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인사만사(人事萬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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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만사(人事萬事)

하원호(근대사 1분과)

제 3공화국부터 국무총리 임명에는 대학총장이 자주 등장했다. 노정권의 마지막 총리이던 현승종씨도 총장출신이고, 지금 정권의 고건씨도 임명직전에 총장을 지냈다. 정권의 도덕성이 여론의 시비로 등장할 때 정권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사회적 명망가이면서 덕망이 있다고 보여지는 인사를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이들은 평균수명이 많아야 1년 남짓했고, 노정권때 밀가루 뒤집어 쓰고 공안정국을 유도했던 정원식씨만이 다소 다르다.

조선시대 숙종, 영조때를 거치면서 노론의 일당독재가 확립된 이후 남인이나 북인은 관계로의 진출이 적막했다. 남인이 많은 영남지방에서는 자칭 양반이라 행세해도 10대에 걸쳐 한번도 관로에 나아가지 못한 집안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관리를 지낸 가까운 조상이 있다 하더라도 미관말직이거나 실직이 아닌 이름만의 허직(虛職)이 많았다. 안동김씨의 명자가 뜨르르 하다하지만 권력을 가진 쪽은 서울 북촌의 장동(壯洞)에 사는 김씨에 한정되어 이들을 따로 장동김씨라고 부를 정도였고, 경상도 안동의 안동 김씨는 다른 남인양반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간혹 정권의 정체기나 민란 등으로 사회적 저항이 유발될 때 재야에 있는 학자를 등용시켜 세도가문들이 돌아가면서 해먹는 정권에 새 포장을 해보려 했다. 이들을 산림(山林)이라 불렀는데 쓰임새는 1회용이었다. 노론 벌열가문들이 이들을 권력의 핵심에 앉히지 않았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고, 1-2년이 지나면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데 대원군 정권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인사방식이 달라졌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뒤 여러 재상을 모아놓고, “나는 앞으로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삼층으로 높일 작정인데 어떠시오” 했다. 남대문을 삼층으로 높인다는 말은 남인을 요직에 등용하겠다는 것이고 태산을 깎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원군은 남, 북인을 정권의 요직에 많이 등용시켰다. 그러나 노론이 오랫동안 권세를 잡고 있었던 탓에 관직의 2/3는 대개 노론이었다. 대원군정권은 물론 혁명적 정권은 아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세도정치의 한 연장으로 본다. 새로운 인사방식을 택했지만 완전히 노론을 배척할 수는 없었고 대원군이 몰락하고 민씨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는 다시 노론 중심의 정권이 되었다. 고종은 스스로 ‘나는 노론’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노론이 사실상 실세로 자리잡은 상태에서 대원군의 인사정책은 특이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얼굴이 남다르게 잘 생기거나 큰 소리를 잘해 눈에 띠는 자를 주로 기용했고 선비로서 단아하고 일에 능숙한 사람은 침뱉듯 버렸다. 그래서 대원군의 주변에는 시정의 힘자랑하는 자들이나 술 잘 마시고 도박 잘하는 사람들이 들끓고 벼슬을 꾀했다. 천하장안(千河張安)은 대원군이 불우하던 시절에 서울거리를 함께 돌아다니며 술마시고 망나니짓하던, 거리의 악동 네명의 성씨였는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중용되었다. 하루는 어떤 선비가 들어와 꾸벅 큰 절을 했다. 마침 난을 치던 대원군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선비는 보지 못했나 해서 다시 한 번 더 했다. 그러자 대원군은 와락 붓을 집어 던지면서, “네 이놈. 내가 귀신이냐, 재배(再拜)하게.” 놀란 선비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 “아니 올씨다. 좀전 거는 뵙는 인사옵고, 이번에는 물러나는 절이옵니다.” 이 선비는 그 자리에서 고을 원자리를 하나 얻었다.

대원군이 비상식적인 인사를 한 데는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었다. 기왕의 권력가문을 혁명적으로 몰아내지 못할 바에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새 인물이란 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키우지 못한 처지에서는 말 잘 듣는 자들을 능력은 없어도 군데 군데 박아넣음으로서의 안동김씨를 견제하고 자신의 개혁정책을 저항없이 수행하고자는 것이었다. 대원군이 그동안의 외척세도정치와 달리 당시로 봐서는 급진적이라고 할 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주민란을 비롯한 개혁을 바라는 폭발적인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권 자체를 유지할 수 없었던 데 근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적 인사정책은 개혁의 동조자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우선 도덕성이나 능력과는 상관없는 저자거리의 소악패들이 대원군과의 친근관계라는 이유로 다수 등용됨으로서 이들에게 고을원으로서의 자질이나 국가적 경륜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권력을 가진 쪽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인 것이고 와이에스도 집권초부터 ‘인사만사’를 읊어댔다. 하지만 이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 본 관점이다. 장기판에서 차나 포를 어디로 옮기든 장기두는 사람 마음이지만 국가권력기구에서 정책을 수행하는 인물을 고르는 인사(人事)는 대원군과 와이에스의 전례를 보아도 결코 권력자의 만사(萬事)로 끝날 수는 없다.

낙하산 인사로 표현되는 와이에스의 인사정책은 대원군정권의 속성과 닮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다르다. 1860년대 대원군정권은 봉권시대, 왕이나 집권세력들이 차포를 옮기는 식의 인사정책이 가능했지만 1990년대 대한민국은 그렇지가 않다. 언론이 있고 대중의 의식이 질적으로 다른 민주주의사회다. 일개 회사에서도 능력에 따라 그리고 인사고과에 의해 자리를 배정한다. 족벌체제의 회사에서 신바람이 날 리 만무하다. 아무리 개혁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파격적 인사라 해도 능력이나 도덕성에 대한 여론의 검증없는 인사는 만사를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대원군은 인사를 해도 머리를 빌리지는 않았다. 와이에스정권이 이 모양이 된 것은 빌릴 수 없는 머리를 인사를 통해 “빌릴 수 있다”고 착각한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새로 등장하는 디제이 정권의 인사정책은 와이에스의 ‘인사망사(人事亡事)’와는 당연히 달라질 것이고, 반드시 달라져야만 한다. 만사는 올바른 인사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