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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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원호의 역사이야기’는 한국역사연구회 근대1분과 하원호 회원의 글을
전재하는 것입니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하원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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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이야기

하원호(근대사 1분과)

돈이란 놈은 돌고 도는 거다. 돈이란 말도 그래서 만들어졌다. ‘돈’의 어원에 대해 항간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속설이 바로 이 ‘돌고 도는’ 설이다.

근래 어느 대학의 권위있는 경제학교수의 연구결과로는 칼 도(刀)자에서 돈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중국의 화폐경제 초기에 쓰인 게 바로 칼모양을 축소해 만들고 그 손잡이 끝부분에 구멍뚫은 도화(刀貨)였다. 괭이나 쟁기 모양을 본뜬 포화(布貨), 고기모양의 쇠돈 어화(魚貨)도 있었지만 도화가 가장 널리 쓰였다고 한다.

원래 화폐의 기원이 물품화폐였고, 그 중에서도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물건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돈으로 쓰이는 것은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 도화나 포화는 고조선의 유적지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도화인 명도전(明刀錢)은 옛 고조선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바로는 20여 개지역이 되는데 많은 경우는 5,000여 개씩 발견되는 곳도 있다.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중국과의 교역이 있었기에 중국도화가 들어와 일부 상류층의 유통수단으로, 재화의 축장수단으로 쓰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 뒤 돈모양이 요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엽전형태로 발전했지만, 도화의 ‘도(刀)’에서 나온 ‘돈’이란 이름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 설은 나름대로 학문적 근거도 갖추고 있어 일부 언론에서는 정설인 것으로 알고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설은 화폐발달의 보편성에 비추어 너무 특수성을 강조한 것이다. 원래 화폐 명칭의 기원은 칭량(稱量)단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국의 파운드는 중량을 재는 단위이고, 영어의 달라는 유태인들의 화폐단위 달란트에서 나온 말인데 달란트 역시 중량단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돈’도 무게를 재는 단위인 ‘돈’에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도(刀)’가 ‘돈’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학문적으로도 훨씬 자연스럽다. 전근대의 화폐는 지금과 같은 명목가치만 있고 실질가치가 없는 지폐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금·은·동·철과 같은 금속화폐거나 물품화폐여서 무게가 바로 돈의 값어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돈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학설은 학자마다 각양각색인데, 최근 프랑스의 어느 경제학자는 사회적 폭력의 산물이라고 한다. 갖가지 상품이 시장에서 대립하는 상황에서 각상품과 상품의 소유자는 폭력적으로 충돌하게 되고 이것을 화해시키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다. 폭력과 화해의 양면성이 돈에 내포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돈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적 충돌을 상기하면 그럴 듯해보이기도 한다.

돈을 가지고 사회의 발전단계와 종교적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학설도 있다. 서양중세봉건시대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예수만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나 그 밖의 성자 등 존경할 대상이 많다. 이것은 봉건사회의 교환수단이 많았던 것과도 일치한다고 한다. 서양중세에는 화폐만이 교환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많은 물품화폐도 교환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들어오면서 종교개혁을 하게 되고 개신교가 자본주의사회의 세력이 가장 큰 종교가 된다.

자본주의의 교환수단은 기왕의 물품화폐가 폐기되고 ‘오직 돈’인데, 개신교의 신앙의 대상이 ‘오직 예수’인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는 어느 종교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종교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앙을 돈과 그대로 연결시키는 것은 돈과는 관계가 없고자 하는 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지만, 종교 역시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역사적 진실에 비추어 보면 구태여 외면할 만큼 잘못된 이야기도 아니다.

문헌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돈은 기자조선의 자모전(子母錢; BC.957)이라한다. 기원전 2세기 경 마한의 동전, 진한의 철전, 동옥저의 금은무문전(無文錢)등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돈은 고조선의 일화전(一化錢)· 명화전(明化錢)이다. 둘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린 둥근 돈으로 한면에 ‘일화’, ‘명화’라고 새겨지고 직경이 1.8-2cm밖에 안되는 작은 크기다. 옛고조선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도 이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은 유물로서도 확인된다.

백제의 무녕왕능이나 몇개의 무덤에서는 벽면을 온통 돈무늬로 된 벽돌로 둘러 쌓아 놓았다. 백제의 왕능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연꽃무늬의 벽돌이 가장 많지만 돈무늬 벽돌로만 장식한 것도 적지 않다. 돈 자체가 종교적 양식으로까지 승화되던 백제의 상품화폐경제 수준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화폐사용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이 남아 있고, 향가로 유명한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저승갈 노자돈으로 종이돈을 사르다가 돈이 바람에 날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대외교역과 국내의 상품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고려때 들면 화폐로 유통되던 금은이 축재의 수단이 되어 절간의 금부처도 제대로 남아나지 못할 정도였다. 농민은 후삼국이래 각지방 호족세력의 각축으로 말미암은 불안한 사회 상황에서 금은이나 금속화폐보다는 당장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물품화폐를 선호하게 되어 쌀이나 베가 중요한 교환의 척도가 되었다.

고려정권이 안정되면서부터는 금속화폐의 주조도 많았다. 은으로 고려의 영역을 본따 만든 은병도 있었지만 워낙 교환가치가 높아 지배계급 간의 뇌물로나 사용되었고 민간에서 실제로 쓰이는 일은 드물었다. 지폐인 저화도 만들었으나 농민이 저화에 대한 국가적 담보를 믿지 않아 저화유통 자체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많은 화폐사용의 시도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가장 민간에서 교환의 수단으로 많이 쓰던 화폐는 포화(布貨)였다. 이것은 앞서 예를 들은 농기구를 본따 만든 중국고대의 포화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베 포(布)였다. 이 포화도 고려말기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이후는 무명이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포화를 국가적 법정화폐로 규정하기까지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실려 있다.

조선은 건국초기에 조선통보와 같은 동전도 만들었지만 고려의 저화를 이어 종이돈도 발행했다. 동전같은 금속을 투자하지 않고서도 종이에 가액만 적으면 되는 지폐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거의 경비가 들지 않는 종이돈 발행 그 자체가 재정을 부풀리고 자신의 호주머니도 늘리는 것이었다.

이 돈은 국가가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했지만 실제 사용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서울에서나 일부 쓰일 뿐 지방에서는 여전히 포화를 썼다. 저화는 사방 1자나 되는 크면서도 질이 낮은 종이로 만들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쉽게 닳아 떨어졌고 닳아진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낮아졌기에 일반 백성은 그 사용을 극력 기피했다. 게다가 당시의 사회는 농업을 중심으로한 자급 경제가 일반적이어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아무런 실질가치가 없는 이 종이돈은 농민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저화의 통용을 폐지할 즈음에는 저화를 발행하던 사섬서에 쌓인 양이 200만 4,000여 장에 달했다.

임진왜란은 은화를 사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은 은화의 사용이 많았고 병사의 급료도 이것으로 지급했다. 1600년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 3,000명의 식량, 부식비만해도 한달이면 은화 12만냥이 요구되었다. 우리 쪽에서도 이를 부담하지만 중국에서도 은화를 들여오고 있어 조선사회 내부에 상당량의 은화가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또 한 기록에는 전쟁이 소강상태에서 상인들이 왜병 진지에 물품을 조달하고 은을 받고 이를 다시 중국의 진지에 넘기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조선정부는 은화는 사용금지토록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되니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세기에는 은화가 널리 유통되었다.

동전도 몇 차례의 발행시도끝에 1678년부터 상평통보를 발행했다. 이후 우리나라의 동전은 이 돈이 금속화폐로는 가장 많이 쓰였다. 흔히 엽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돈을 가리킨다. 이 돈은 계속 발행할 금속의 수요가 모자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발전하는 경제생활에 맞추어 화폐를 발행하지 못함으로써 일종의 디플레이션현상인 ‘전황(錢慌)’현상이 나타나고, 화폐가 축재의 수단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개항이후에는 개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재정의 확보가 필요했고 그 결과물이 1883년부터 만들어진 당오전이다. 이 동전은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5배이지만 실질가치는 거의 같은 악화여서 물가만 올리고 사회적 불안을 가져왔다. 게다가 이 돈은 평안도나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지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서울을 중심으로한 일부지역에서만 사용되어 한 나라안에 사용되는 화폐가 지역에 따라 다른 현상까지 보였다. 이 돈의 사용이 폐기된 이후에는 백동화란 악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 현상은 당오전과 다를바 없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일본화폐의 신용이 높아 일본엔화가 교환에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전통적 화폐도 일제가 나라를 먹으면서부터는 폐지되고 일본화폐로 대치되었다.

해방이후 화폐개혁의 과정까지 겪으면서 많은 돈이 나왔고, 요즘은 대학생도 신용카드 몇개를 가지고 다닐 만큼 돈의 형태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돈에 대한 물신적(物神的) 신앙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 말을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갈수록 ‘오직 돈’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깊어만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심의 깊이 만큼 우리의 인간생활도 메말라 간다. 몇년전 유산상속을 노려 부모를 살해한 오렌지족 청년은 그 신앙심의 희생양일 뿐이다.