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항룡은 후회한다(亢龍有悔)

0
180

항룡은 후회한다(亢龍有悔)

하원호(근대사 1분과)

새해가 되면 길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토정비결 영감님들은 바빠진다. 물론 그 내용이야 “물가에 가지 마라”, “귀인이 찾아온다” 같은 뻔한 것들이지만 요즘같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대형사고에 불안한 서민들이야 한치 앞을 못보는 세상살이에 덕담이라도 듣고 싶어 영감님들의 좌판 앞에 쭈구리고 앉게 된다. 점괘를 좀더 고급스럽게 보려는 식자층은 <<토정비결>>보다는 <<주역>>을 들친다. 일반인들은 <<주역>>을 점술책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주역>>을 밑천으로 ‘동양철학의 대가’, ‘역학자’, ‘역술가’라고 자칭하면서 간판을 내걸고 손님을 받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나 역술이라고 풀어내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토정비결>>이나 다름없는 점괘로만 여겨질 뿐이다. 원래 신비주의는 복잡하고 애매할수록 더 그럴 듯한 법이고, 이 방면의 ‘대가’가 되는 방법 현란한 애매성의 확보가 전제이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현란한 괘상은 좋은 밑천이 된다. 물론 동양철학의 애매함을 현대어로 조금 쉽게 풀어쓴 덕에 별다른 심각한 내용이 없으면서도 쓰는 책마다 잘 팔리고, 얼마 전에는 성행위를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토크쇼도 철학의 이름으로 포장해 비난받는 전직이 철학교수인 현직 한의사도 있으니 반드시 애매한 것만이 상품이 되는 것도 아니긴 하다.

그런데 <<주역>>은 단순히 신비적이고 몽상적인 동양사상을 담고있는 점술책만은 아니다. <<주역>>은 그냥 신수풀이 정도로 여기는 <<토정비결>>류와는 달리 그 자체가 수천년 동양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한 하나의 사유체계이다. <<주역>>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얻을 수 있는 생활철학이나 행동양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전에 최규하씨 덕분에 유명해진 ‘항룡’이란 말도 이 <<주역>>의 첫 장에 나오는 ‘항룡유회(亢龍有悔)’란 효사에서 잘라내서 써먹은 것이다.

<<주역>>의 64개 괘에는 각각 6개의 효가 있고 각 괘에 괘사가, 각 효에도 효사가 있다. 첫번째 괘인 건괘(乾卦)의 여섯 개 효 중 맨 위의 것이 ‘항룡유회’이다.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위에 있는 직선 셋의 도형을 두 개 포개놓은, 즉 한 일(一)자 여섯을 위에서 아래로 나열한 모양이다. <<주역>>에서의 건은 하늘을 말하고 순양(純陽)을 의미한다. 양(陽)은 맑고 따뜻하고 뻗어오르는 기운이다. 그래서 이 괘의 상징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이다.

건괘의 여섯 개 효 중 맨 아래 있는 효를 초구(初九), 곧 초효(初爻)라고 하는데, 양기 중에서도 맨 아래 있는 것은 아직 땅 속에 묻혀 있어 얼음이 풀릴 시기를 기다려야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초효는 용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고 그 뜻인 효사(爻辭)는 잠룡물용(潛龍勿用)이다. 잠복해 있는 용은 용의 덕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숨어 살도록 강요 당해도 불평을 하지않는다. 태평한 세상에서는 나라에 벼슬을 하여 도를 행하고 난이 일어난 세상에서는 물러나 도를 지켜 확고부동하니 이것이 잠복한 용이다.

다음 효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용은 때와 장소를 얻은 용이다. 항상 언행을 삼가고 악을 멀리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선행을 해도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해석된다. 셋째 효는 “군자는 종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 저녁에 삼가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君子終日乾乾 夕 苦 无咎)”로 되어 있다. 덕을 기르고 사업을 보전하기 위해 군자는 바른 말과 참된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다.

네째 효는 “연못에서 혹 뛰어놀기도 한다. 허물이 없을 것이다(或躍在淵 无咎)” 이다. 용이 마침내 날기 시작하려 할 때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해서 그 행동은 일정함이 없으나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제멋대로 방자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허물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다섯 째 효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飛龍在天 利見大人)”로 되어 있다. 날아 오르는 용이 하늘에 도달하니 건괘의 극치이다. 성인이 나타나 만인의 찬양을 받는다고 해석된다. 점복에서 이 괘가 나오면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고 한다.

맨 위에 있는 마지막 상구(上九)의 효사가 “높이 오른 용이니 후회가 있을 것이다(亢龍有悔)”이다.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내려올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민심을 잃고, 현인을 낮은 지위에 두기 때문에 그 보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해도 뉘우칠 일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최규하씨가 스스로 자신을 ‘항룡’으로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비서관은 최씨를 ‘항룡’에 비유했고 그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잠룡’도 못되는 우리같은 서민이야 ‘항룡’이란 말이 도통 낮설기만 하고 한때 유행했던 ‘토사구팽’같은 유식하고 지위 높으신 분들이 주고 받는 선문선답의 한 구절처럼만 들려 ‘항룡’ 근처도 못가보고 ‘팽’도 당할 일 없는 처지로서는 한편으로는 남의 일같고, 한편으로는 왠지 몰라도 속이 메스꺼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씨 쪽이 <<주역>>을 공부해서 ‘항룡’을 쓸만큼 유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비서관의 말처럼 ‘항룡’이라는 말을 앞 뒤를 잘라먹고 쓰여진 예는 역사 속에서도 찾기 어렵다. ‘항룡’의 뒤에는 반드시 ‘후회한다(有悔)’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그 말이 빠졌다고 하더라도 ‘항룡’에는 이미 그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역사서에서 ‘항룡’이란 말이 사용된 용례는 중국 사서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의 찬(贊)에 보이는 정도이다. 여기에는 “찬(贊)하기를… 항룡은 기운이 끊겨 비명에 죽을 운명이다(亢龍絶氣 非命之運)”라고 되어 있다. 왕망은 항우와 싸워 이긴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 인물이다.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당시 한나라 왕이던 평제(平帝)를 죽이고 그 아들을 가황제(假皇帝)로 삼아 섭정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를 뺏아 왕이 되어 국호를 신(新)으로 했다. 그러다가 그의 정권에 반대해 일어난 후한의 광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왕망에게 ‘항룡’이란 말을 붙인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황제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후회할 비명의 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길한 운명을 담고 있는 ‘항룡’이란 말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쓴다면 악담 중에 악담일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봉건왕조가 아닌 요즘같은 세상에서야 흔히 들을 수 없는 생소한 용어인 것은 당연하다.

최규하씨의 비서관이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알고 썼을 정도로 고전에 밝다고 생각되지않고 왕조시대의 왕의 자리에 민주사회의 대통령을 갖다 붙이는 전근대적 발상이지만, 그 결과는 역사 속의 최씨의 운명을 <<주역>>의 점괘로 짚은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잡힌 역사를 보려는 국민의 갈증을 풀어주지 않고 돌아서 버린 그에게 내려질 역사적 심판은 바로 왕망과 같은 ‘비명지운(非命之運)’이다.

최씨만이 아니라 전직이 소위 ‘항룡’이었던 전씨나 노씨는 이미 ‘유회’하는 중이고, 똑같은 ‘항룡’짓을 하다가 추락하기 시작한 에이 에스도 내년 신수를 뽑으면 틀림없이 같은 괘사가 기다릴 것이다. 잠룡이 아니라 이무기도 안될 것 같은 요즘의 잔챙이 자칭 용들도 이 주역의 괘사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