시 : 2014년 5월 31일(토) 오후 1시
장소 : 대우학술재단 7층 제1세미나실
주최 : 한국역사연구회
후원 : 국사편찬위원회
발표
1부 발표 사회 : 권기중(한성대학교)  이근호(한국체육대학교)
2부 토론 사회 : 문용식(전주대학교)

1. 총론 : 조선후기 재정운영과 시장의 변화 양상

발표 : 최주희(한국학중앙연구원)
2. 17ㆍ18세기 戶曹 ‘加入’의 전개와 추이
발표 : 임성수(충남대학교)  토론 : 이철성(건양대학교)
3. 17세기 군제개편이 서울의 상업발전에 미친 영향
발표 : 박희진(경북대학교)  토론 : 김종수(군산대학교)
4.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 호속목 혁파와 재정운영의 변화
발표 : 김동진(한국교원대학교)  토론 : 문광균(충남대학교)
5. 18세기 땔감조달 방식과 왕실ㆍ정부의 연료소비
발표 : 최주희(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 : 조영준(한국학중앙연구원)
6. 18~19세기 無土免稅地 에서의 導掌 차정과 傳繼
발표 : 이성임(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토론 : 송양섭(고려대학교)
7. 순조대 정국과 시전정책의 추이
발표 : 김정자(한신대학교)  토론 : 이경구(한림대학교)

 


   財政이란 사회 혹은 집단을 유지시키는 기반에 해당된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태도, 그리고 개인이 국가에 받는 영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재정의 실체에 대한 접근은 국가의 시스템과 사회상을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재정사의 연구, 특히 朝鮮時代 재정에 대한 연구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검토해야할 자료가 방대하며, 용어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중앙재정 연구에서 여러 학자들이 함께하는 공동 연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공동연구의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이번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중앙재정반’의 공동연구회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조선후기 중앙재정의 본 모습에 다가갈 수 있는 자리였다. 필자는 중앙재정 연구반의 소속이 아니며,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원도 아니다. 다만 조선후기 재정에 관심을 갖고 있어 여러 선생님들의 高見을 듣고자 이번 발표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재정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번 후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이 발표의 요지에 어긋나 발표자ㆍ토론자 선생님들의 노력에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후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먼저 본 발표에 앞서 최주희 선생님의 이번 발표회에 대한 총론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부의 시장을 이용한 재정 정책의 전개로 재정운영 원리뿐만 아니라 조달과 유통, 매매관계에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로 이번 발표회에서는 크게 세 가지 영역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선 재정운영의 변화를 公的 영역에 해당하는 戶曹, 私的 영역에 해당하는 宮房의 사례를 통해 검토하고자 하였으며, 두 번째는 대동법 시행 이후 현물 공납이 시장구매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발생한 서울시장의 변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군제개편으로 서울의 군인인구가 증가하고, 通共政策으로 禁難廛權이 축소 시행되는 과정에서 서울시장의 성격이 조달시장 뿐 아니라 민간소비시장을 포괄하는 성격을 지니게 된 점에 주목하였다. 이상 세 가지 영역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 재정운영과 시장의 문제를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 이번 발표회의 의의였다.



총론에 이어서 본 발표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17ㆍ18세기 호조의 ‘加入’에 대한 임성수 선생님의 발표였다. 선생님은 이전 논문에서『度支田賦考』의 분석을 통해 시기별 가입 규모와 18세기 후반 이후 전세의 감소ㆍ재정수요 증가에 따른 경비 부족을 가입으로 확보하였음을 밝히신바 있다. 이번 발표는 기존에 언급하지 못하였던 가입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그 종류, 그리고 18세기 이후 호조 재정에 끼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었다. 선생님은 17세기 군비지출의 감소와 宣惠廳과 같은 대규모 재정 아문의 발생으로 가입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가입에는 정기 가입과 비정기 가입이 있으며, 정기 가입의 경우 18세기 이후부터는 호조의 정기적인 수입원으로 자리 잡았다고도 설명하였다. 비정기 가입의 경우에는 흉년이 들거나 사신의 접대, 국가의 의례 등 수입보다 지출이 증가할 때 받는 지원이었는데, 문제는 19세기 이후 이러한 비정기 가입이 기존의 ‘節用’을 전제로 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정기 가입으로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결국 가입은 호조의 재정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19세기 가입의 증가는 기존의 ‘量入爲出’에서 사실상 ‘量出爲入’으로 재정 운영의 원칙이 변화했음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발표는 박희진 선생님의 17세기 군제개편에 따른 서울의 상업발전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기존에 조선후기 인구변동에 주목하셨는데 서울의 상업 발전을 大同法의 시행에 따른 결과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탈피하여 17세기 군제개편에 따른 서울의 인구변화도 상업발전에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이번 발표의 핵심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7세기 중반 서울의 3군영 체제가 완성되면서 직업군인이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관료와 노비들로만 대부분 구성되어 있던 서울의 인구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유입과 동시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상품화폐경제가 활성화되었고 군제개편에 따른 서울의 인구 증가가 상품시장의 양적 확대를 크게 진전시키는데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의견이었다. 결국 서울이 행정ㆍ군사 도시라는 성격에서 행정ㆍ군사ㆍ상업 도시로 성립하게 되는데 재정 개혁과 같은 직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군제 개편에 따른 인구의 변화도 그 배경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다음 발표는 조선전기 포호정책 등을 연구하신 김동진 선생님의 17세기 후반~18세기 초 虎贖木 혁파와 이에 따른 재정운영의 변화에 관한 발표였다. 호속목은 본래 공물로 내기 위한 호ㆍ표피를 구하기 위해 범과 표범을 잡는데 이를 잡지 못하는 고을에서 벌로 값을 내는 것을 일컫는데 대동법 시행 이후 같은 이름으로 쌀이나 면포를 거두어 시중에서 호ㆍ표피를 구매해 쓰던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이르러 이를 폐지하게 되는데 국내의 호표 개체수의 감소와 청의 표피 진헌 중단에 따른 결과였다. 발표자 선생님은 결론 부분에서 호속목의 혁파 과정을 통한 재정 운영의 특징을 주목하였는데, 우선 생태환경과 국제 정세의 변화에 조응하면서 재정이 운영되었고, 성리학적 명분론을 통해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지방 군현의 수령은 사재정을 마련하여 호ㆍ표피를 마련하거나 그 값을 대납하는 행위를 통해 국가의 수요를 충족시켰다는 점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호표피라는 시장 가치가 있는 상품이 생태 환경과 국제 정세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 변화하는 점을 통해 시장을 작동하는 개체가 재정 운영을 변화시키는 기제로도 작용되었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상 1부가 마감되고 잠깐의 휴식 후에 2부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 발표는 앞서 총론을 발표해주신 최주희 선생님의 18세기 땔감조달 방식과 왕실ㆍ정부의 연료소비에 관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조선후기 중요한 자원이자 수취대상이었던 산림이 사점화되고, 산림자원의 관리방식이 변화하는 원인을 ‘대동법’의 시행에서 찾고자 하였다. 먼저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선전기 임산자원을 관리하여 재정에 활용하는 방식이 크게 변화하여 서울의 조달시장에서 땔감을 구매해서 쓰게 되는 형식으로 조달 과정이 변화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급된 땔감은 각 중앙의 기관과 왕실, 심지어는 출합한 대군ㆍ공주 등에게까지도 지급되었는데 이 양은 대체로 영조 29년에 3만 9천석, 순조 8년에는 38,721석으로 추정되며, 전체 공물재정의 19.1%와 17.8%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음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반경상비로 궁상을 치를 때나 사신방문 등으로 도감을 설치할 경우 추가로 수급해야 했기 때문에 땔감은 전체 공물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비중이었으며, 다만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연료 소비량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은『度支定例』와『宣惠廳定例』와 같은 지출례를 간행하여 무분별한 소비를 통제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다섯 번째는 규장각에서 소재하고 있는『內需司庄土文績』을 통해 본 18~19세기 無土免稅地에서의 導掌 차정과 傳繼에 관한 이성임 선생님의 발표였다. 선생님은 기존의 1776년 丙申正式에 의해 혁파된 것으로 파악되었던 무토가 최근『내수사장토문적』의 해제과정 중에 1776년 이후에도 상당 기간을 존속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토 도장권의 혁파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고, 구체적으로 연구되지 못했던 무토 도장의 차정과 거래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발표의 목적이었다. 발표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 무토 도장은 1864년 호조직납의 원칙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존속되었으며, 1894년에 가서야 甲午陞摠으로 무토가 혁파되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무토도장은 유토도장에 비해 업무가 과중하지 않았으며, 10년마다 이정되는 무토의 성격 상 도장권 역시 10년을 연한으로 옮겨가며 차정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무토도장의 가격이 시간이 지날수록 전체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무토의 도장권 획득이 이권 사업이었음을 설명하였다.

마지막 여섯 번째 발표는 김정자 선생님의 純祖代 정국의 동향과 시전정책의 추이였다. 발표는 정치적 동향에 따른 재정 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반대로 재정 정책의 변화에 따른 정치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기존에 英ㆍ正祖代의 정치세력 변화에 따른 通共政策과 市廛政策의 변화양상에 대해 논의해오셨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순조대 정국 변화에 따른 시전정책에 대해 주목하였고, 순전 대 이전 영ㆍ정조 대의 시전정책과 통공정책과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발표 내용을 요약하자면 禁難廛權을 중심으로 이를 六注比廛으로 제한한 통공정책의 추진세력과 육주비전과 일반시전으로 금난전권을 확대하려한 통공정책의 추진 세력을 비교해 볼 때 정국을 주도한 세력의 변화에 따라 통공정책이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신해통공의 경우는 영ㆍ정조 연간의 탕평정치의 소산으로 노론ㆍ소론ㆍ남인의 협동한 상황에서 완성된 정책이며, 이러한 기조가 순조년간까지 이어졌음을 설명하였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먼저 발표자 선생님과 토론자 선생님간의 상호 질의가 오고갔다. 하지만 토론 시간의 부족으로 심도 있는 토의는 오고가지 못했다. 다만 프런트에서 여러 선생님들께서 지적해주신 대로 조선시대 재정운영의 실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각각의 연구자간의 주제와 연구 결과물 속에서 교집합을 찾아내고, 상호 연관성을 이끌어내어 긴밀한 협조 속에 구조의 순환을 찾는 것이 이번 공동연구회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몇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었지만 이번 공동연구회는 조선시대 중앙재정의 실체파악을 위한 일보 전진이었음은 분명하다. 가입에 대한 실체가 파악되었으며, 재정정책 뿐만 아니라 인구의 변동 역시 시장 변화의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호속목제가 변화하게 된 원인과 재정운영과의 관계, 왕실과 정부관서의 땔감 공급과 수요를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역사가라면 누구나 설레는 새로운 사료를 통해 무토 도장의 실제 모습을 확인했고, 정치사와 경제사의 결합을 통한 시선으로 19세기 시장정책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발표를 통한 연구 성과뿐만 아니라 토론 과정을 통해 드러난 발표문의 보완점, 그리고 중앙재정반이 해결해야할 과제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는 점 역시도 이번 학술회의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아직도 조선시대의 재정은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재정반의 공동연구는 중요하며, 중앙재정반의 함께하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커다란 결실을 이룰 것이라는데 확신한다. 벌써 중앙재정연구반의 다음 학술회의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