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발표회 후기 – 唐代 墓誌銘을 통해 본 고구려·백제 遺民 一族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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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참관후기]

 

唐代 墓誌銘을 통해 본 고구려·백제 遺民 一族의 동향

이여름(고대사분과)

□ 일시: 2015년 11월 21일 토요일 1시
□ 장소: 연세대학교 위당관 문과대학백주년기념홀
□ 주최: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한국고대금석문 연구반
□ 후원: 동북아역사재단

 

1.唐代 墓誌銘에 나타난 中國起源 高句麗 遺民 一族의 현황과 그 家系 기술 
발표 : 안정준(연세대학교)

2.백제 멸망 이후 禰氏 일족의 위상
발표 : 최상기(서울대학교)

3.唐의 고구려 故地지배 방식과 遺民의 대응
발표: 장병진(연세대학교)

4.당 내지의 고구려 유민과 대우
발표: 이규호(동국대학교)


  1917년 나진옥의 『芒洛冢墓遺文』에서 夫餘隆, 高慈, 泉男生의 묘지명이 등장부터 2015년 후반기에 高乙德묘지명이 소개되기까지 중국에서 당 시기의 묘지명이 지속적으로 발견과 보고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고구려 혹은 백제계 유민의 묘지명은 총 38점이다. 묘지명과 이에 등장하는 인물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로만으로는 확인이 어려웠던 요소들이 묘지명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중국소재 고구려‧백제 금석문 연구반(이하 唐代묘지명반)은 중국에서 출토된 고구려‧백제 유민 일족의 묘지명에 대한 기존연구가 개별 연구자의 식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여러 연구자들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여 2013년 9월에 처음 발족하였다. 唐代묘지명반은 우선 묘지명들을 선별하여 기존의 탁본과 판독문 그리고 역주를 참조하여 다시 역주작업을 진행을 하였다. 이는 묘지명을 활용하기 이전의 기본적인 작업으로 이를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공유하면서 보다 정밀하게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역주와 판독을 기반으로 2014년 3월부터는 보다 심화된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또한 2014년 3월에 있었던 한국 고대사학회 주최 합동토론회의 논의내용을 토대로 하여 몇 차례 주제 세미나들을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 唐代 묘지명 연구의 현황을 되짚어 보고, 새로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해 보았다. 이번 발표회에서는 그 동안의 세미나 모임을 통해 공유한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여기서 비롯된 각자의 관심주제 네 편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날 발표회는 총론을 포함한 5개의 발표가 2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정동준 선생님(한성대학교)의 사회로 시작한 첫 발표는 안정준 선생님(연세대학교)과 최상기 선생님(서울대학교)의  공동 총론이었다. 연구회 반장인 안정준 선생님은 「唐代 墓誌銘을 통해 본 고구려‧백제 遺民 一族의 동향」이라는 제하의 총론 발표에서, 민족사적 관점의 한계와 기존 연구의 일관된 이해 였던 시간이 흐를수록 유민 후손들의 선대 및 본국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면서 당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보는 관점의 한계, 그리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故地와 遺民에 대한 당의 보편적 지배를 주목하였다. 이 발표를 통해 민족사적 관점에서 탈피하고 특수성이 아닌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제 1주제 발표인 안정준 선생님(연세대학교)의 「唐代 墓誌銘에 나타난 中國起源 高句麗 遺民 一族의 현황과 그 家系 기술」에서는, <고구려 ‘遺民’의 개념과 범주에 대한 제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는 유민에 대한 범위를 어떻게 규정하고 그 유민의 성격에 따라 그 해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 묘지명에서 가문의 성씨에 따라 그리고 그 세대에 따라 출자나 선조를 기록하는 방식과 성향이 달라진다. 이런 기록의 차이는 후대로 갈수록 유민 의식이 약해지고 모화의식이 강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개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나 성향에 따라서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유민은 출생지를 기준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의 후손을 유민 후손 및 유민 일족으로 통칭하거나 유민 Ο세대로도 기술 할 수 있다.

첫 번째 발표가 끝나고 10여분의 휴식을 거친 후 두 번째 발표인 최상기 선생님(서울대학교)의 「백제 멸망 이후 禰氏 일족의 위상」에서는, 예씨 일가 4명의 묘지명의 출자기록을 기준으로 묘지명 출자기록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예씨 일족의 경우 父인 예식진, 子 예소사, 孫 예인수, 伯父 예군의 묘지명이 확인이 되었으며 이들의 출자기록은 각각 다르면 후대로 갈수록 백제로 들어간 시기는 늦어지면서 더 구체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작이후 바로 매납 되는 묘지명의 성질을 기반으로 형성된 편견과 다르게 이 역시 당 조정의 관리가 확인하는 절차가 있어 이에 따라 형제지간이라도 이들이 남기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출자에 대한 기술 방식이 달라짐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발표는 ‘唐의 고구려 故地지배 방식과 遺民의 대응’이었다. 발표자는 묘지명과 함께 『삼국사기』 지리지 ‘목록’ 기사와 함께 비교·검토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당으로 어떻게 편입되어 가는지 양상에 대해서도 확인을 해 보았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 그 고구려의 옛 영토의 재편이 일단락 되었다. 이 재편 상황이 원래의 구상대로 9도독부 42주 100현이라는 것에는 회의적인 의견이지만 그보다 적은 숫자로든 당의 지배체제가 고구려의 옛 영토까지 적용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에 적용한 당의 지배방식은 기미지배로 보았다. 기미지배는 고구려 외에도 당에 편입된 다른 이민족들에게도 일괄적으로 적용되던 지배 체제이다. 당은 고구려 말기의 종래의 지배구조를 대체로 용인을 하였다. 하지만 기미지배에 적용 시킨 이후에도 고연무나 검모잠처럼 당의 지배체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반발하였다.

마지막 발표는 ‘唐 내지의 고구려 유민과 대우’였다. 발표자는 당의 사민책의 이유는 기존의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기미지배를 실시하고자 했지만 고구려 유민의 이반으로 인해 사민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당이 고구려 故地에서 고구려 유민을 사민시킨 기사를 살펴보면 고구려 유민을 군사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을 당 내지의 변경지역으로 천사시켜 그 지역의 변경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왕사례와 고여진 등의 고구려출신의 군사집단인 성방이 되며 성방을 중심으로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故地애 남아있는 고구려 유민의 경우 안동도호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 출신의 장수들은 이에 투항하여 공로를 세우거나 당 내지로 옮겨져서 활동을 하게 된 경우로 나뉜다. 이런 양상은 단지 고구려인에 대한 특수성이 발현된 것이 아니라 당 정부가 다른 이민족 집단에게도 적용 시킨 것을 고구려 유민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발표가 끝난 후 정리시간을 갖춘 후 개별토론과 종합토론이 있었다. 동국대학교에서 중국고대사를 전공하시는 정병준 선생님의 사회와 함께 동북아역사재단의 이성제 선생님과 한성대학교의 정동준 선생님이 토론을 맡아주셨다.

개별토론이 끝나고 종합토론에서는 묘지명을 보는 입장에 대해서 논하였다. 石見淸裕는 묘지명이 만들어진 후 매납되어 비공식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행장 등을 통해 정부의 검토 혹은 승인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글이라고 보았다. 이성제 선생님은 이를 발전하여 당 정부에게 공개되는 글이기 때문에 망자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객관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일부는 축소하고 일부는 과장하여 왜곡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논지를 전제로 한 이번 발표는 사료 비판적인 면에서는 의의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무비판적으로 이 논지를 받아들인 것 같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번의 발표는 다른 선행 연구와 다른 시각으로 묘지명을 바라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를 통해 금석문 반에서 당대 묘지명을 통해 당으로 이주한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출자기록에 대해 비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해석이 생겨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연구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