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송구영신(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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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送舊迎新)

하원호(근대사 1분과)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먹히기 전까지는 섣달 25일부터 그믐까지를 세모(歲暮)라 하고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는 정초(正初)의 놀이를 하는 기간이었다. 이 20일간은 일년 중에서도 가장 경사롭고 즐거운 송구영신의 명절기간이어서 벼슬아치에서 장사꾼에 이르기까지 만사를 접어두고 친족이나 웃사람을 찾아다니며 덕담을 나누고 동기와 친구끼리 어울려 정월놀이를 즐겼다.

을미년(1896)에 양력을 쓰고 요일을 나누어 일요일을 휴무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관청은 휴일이란 게 따로 없었는데 이 기간만은 공식적인 휴무일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12월 25일에는 형조와 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이 모여 회의를 열고 범죄의 사안이 경미한 자들을 석방하고 웬만한 경범은 잡아들이지 않고 주의를 주는 정도에서 끝내기로 합의를 보아 명절 분위기를 돋우었다. 연말이면 오히려 세모 도둑이 기승을 부리고 경찰이 특별경계에 나서는 요즘의 살벌한 풍경과는 다른, 농경사회의 너슨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초가 되면 요새 세상에 대통령이 새해의 정책방향을 설정하고 국민을 향해 덕담을 하는 ‘연두교서’를 발표하듯이 조선시대에도 왕은 정월 초하루날 종묘에 제사를 지낸후 ‘윤음(綸音)’을 내었다. 평상시에는 주로 농업을 진흥시키자는 말이 주된 내용을 이루지만 전해에 큰 정치적 사건이 있으면 국민을 달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윤음이 발표된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후 개화를 주장하던 윤음이나 1884년의 갑신정변 이듬해의 윤음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대신들에게 내리는 새해 선물도 있다. 책이나 부채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요즘 김영삼 대통령이 고향에서 가져온 멸치 봉지를 나누는 데에 비하면 덜 서민적인지는 몰라도 운치는 훨씬 있었다. 군인이나 장사꾼이 아닌 유교적 품성으로 다듬어진 선비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격조 높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아취가 봉건적 수탈로 날을 지내던 지배계급 모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수령들은 세모를 이용해 세도가에 잘 보여 중앙의 관직을 하나쯤 꿰어찰 심보에서 한 해 내내 고을 백성에게서 뺏은 공물을 바리 바리 실어 서울의 권세가문으로 보내는 통에 서울로 통하는 길목은 수레를 끄는 소와 말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 세찬(歲饌)바리는 조선말에 들어 안동김씨를 비롯한 외척의 세도정치가 일상화된 이후에는 공인된 풍조가 되었고 바리수나 내용물에 따라 새해의 벼슬자리가 대충 결정이 되었다.

12월 25일이 되면 아이들도 집안어른에게서 현금을 세찬으로 받아 대보름까지 즐기고 논다. 이 돈으로 연이나 팽이를 사는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안동김씨 가문의 김병국에게서 해마다 세모가 되면 연값을 받았다. 대원군이 권력을 가지기 전에 파락호(破落戶) 생활을 하면서 안동김씨 일문에게 온갖 박대를 받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김병국만은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어 대원군에게도 섭섭지 않게 대하고 세모가 되면 세찬도 보내 과세를 할 수 있게 도왔다. 또 따로 봉투에 엽전을 몇백냥 넣어 겉봉에 고종의 아명인 ‘명복(命福) 도련님 연값’이라 써서 사람을 시켜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고종은 물론이고 대원군이나 부인인 민씨도 안동김씨를 다 미워해도 김병국에게만은 고마워 했고 훗날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이 김씨일문을 모조리 쳐 없애려다가 김병국이 찾아와 말없이 눈물만 흘리자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몇 푼 안되는 ‘연값’이 김씨일문을 멸족의 위기에서 구한 셈이었다.

세모가 되면 타향살이를 하던 사람들도 반드시 집에 돌아와 과세를 하게 되었다. 장사일로 멀리 떠나 있던 상인도 대개 이 때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한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일본상인들이 정초에 일본에서 쌀값이 올라 쌀을 사들여 수출하려고 했지만 우리 상인이 상거래를 하지 않는 바람에 애만 태우는 경우도 많았다. 세모에서 대보름에 이르는 기간의 우리의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경제적 이익을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상인이 많았던 개성지방에서는 10월에 생일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과세하기 위해 다녀간 상인의 집에서는 거의가 10월이 산달이었던 것이다.

사정이 있어 집에 돌아오지 못한 장돌뱅이나 우마차꾼들은 할 수 없이 설날을 주막에서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만은 주막의 주모도 식대를 받지 않고 그냥 대접했다.

귀향할 때는 과세할 돈을 안주머니 깊숙히 차고 간다. 산적이 많던 때라 세모만 되면 산적도 불티나는 호경기였다. 지금의 홍제동에서 서대문 쪽으로 넘는 무악재나 과천의 남태령에는 이 세모경기를 노린 산적이 패거리로 모여 있었다. 화적떼가 나타날 것을 알지만 과세하기 위해 귀향하던 행인으로서는 이것 저것 가릴 처지가 못되어서 알면서도 고개를 넘었다.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어느 지방 고을에서 친구인 수령 옆에서 식객 노릇을 하던 선비가 틈틈이 모아둔 엽전꾸리를 차고 과천에서 서울로 넘어오는 남태령 고개를 넘어오다가 칼든 떼도둑을 만났다. 서슬 퍼른 도둑들의 협박에 죽은 자라목을 하고 산적의 소굴에 끌려가서는 돈도 빼앗기고 입고있던 새옷마저 벗겨졌다. 그래도 인정머리가 남아있던 도둑 하나가 딴 행인에게서 빼앗은 누더기 같은 헌 솜옷을 던져 주어 추운 날씨에 고뿔이라도 면한 욕심으로 걸쳐 입었다. 세모에 사람 명줄 끊기도 뭣한 도둑떼들이 누더기를 입힌 채 산채에서 보내주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라 누더기니 뭐니 가릴 형편도 안됐고 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장이 돌아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안식구로서는 과세할 돈도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실망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옷 한벌 없이 가장을 벗겨놓을 수도 없어 누더기라도 빨아 새로 지어 입힐 생각으로 철없는 어린 것들이 세찬 달라는 소리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옷솔을 뜯었다. 누더기 속의 퀴퀴한 솜무더기를 이리저리 고루다 보니 뭉쳐진 솜덩이 속에서 때갈도 고운 금덩어리가 몇개 나왔다. 헌 옷의 임자가 산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옷 속에 깊히 넣고 재를 넘어 오다다가 헌 옷마저 벗기운 것이 틀림없었다. 돌려줄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 금덩이를 팔아 덕분에 과세를 잘 해 오히려 화적떼를 만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한다.

누구나 이런 행운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영남지방에서 과거를 볼 양으로 상경했다가 몇번을 낙방하고 글선생으로 들어앉은 한 선비는 옹색하기가 짝이 없어 귀향도 못하고 섣달 그믐날 저녁에 속쓰린 사정을 시로 남겼다.

나의 집 더벅머리 다섯살 짜리 아이가 (吾家垂髮五歲兒)
삼경까지는 아버지를 부르다가 오경에는 울리라 (三更呼父五更啼)

삼경은 밤중이지만 오경에는 날이 새니 이미 새해다. 밤새워 아버지를 기다릴 철부지가 가여워 지은 눈물 젖은 시였다.

이 선비의 싯귀는 가난했던 우리 역사의 색바랜 수채화가 되고 말았지만, 쪽박 찬 요즘같은 IMF시대의 세모에는 평생을 일해온 직장을 쫓겨나 하릴없이 공원 한구석에 웅크린 힘없는 아버지의 입에서도 같은 시귀절이 나올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