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신돈(辛旽), 요승(妖僧)인가 성인(聖人)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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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辛旽), 요승(妖僧)인가 성인(聖人)인가?

하원호(근대사 1분과)

‘늙은 여우의 요정’. 『고려사』열전에서는 신돈을 그렇게 비유했다. 개를 싫어 하고 음행을 일삼았다는 것이 이유다. 역사상 어떤 인물이 그 만큼 혹독한 비난을 받은 사례가 있을까 할 정도로 기록상에 남아 있는 신돈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어머니가 종인 천한 신분출신에다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여러 과부를 꾀어 간음이나 하던, 막말로 땡중짓이나 하던 인물이었는데, 공민왕을 만난 이후로는 “거짓으로 꾸며 몸을 항상 마른 나무처럼하고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항상 한가지 찢어진 장삼을 입었다”(『고려사』)고 한다. 이 바람에 공민왕이 속아 넘어가 사부로 삼아 진평후에 봉하고 ‘수정이순…겸판서운관사’라는 모두 48자에 달하는 벼슬을 내리고 국정을 전담하도록 했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대로 라면 왕을 현혹해 나라를 어지럽힌 요승(妖僧)인 셈인데, 그래서 전해지는 야사나 근래 쓰여진 역사소설에도 신돈은 구제불능의 인간으로 묘사된다.

원래 역사기록이란 게 기록한 쪽의 주관적 입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신돈의 경우는 좀 심하다. 신돈에 대한 혹독한 비난이 왜 나왔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맡긴 일은 전민변정(田民辨正), 곧 권세가들에 의해 강탈된 토지나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무신정권을 거치고 고려말에 이르면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거나 온갖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농민의 토지를 강탈해 농장을 만들고 농민까지 자신의 농장에서 노비로 일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권력을 배경으로 세금도 내지 않고, 농민들에게 원금의 1/3을 이자로 받는 지독한 고리대도 했다. 당연한 결과로 농민은 토지를 떠나고 국가재정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왕권도 덩달아 바닥으로 떨어져 왕조차 이들 권세가들을 말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공민왕 이전에도 충선왕, 충숙왕, 충목왕 등의 개혁이 있었고, 공민왕 때에도 신돈이 등장하기 전에 몇 차례의 개혁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개혁도 성공을 하지 못하고 신돈에게 이 임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공민왕이 신돈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승려들과도 왕래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 활동이 없던 터라 당연히 귀족들과 관계를 맺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개혁이 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말에 의하면,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 등장한 신진 관료들도 집안이 한미한 것을 감추려고 귀족과 혼인으로 얽혀지고, 유생들은 문하생끼리 뭉쳐 있어 모두 개혁의 주도세력으로 마땅하지 않아 세상을 버린 초연한 사람을 뽑아 폐단을 개혁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신돈이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땅이 모든 재화의 원천이고, 땅을 경작하는 노비 소유의 비례에 따라 경제적 지위가 결정되던 사회에서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를 농민으로 돌려 놓는 개혁사업은 귀족들의 사회적 기반부터 뒤흔들어 놓는 일이라 극심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땅을 되찾은 농민이나 억울하게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난 농민의 입장에서는 “성인(聖人)이 나왔다”였다.

실제로 신돈에 대한 기득권층의 비판은 뇌물과 아첨, 여자를 밝히고 호화주택을 소유했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개혁의 과정에서 토지나 노비를 부정축재했다는 자료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뇌물과 아첨이야 남들이 안보는 데서 일어나는 일이니 말을 만들기 나름이고, 여자의 경우 신돈이 승려라는 점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유학자와는 달리 승려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신분의 사람과 만나는 종교적 직업이다. 따라서 신돈에 대한 비판은 개혁을 엉망으로 한 데 대한 불만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개혁이 이루어지는데 대한 음해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신돈이 왕의 비호말고는 아무런 배경 세력없이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들, 곧 이색 정도전 정몽주 같은 사람들을 개혁의 배후세력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공민왕과 신돈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귀족세력에 대항해 개혁을 해 나갔다. 그러나 이들도 불교를 배척한 성리학자인 만큼 승려인 신돈에게 반드시 호의적인 것은 아니어서 반역 혐의로 죽은 신돈을 비호해 줄 이유가 없었다. 이들과 같은 성리학자들이 세운 나라인 조선에서 만든 『고려사』가 신돈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신돈은 불교계에서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사원이 가진 땅이나 노비가 많아 개혁의 대상인데다가 신돈의 종파가 이 시기에 그리 힘이 없던 화엄종쪽이었다.

이렇게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신돈에 대한 비난이 공민왕에게까지 미치자 어느 정도 개혁의 성공으로 신돈 등용의 목적을 이룬 공민왕은 신돈을 반역의 혐의로 처형하고 말았다. 와이에스시절에 많이 쓰던 말로 토사구팽이었던 셈이다.

결국 신돈은 농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자신의 정치세력 형성에 실패한 탓에 요승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신돈은 귀족만 사람노릇하던 고려시대 사람이다.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개혁을 신돈의 개혁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근만 해도 소수 기득권층의 눈치만 살피다가 대다수 국민의 빈축을 산 실패한 개혁을 어디 한 두 번 보아왔던가? 어느 역사 시대나 개혁은 다수의 인간을 위한 것이다. 역사에서의 진보는 이 개혁이라는 현실적 표현의 추상적 개념이다. 자신의 시대에 걸맞지 않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간들을 위한 개혁을 하려고 한 신돈이 다시 봉건체제를 재강화한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에게 얻어 맞은거야 당연하지만, 요즘 같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우리의 디제이의 개혁은 누구의 눈치를 살피기에 이다지도 느린지… 지하철 복도에서 신음하는 우리 형제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