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변부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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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부자 이야기

하원호(근대사 1분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린 [옥갑야화]는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통역관이었던 역관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적은 글이다. 이 [옥갑야화] 중에 우리가 흔히 [허생전]이라고 부르는 허생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음은 그 허생이 10년 공부를 아내의 등살에 못이겨 7년만에 작파하고 변부자를 만나 돈을 빌리는 장면이다.

허생이 변씨를 보고 길게 읍했다.
“내 집이 가난해서 무엇을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금을 빌리러 왔소.”
“그러시오.”
변부자는 바로 만금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어디론지 가버렸다. 변부자의 자제와 빈객들이 허생의 꼴을 보니 비렁뱅이에 불과했다.(중략)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모두들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아버님, 그 손님을 잘 아십니까?”
“몰랐지.”
“그렇다면 어찌 잠깐 사이에 이 귀중한 만금을 평소에 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헛되이 던져 주시면서 성명도 묻지 않습니까?”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릴 때는 반드시 뜻을 과장해서 신의를 나타내려 하고, 얼굴빛은 부끄럽고 비겁한데 말은 거듭함이 일쑤니라. 그런데 이 손님은 비록 옷과 신이 떨어졌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가짐이 오만한데다 얼굴엔 부끄러운 빛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감을 가진 사람'(不待物而自足者)이다. 그가 시험해 보고자는 것이 적은 것은 아닐 것이고, 나도 그 손님에게서 시험해 보자는 바가 있다. 그리고 주지 않는다면 몰라도 기왕 만금을 줄 바에야 성명은 물어 무엇하겠느냐?”

그 뒤 허생은 매점매석으로 만냥의 돈을 10만냥으로 늘리고, 나중에는 일본에까지 무역을 해서 100만냥을 얻었다가 변산반도의 도둑떼를 데리고 어느 섬으로 가서 이상향을 건설했다. 그리고 돌아 오는 길에 돈 50만냥은 바다에 던져 버리고 나머지는 빈민구제에 쓰다가 10만냥을 들고 다시 변부자에게 찾아왔다고 한다.

전근대의 부자는 대부분 귀족출신이었다. 재화가 모두 땅에서 나왔던 전근대 농업사회에서 부자는 땅부자일 수밖에 없었고, 땅가진 지주는 바로 귀족이었던 것이다. 평민이 부자가 되는 법이라 해봤자 열심히 농사를 지어 ‘밥술을 적시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선후기 사회가 되면서부터 사회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 발전하고 이에 따라 상공업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업에 힘을 써서 평민이 부자가 되는 사례도 나타나는데 허생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물론 허생도 새로운 기술의 개발로 생산력을 올리면서 돈을 모으는 형태는 아니었고 유통과정에서의 매점매석이나 지역간의 가격차이를 기민하게 이용해 재화를 불리는 것이었다.

이 허생의 후예들은 아직도 살아있다. 1980년대말 90년도 초반에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는 별 관심없이 땅값이나 올리고 매점 매석으로 돈을 불리던 재벌들이 300년전 허생의 돈벌이 흉내나 내다가 ‘세계화’된 1990년 후반의 한국경제를 파산으로 몰고 온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허생이야기는 유통경제 자체가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못했던 17세기가 배경이다. 허생의 이야기를 쓴 박지원은 상공업을 중시하는 북학파였고 전하는 메시지도 간단하다. 1만 냥을 가지고 100만 냥을 만드는 일은 봉건적 인간형이 아닌, 상공업의 변화와 유통경제 확대현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 기업가적 인간, 새로운 인간형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형에는 허생을 알아보고 자본투자를 할 수 있는 변부자도 들어간다. 변부자는 제대로 된 투자덕분에 재물을 더욱 크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변부자의 손자가 영정조때 장안의 갑부로 불리던 변승업이다. 변승업은 주로 고리대로 재물을 불렸던 것 같다. 변승업이 중한 병에 걸려 변돈놀이의 총계를 알고자 모든 장부를 놓고 통계를 내어 보니 아직 빌려 주지 않은 돈이 50만냥이나 모여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 “이것을 쪼개서 준다면 나중에 거두기도 귀찮고 빌려주는 날짜가 오래 되면 받을 수도 없게 되니 그만 끊는게 좋겠습니다” 했다. 승업이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것은 서울 만호(萬戶)의 명맥이니 어찌 하루 아침에 끊어 버리겠느냐?”

변승업은 대단한 부자였지만 말년에 재산을 끌어 안고 있지만은 않았다. 많은 돈을 사회적으로 써서 자손은 가난해졌지만 그 음덕에 후손은 번창했다고 한다. 변승업의 시대는 지금처럼 돈이 권력인 시대는 아니다. 변승업은 양반이 아니었고, 따라서 권력가들에게 언제든 재산이 단숨에 날아갈 수도 있는 시대였다. 더구나 고리대는 지금도 인간성을 잃어 버린 인간들이나 하는 거라는 것이 상식이다. 변승업은 그 많은 재산을 흩음으로써 여러 사람의 원성을 막아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