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신양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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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반전

하원호(근대사 1분과)

다음은 탈춤으로 유명한 안동 하회 별신굿 중의 한 대목.
양반: 나는 사대부의 자손으로……
선비: 뭣이 사대부? 나는 팔대부의 자손일세.
양반: 팔대부는 또 뭐냐?
선비: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양반: 우리 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이거든.
선비: 아, 문하시중? 그 까짓 거, 우리 할아버지는 문상시대인데.
양반: 문상시대? 그것은 또 뭔가?
선비: 문하보다 문상이 높고, 시중보다 시대가 더 크다.
양반: 그것 참 별꼴 다 보것네.
선비: 지체만 높으면 제일인가?
양반: 그러면 또 뭣이 있단 말인가?
선비: 첫째 학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양반: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을 다 읽었네.
선비: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데 있고, 대관절 육경은 뭐꼬?
초랭이(양반의 하인): 나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몰라요? 팔만대장경, 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국 길경(약재이름), 처녀 월경, 머슴 새경.
이매(선비의 하인): 그거 맞다. 맞어.
양반: 이것들도 다 아는 육경을 소위 선비라는 자가 몰라?

양반탈을 쓴 광대와 선비탈을 쓴 광대의 이 엉터리같은 대화는 경상도 안동지방에 전해오는 탈춤놀이 하회 별신굿의 한 도막이다. 구경하는 마을사람들은 이 기막힌 양반, 선비의 대화에 배를 잡고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든다. “야, 팔대부가 어디 있냐, 문상시대는 또 뭐야? 대단한 조상이구먼.” “선비가 육경도 모르나?”하며 흥을 돋우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조선의 양반지배체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란의 과정에서도 이미 의병 중에는 왜군이 아닌 관군과 싸우는 쪽도 있었고 어느 부대는 서울의 이씨정권을 타도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동대문 근처까지 진출해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양란을 즈음해서 중국과 일본은 정권이 교체되었다. 중국은 명에서 청으로, 일본은 도꾸가와정권이 새로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씨가 그대로 정권을 잡고 300여년을 더 유지했다. 동양역사를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을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고 또 그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지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선후기의 많은 개혁을 그 주된 이유로 든다. 물론 조선후기 사회도 양반중심의 신분사회다. 그러나 임란이전까지만 해도 양반이 거의 부담하지 않던 공물이나 군포의 일부를 토지세로 돌려 토지를 소유한 양반에게서도 받는 제도를 만들었다. 대동법이나 균역법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옛양반의 권위는 퇴색되어 갔고 경제적으로 양반의 권위를 지키기 어려운 몰락양반들이 많이 생겼다. 하회탈춤에서, 양반이 평민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학자이던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양반이 도둑놈이 되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에 살던 한 양반은 어질고 학식이 높아 군수가 부임하면 직접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 양반이 워낙 가난해 해마다 고을의 환곡을 빌어다 먹었다. 몇해를 그러다 보니 빚진 곡식이 천석을 넘었다. 어느날 관찰사가 그 고을에 들러 환곡장부를 조사해보고는 크게 화를 내고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했다. 군수가 차마 가두지는 못하고 고민했다. 마침 마을의 부자가 있다가 양반의 환곡을 대신 갚아 주고 양반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군수의 주선아래 양반매매문기를 만들게 되었다.

“양반은 오경이면 일어나 유황 등잔에 불밝히고 … 세수할 때는 주먹으로 비비지 말고, 양치질할 때는 후루룩 소리를 내지 말고 … 손으로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이 얼만가 물어보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마시고 수염을 손바닥으로 닦지 말고, 담배를 필 때는 볼따구니가 움푹 패이도록 빨지 말고, 아무리 성나도 마누라를 패지 말고, 그릇을 던지지 말고…”

문기에 적힌 양반의 조건이 온통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밖에 없자 갑갑해진 부자는 양반이 되면 좋은 점이 무어냐고 군수에게 물었다.
“이웃집 소를 끌어다 자기 땅을 갈고, 마을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양반을 괄시하랴? 백성의 코에 잿물을 들이 붓고, 머리끄덩이를 휘휘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가 감히 원망하랴?”
이 말을 들은 부자는 기가 막혀,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감?”하고는 천석의 쌀을 포기하고 양반을 도로 물렀다.

그런데 양반지배체제가 허물어져 가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양반의 지위를 강 조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주자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폐쇄적 관념론이 되어버려 실학자들이 이를 비판하고 실용적 학문을 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 형식주의가 극도에 달해 예학이 양반들이 가장 존숭하는 학문분야가 된 것도 이 때다. 이미 19세기에 들면 상민들이 신분의 벽을 넘고자 돈으로 사는 등 온갖 방법으로 양반이 되면서 양반의 숫자도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었다. 족보를 안가진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고 족보로는 양반을 구별할 수 없게 되자 전문적 한문교육을 받지 않으면 만들기 어려운 문집으로 양반을 구별하는 풍토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 양반아 저 양반아 하는 소리는 요즘도 높임말이 아니라 평대나 하대하는 말인데 이 말이 생긴 것이 19세기였다.

따라서 『양반전』의 양반의 조건에서 보듯이 조선말기의 극도로 형식화된 예학은 무너지는 양반사회에서 양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마찬가지였고, 하회 별신굿에 나오는 양반·선비의 문벌·학식자랑은 일반 평민에게도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양반전은 흘러간 옛날이야기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21세기가 가까와 오는 오늘에도 새로운 형식을 뒤집어 쓰고 우리 사회에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전쟁의 황폐와 60.70년대의 근대화의 정신없는 ‘중단없는 전진’을 할 때는 양반 자랑은 죽은 자식 뭐 만지는 소리 정도로만 들렸는데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면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80, 90년대의 경제발전과 엄청난 부동산 열기를 틈타 남이 감히 흉내도 못낼 재력을 비축한 쪽에서는 사회적 신분을 높일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그 중 하나가 믿기도 어려운 족보를 끌어다 문벌을 자랑하고 조상의 문집을 새로 만드는 풍토이다. 필자가 아는 노한학자는 요즘 집을 증축하고 자신의 가묘를 만들 정도로 솔솔찮게 재산을 불리는데 요즘의 새양반들이 조상문집에 발문을 써달라거나 글씨를 받으면서 들이는 공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중앙보다는 지방사회에서 심하다. 중앙의 재벌이야 자본의 논리상 양반찾기 보다 돈벌이에 더 혈안이 되겠지만 지방의 중소기업을 하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회사는 자식에게 넘기고 자신은 잃어 버린 양반전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물론 1980년대 말 엄청난 땅값상승으로 하루아침에 졸부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그 양반전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뿌리찾기야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빠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는다 는 의미에서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이들의 신양반전은 옛선비가 가진 청렴, 지조와 같은 논리적 건강성을 부각하기 보다 조선말기의 극도의 형식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현상은 아니다. 양반때문에 망한 나라에 그때와 다를바 없는 형식주의로 무장한 새양반의 등장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